210528
나의 이야기 (22) 신데렐라 이야기- 1967년 김천고등학교 2학년
“아부지요, 학교에서 요번 여름에는 2학년 모두 청암사에 딜고 가 합숙보강을 한다는데 우짜지요?”
내가 부모님께 여쭈었다. 매년 여름방학에는 2학년 전부 김천 근교에 위치한 신라 때 고찰 청암사에 데리고 가서 방학기간 합숙보강을 시키는 것이 김천고등학교의 전통이었다. 비용은 그야 말로 실비였으나, 돈도 돈이고 엿공장의 주요 인력인 내가 빠지면 운영에 어려움이 있을 걸 뻔히 아는지라 내가 쭈볏쭈볏 눈치를 살피며 부모님께 이 말씀을 드렸던 것이다. 너무 일찍 철이 든 바보라 그랬던 거다.
“야가 무슨 소리고. 니 성도 없는데 니마저 빠짐 공장 우째 돌리라 카노? 꼭 거기 간다꼬 공부한다는 법이 어데 있노, 니 하기 나름이지.”
아부지 말씀이다. 울 형님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군에 입대하셔서 아직 제대하지 않았던 때이다.
아부지 말씀을 들으니 속이 터지려 했다.
“아이고, 아부지 그기 어데 내 하기 나름이유? 집에 있음 공부할 시간이 하루 한 시간도 없는데.”
속으로 웅얼거렸지만 그래도 어쩌는가, 그게 부모님 말씀인 걸. 부모와 형님 말씀이라면 아무리 답답해도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이 뼈에 배인 나인지라, 그 해 여름도 꼼짝없이 새벽부터 밤중까지 엿공장 일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공장 일하다 불이 나케 학교 가고, 학교 갔다 오면 다시 공장 일에 매달리고 이게 학생이 하는 짓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대학시험이 1년반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들 다하는 합숙보강마저 빠져야 하니 “이걸 우짤꾜?” 고민이 엄청 되었다. 옛날에는 독일제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공부를 잘 했는데, 중학교 입학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엿공장 일꾼으로 출세해서 공부는 뒷전이 되었다. 그래, 당시 내 성적순위는 학교에서 30위 정도를 오르내렸다. 그동안 글을 통해 나눈 대로,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쪼맨한게 자존감만은 하늘까지 높았다. 뭐 알렉산더 같은 영웅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았으니 그게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러나, 여러 해 성적이 부진하다 보니, 개코도 없는게 높기만 했던 내 자존감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뭐, 보여줄 게 있어야지. 그 정도 성적으로는 서울대는 커녕 잘 해야 경북대 정도를 노릴 수 있었으니까, 나도 우째야 좋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우리 집 형편이 내 학비를 부담하기에는 택도 없음을 익히 아는 나였다. 그래, 이대로 가면 대학 진학을 포기하거나 마음에도 없던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고학하며 공부할 수 있는 학교는 서울대학 밖에 없다. 그런데 우짤꼬? “내 성적은 그에 한참 못 미치는데.” 고민한다고 누가 도와 줄 것도 아닌 지라, 내 나름대로 방법을 궁리했다.
“그래, 내가 제일 딸리는 게 영어이니까 혼자 공장에서 불 때면서 볼 영어 참고서라도 하나 찾아보자.”
당시 내 최대 약점은 영어와 독일어 과목이었다. 시험만 보면 기껏해야 70점 정도밖에 맞지 못해서 도시 어디서 얼굴도 들지 못했다. 남들 다 가진 흔한 참고서 한 권 없었기에, 혹시 눈먼 책 하나 안 보이나 하고 주위를 살폈다. 당시 우리는 모암동에서 엿공장을 하고 살았는데, 울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박석동이란 동무가 살았다. 걔네 집도 우리 집에서 강엿을 받아다 그걸로 엿을 뽑아 파는 엿장수들이 있는 엿집이었다. 어느날 석동이 집에 갔더니, 고물 중에 헌 책이 한 권 삐죽이 보인다. 그래, 슥 보니 이게 영어 참고서인데 앞부분이 30 장 정도 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없는 님이 그게 어디인가? 그래, 석동이에게 부탁했다.
“야, 석동아 너 이거 필요 없음 내 가져 가도 되나?”
“어, 그래 그거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돈도 안 되는 거니까 니 갖고 가.”
그래, 그걸 가지고 와서 오른손으로 엿공장 아궁이에 톱밥을 던져 넣는 한편 왼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이 바로 내 인생을 변화시킨 계기가 된 책 두 권 중 하나인 “김학기 삼위일체 중고등종합영어”였다. 그게 그러니까 내가 평생 처음으로 접한 영어 참고서였는데, 세상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 책의 앞부분 50 페이지를 읽는데 갑자기 그때까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영어구문이 머리에 선명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후에는 어찌 재미가 있던지 그 책을 순식간에 다 읽고 나서 다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나였던지라 엄청 빠르게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공장 아궁이의 화력을 올리기 위해 전기모터를 돌려서 풀무에 연결해 바람을 일으켜서 부쳤다. 그런데, 그 소리가 “타타타”하는게 인민군 따발총 소리처럼 나서 옆에서 누가 고함을 쳐도 들리지 않았다. 내 왼 귓대기 바로 옆에는 따발총 소리를 선사하는 모터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연료인 톱밥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정면 아궁이에는 불길이 펄펄 타올라 온 몸을 벌겋게 달구었다. 나는 따발총 소리를 음악 삼아, 얼굴과 온몸이 벌겋게 익은 채 땀을 찔찔 흘리며, 공장 아궁이에 연료인 톱밥을 손삽으로 퍼 넣으면서 책을 읽었다. 생각해 보시라. 집중해서 공부하기에는 최악의 조건 아닌가? 그런데 희한했다. 집중도 잘 되고 그 내용이 어찌 그리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지 모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로 왼손에는 책을, 오른손에는 삽을 들고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했는데, 집중도가 100%로 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실, 그게 내 장점 중 하나이다. 나는 상황에 상관없이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옆에서 누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몇 시간이고 집중할 수 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니, 합숙보강했던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돌아 와서 지들끼리 난리이다. 뭔 소릴 하나 하고 귀를 기울이니, 아 이놈들이 누구 약 올리는지 내 앞에서 지들끼리 청암사에서 지내면서 겪었던 추억을 왁자지껄 나눈다.
“짜식들, 정말 배려심 빵점이네. 지들만 생각하나? 못 간 사람도 생각해야지. 에이 몹쓸 놈들.”
내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애들 떠드는 걸 들으며 가만히 생각하니, 슬며시 걱정근심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애들은 청암사에서 합숙보강을 했고, 나는 집에서 공장일만 하다 왔으니 더욱 성적격차가 떨어졌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불안한데, 2학기 개학하자 마자 운명의 시험대가 눈 앞에 성큼 나타났다. 그해 처음으로 당시 서울 경기고등학교에서 사용했던 모의고사 문제를 입수해서 2학년 2학기가 시작하자 마자 영어, 수학 두 과목의 모의고사를 치르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암사에서 합숙한 성과를 측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학교 전체를 황당하게 한 결과가 나왔다. 청암사에도 가지 못했던 내가 다른 애들을 제치고 영어 과목에서 압도적인 1등을 한 것이다. 그래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야, 이기 우애된기고? 방학 동안 청암사도 안 따라오더니 니 혼자 뭔 짓을 했기에 갑자기 이리 좋은 성적을 받았노? 어데 특별한 데 가서 배우고 왔나? 솔직히 얘기해라.”
“아 참, 더러버 죽겠네. 청암사 못 갔는 기 안 그래도 설분데, xx 공부 잘해도 욕 먹네.”
선생님 말을 들으며 입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웅얼거렸다. 사실 애들이나 선생님들 공히 내 모의고사 성적이 진짜라고 믿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짜식이 뭔 짓을 했거나 운이 좋았을 뿐이다”고 생각했고, 솔직히 당사자인 나도 그 결과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른 시험도 아니고 경기고등학교에서 그해 실시했던 모의고사 문제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라 내가 그걸 미리 알 턱이 없었던 것을 뻔히 아는지라, 선생님이 한번 불러 내게 요상한 소리를 하신 후에는 그 사건은 그냥 지나갔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녀석이 어쩌다 성적 한번 잘 받았을 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26년 간 교수생활을 하다보니 그 때가 더욱 생각난다. 내가 그때 선생이었음, 관심을 가지고 격려와 상급을 주었을거다.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가? 그해 여름 다 떨어진 고물 책을 엿공장 화부노릇을 하며 읽었을 때 내 머리에 무언가 “클릭”하더니, 그 후에는 책을 보든 수업을 듣든 내 머리에 모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공부가 이렇게 쉽고 재미있는 줄 새삼 깨달았다. 사실 국민학교 때는 원래 이랬던 것인데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뭐가 막혔다가, 이걸 계기로 내 머리가 다시 정상화되었던 것이다. 원래 나는 영어는 부진했어도, 수학과 국어 같은 과목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거의 100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5년간 부진하여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영어를 해결하니까 전 과목의 모든 공부가 완전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 그 후 닥치는 대로 친구들이 가진 참고서들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보통 2주면 한권을 읽었다. 아마 당시 시중에 나온 모든 참고서를 섭렵했을 것이다. 마침 군에 가셨던 형님이 제대하고 돌아오셔서 내가 주역이던 엿공장 일을 맡아 주셨던 덕분이다. 그래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3학년 1학기 초에는 학교를 대표해서 서울대 영문과에서 주최하는 전국 영어경시대회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게 후일 내가 영문과에 진학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3학년 1학기가 끝났을 때에는 입학 후 처음으로 김천고등학교 수석을 차지했다. 학교에서 그제서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기 시작해서 당시 담임이시던 고무림 선생님의 격려도 많이 받았다. 그야 말로 부엌때기 신데렐라가 공주로 탈바꿈한 꼴이다. 당시 김천고등학교 17회 동기 중에 서울대학을 간 사람은 4명인데, 그 가운데 2학년 1학기 때 나를 경쟁자로 여겼던 애는 한 명도 없었다. 걔들은 항상 5등 이내에 들던 금수저였고, 나는 30위 안팎을 오르내리는 흙수저였다. 나는 늦게서야 수석을 했지만 장학금은 받지 못했다. 그래 결국 평생 한번도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내가 항상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두 가지 격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