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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6) 고정관념을 깨뜨리다- 1978년 삼성물산 사원시절
“김진태 씨, 자네도 이제 품목을 맡아야지. 자네는 강관을 맡지.”
1977년 7월 7일 입사해서 연수를 끝내고 당시 삼성물산 금속과에 배치되어 4개월 정도 금속과 고참 5인의 종노릇을 한 후의 일이다. 당시 허 과장께서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근데 그말을 듣는데 어째 기분이 이상해서 살짝 돌아보니, 그 얘기를 옆에서 듣는 과 선배들의 표정이 참 요상했다. 그 때 나는 다른 동료와 함께 금속과에 배치 받았는데, 우리보다 딱 6개월 먼저 입사한 직원이 두 사람이었다. 그게 J 씨와 H 씨였는데, 평소 자신이 맡은 품목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J 씨는 허 과장 말을 들으며 야비한 표정을 짓는데 어째 고소하다는 것 같았고, 사람 좋은 H 씨는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과장보다 나이도 많고 고참이던 주무 L 씨는 “아이고, 김진태 클났구나”했고, 그 다음 순번인 K 씨는 “뭐, 쫄짜 팔자가 그런거지. 박으람 박아야지” 했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분은 후일 나와 짝꿍이 잘 맞아 미국에서도 강관사업을 동업하셨던 Y 씨였다.
“김형, 그거 상사가 전혀 수출실적이 없는 품목이지만 품목별 수출실적 4위내에 드니까, 잠재력은 큽니다. 실망하지 마소.”
참고로, Y 씨는 나중에 나보다 일찍 철강전문 지점이었던 휴스턴지점에 발령 받아 나간 후 나와 긴밀하게 협조했고, 후에 독립하여 큰 사업을 일구었다. 이 양반도 나처럼 늦게 미국에서 예수를 만나서 침례교회 안수집사로 교회를 세우고 평생 번 돈을 바쳐 섬겼다. 나도 항상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몸에 밴 성격이었던지라, 남들이 뭐라고 하든 열심히 강관사업에 관해 공부하고 준비했다. 내 나름대로 강관을 수출하려고 해외 거래선을 찾아 헤매는 한편 제품공부를 철저히 해서 철강제품에 관한 한 금속공학을 전공한 사람 못지 않은 지식을 갖추었다. 후에 내가 미국시장에서 “Dr. Pipe”란 별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바탕이 거기에 있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긴 했지만 생전 처음 상사에서 내 품목을 할당 받아 내 사업을 회사조직과 자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기차화통처럼 뛰었다. 나는 그날부터 숨쉴 틈도 없이 열심히 강관을 팔 방도를 강구했다. 그때 나는 시간이 아까와 화장실 갈 때도 뛰어다녔다. 원래 나는 걸음이 힘차고 박력이 있어서 걷기만 해도 땅이 쿵쿵 울린다. 그러니 회사 내에서 뛰어 다닐 때 건물이 얼마나 진동했겠는지 상상에 맡긴다. 그 때문에 당시 동방빌딩 본관의 세 층을 차지했던 삼성물산 전 직원은 지진의 강도에 따라 내가 움직이는 동선을 모두 알곤 했다. 참 여러 가지로 회사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것인데, 그걸 두고 남들이 뭐라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노? 참 별난 놈 하나 왔네." 이게 당시 회사 직원들의 내 평가였다.
근데, 그렇게 죽어라 뛰었는데 성과가 없었다. 산지사방에 있는 해외 거래선들에게 열심히 편지와 텔렉스를 보내도 답이 오는 데가 드물고, 어쩌다 답이 와서 그걸 들고 당시 강관업체 수출부로 가서 매일 인사해도 아 이 친구들이 웃기만 하고 도시 내가 낸 문의에 답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냉대를 해도 매일 아침마다 몇 개월 강관업체들의 수출부에 출근해서 정성을 보이니까, 거기 여직원들은 내가 가기만 하면 묻지도 않고 커피를 내 왔고, 내기 장기를 좋아하는 수출부장은 이번에는 나를 꺾겠다고 장기판을 들고 내 앞으로 오곤 했다. 당시에는 아직 미혼인데다 인물 좋지 사람 좋지 그러니 여직원들은 나를 아주 반겼다. 그렇게 강관업체 양반들과 사귀기를 수 개월 한 후에야, 불쌍하다고 가격 오퍼를 주기 시작했다.
"어이, 저 친구 맨날 와서 헛물만 켜고 가는거 보니 불쌍하네. 물량 2천톤 정도 줘서 팔아오나 보게!"
당시 상사에게 일체 물량을 주지 않았던 부산파이프 K 수출부장의 명이었다. 완전 거지에게 동냥 주는 기분으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물량 줌 뭘하나? 그걸 받아서 해외 거래선에 가격을 책정해서 보내도 도시 성사되는 일이 없었다.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이러다가는 헛물만 켜다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딴에 대책을 강구했는데 그게 미국 출장이었다. 그래 회사에 해외출장 품의서를 “개발새발” 작성해서 허 과장에게 올렸다. 그 내용은 이렇다.
“아니, 도대체 물건 사는 님이 어떤 님인지 그 동네 물건 값은 얼마인지, 제품의 유통구조는 어떠한지, 같은 강관이라도 어떤 제품이 잘 팔리고 이문이 남는건지, 뭘 알아야 장사를 할텐데 가 보지도 않고 앉아서 해외 거래선들이 주는 문의만 받아서 작업해 가지고는 도저히 승산이 없습니다. 강관 수출실적을 보니 미국향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내가 미국에 출장 가서 시장을 돌아보고 거래선을 개발해 와야겠습니다. 글쿠 왜 내가 아무리 가격 오퍼를 해도 성사가 안되는지 이유라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니, 2주간 출장을 허락해 주십시오.”
뭐 이런 요지의 품의서였다. 참고로, 내 필체는 소문난 악필이라 누구든 내 글을 읽으려면 눈쌀을 찌푸리고 집중해서 봐야 했다. 허 과장이 내 품의서를 눈쌀을 찌푸리고 보시더니 내게 물으셨다.
“김진태 씨, 이게 뭐에요.”
“아, 거기 쓰여 있잖습니까? 미국출장 품의서입니다. 시장도 모르고 뭔 장사를 합니까? 우선 갔다 와야 뭐가 되도 될낍니다.”
“아니, 그게 품의서인 줄 내가 모르고 묻는가? 이 친구가! 정말.”
허 과장과 내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들은 직원들이 눈이 뚱그래져서 날 쳐다 보는데, 그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읽혔다.
“아니, 저놈 미쳤나?”
나야 워낙 눈치가 없고 내 할 일만 하는 사람이라 뭘 몰랐지만, 당시 해외출장은 부장급은 되어야 갈 수 있었고, 그것도 회사에 큰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포상조로 준 특혜였다. 그걸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쫄짜가 겁대가리 없이, 그것도 모두가 최고로 선망하는 미국에 가겠다고 품의서를 올렸으니 오죽했겠는가? 다행히 허 과장은 성품이 너그러운 분이셨는데다 평소 나를 곱게 보셨는지 인상을 쓰시면서도 결국 도장을 찍어주셨다. 그리고, 이어 부장, 상무, 부사장까지 결재를 받았다. 당시 나야 결재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히 머리를 숙이지도 않았다. 마치 빚 받으러온 빚쟁이처럼 품의서를 내밀고 도장 눌러 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한번 내 상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시라. 기분 더러웠을 것이다. 이 쫄따구가 싹싹 빌어도 해 주기 어려운 건을 들고 와서 하는 말이나 태도가 “이거 도장 안 찍음 당신 문제가 있는 사람이야” 하는 듯 했으니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상식은 윗 사람은 아랫 사람이 서류 가지고 오면 도장 눌러주는 기계라는 생각이었다.
"아니, 윗 사람이 업무파악을 어떻게 다 하나? 믿고 밀어주는게 윗 사람 일이지."
근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허 과장께서 내 품의서를 위로 올리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돌하기 짝이 없는 내 품의서가 승인되기까지에는 당시 부사장이셨던 주영석 씨의 넓은 배포가 주효했다. 이 양반 내 품의서를 보시더니 씩 웃으시며 “그 친구 물건이네” 하시며 도장을 빵 찍어주셨다고 한다. 주영석 씨는 일찍 미국에서 공부하시고, 포항제철 초기 미국 현지법인을 설립하셔서 운영하셨던 미국통이시다.
품의서 건으로 돌아가자. 나야 내가 올린 품의서 내용에 확신이 있었기에 윗 사람들이 “어느 누구도 감히” 이걸 거부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 당연히 결재가 날 줄 알았지, 그 와중에 회사 간부들 간에 기상천외한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 사실을 나만 몰랐다. 그거 아는데 그 후 6년이 걸렸다.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지 감을 잡으실 것이다. 사실 나는 거기에 한 수 더 뜨서 엉뚱한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회사에서 아무리 출장을 길게 보내야 2주가 최대여서 나는 품의서에 2주만 다녀 오겠다고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속셈은 최소한 한 달은 다녀야 그 넓은 시장을 파악할 수 있음을 알고 거기 가서 연장할 속셈이었다.
그 해 겨울 생전 처음 비행기라는 것을 탔다. Northwest 항공편으로 빙빙 돌아 LA에 도착해서 거기 거래선들을 방문하고 다니는데 영어도 제대로 안 되는 촌놈이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택시 타고 찾아 다니다 보니 금방 한 주가 지났다. 그 때 가려고 계획했던 도시가 서부인 LA외에도 걸프 해안 쪽인 Houston, TX, 중부인 Chicago, 동부인 New York, 중남미인 Mexico City, 캐나다 동부인 Montreal인데 비행기만 타고 다녀도 2주가 더 될 것 같았다. 그래, LA 지점에서 직접 본사에 텔렉스를 쳐서 보냈다. 물론 영어로 보냈지만 한국어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미국에 와서 다녀 보니 이거 엄청 넓은 땅 덩어리입니다. 2주에 시장을 파악한다는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니, 제 출장을 1개월로 늘려 주십시오. 출장비는 2주 분 밖에 받아오지 않았지만 추가비용은 지점에서 빌려 쓰겠으니 나중에 본사에서 갚아 주십시요.”
나는 내가 보낸 텔렉스가 본사에 어떤 회오리를 몰고 왔는지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나 땜시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 텔렉스의 첫 영어 문장이 삼성 직원 모두의 입에 회자하는 명문이 되었다. “America is too big to cover in two weeks.” 아니, 세상에 신입사원이 겁 없이 미국출장을 다녀 오겠다고 한 것 부터가 완전 또라이인데, 이게 보내주었더니 거기에 몇 수를 더 보태서 요구했으니 다들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어떤 쫄짜가 감히 출장지에서 텔렉스로 출장연장을, 그것도 한 달이란 긴 기간을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감히 지점에서 돈을 빌려 쓸테니 본사에서 갚으라고 하는 말이 꼭 사장이 쫄짜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후에 내가 뉴욕 주재원으로 있을 때 보니까, 이병철 회장이나 그 가족들이 미국에 오면 이런 요구를 자주 했다. 내 텔렉스를 받고 본사 양반들이 어떤 생각을 했겠는지 감이 좀 잡히실 것이다. 그래 우리 과 직원들 특히 평소에 나를 삐딱하게 보았던 양반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친구 평소에도 겁대가리 없더니 이제 죽을라고 환장했네. 출장 갔다 옴 어째 되는지 보자.”
내가 알기로, 나처럼 아무 배경도 없는 신입사원으로 미국 출장도 내가 1호였고, 그걸 현지에서 연장해 달라고 요청한 사례도 내가 1호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가? 그 때 중화학사업본부장이 서울상대 출신 서주인 상무이셨는데, 이 양반이 내 텔렉스를 읽고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야, 뭐 이런 놈이 다 있노. 이미 지가 저질러 놓고 텔렉스 보낸 걸 어짜노. 결과가 어째 되는지 함 두고 보자.”
내가 인덕이 있으려고 이런 분이 그 때 그 자리에 계셨던거다. 삼성이 현재 세계적인 기업이 된 이유가 바로 이런 인재들을 발탁해서 기용했기 때문이다. 그래, 서 상무의 결재로 내 출장연장이 승인되었고, 추가경비는 지점에서 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가 떨어져서 출장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내가 돌아 왔을 때 내게 시비 건 윗분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이 겁대가리 없는 자가 우째 되는지 수군수군하며 바라보았던 무능한 직원들은 도처에 즐비했다. 이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무사히" 그리고 "열심히" 내 일만 했다. 이 글을 읽으시며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나는 뭐든 한번 결심하면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하든, 어떤 해꼬지를 하든, 상관하지 않고 탱크처럼 내 할 일만 하는 저돌적인 성격이다. 싸나이 중 싸나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에서 내게 딴지를 걸었던 무능한 양반이 꽤 많았는데 유독 나만 그걸 모른 채 내 할 일만 했다. 내가 너무 힘차게 밀고 나가니까 딴지를 걸려다가 자기들만 자빠졌던 것이다. 이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출장 중 내가 겪은 이야기를 다 기록하려면 책을 한 권 묶어야 해서 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이 출장으로 내가 달성했던 성과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앞으로 큰 사업에 뜻이 있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될 내용이다.
첫째는, 최초의 대형수주 달성이었다. 나는 이 출장에서 거래선들을 여럿 만났고, 연락처만 확보한 거래선도 제법 되었다. 돌아오자 마자 이들에게 거래를 트기 위해 밤이 맞도록 텔렉스를 두드렸다. 그러나, 어찌된 것이 한 곳에서도 답이 오지 않았다. 그걸 한 달을 계속하니 내가 이거 뭘 제대로 하는건지 긴가민가했다. 이미 다른 이야기에서 보신 대로, 내게는 거머리 근성이 있어서 한번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평화를 좋아해서 절대 먼저 시비를 거는 법이 없지만, 일단 싸움이 붙으면 줘 터지면서도 이빨로라도 한 군데 물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나보다 크고 힘센 애들도 오래 끌면 결국 항복하곤 했다. 물론 내가 한방에 나가 떨어진 경우는 예외였다. 그래, 밀려 오는 불안감을 뿌리치고 두 달을 계속 텔렉스를 두드렸다. 그랬더니, 그야 말로 소 뒷발에 쥐잡기로 딱 한 군데에서 답이 왔다. 그 회사는 당시 미국 중부에 있는 강관 제조업체로서 수입도 겸했던 회사였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생산하지 않았던 전선을 깔 때 그걸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선용 강관을 공급할 수 있는지 문의해 왔다. 이 회사가 바로 그 제품을 생산해서 미국 동부 전역에 공급하는 회사였는데, 수요가 많아 일부를 수입으로 충당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그걸 들고 한국강관 수출부에 가지고 갔더니, 그게 제조하기가 아주 까다롭지만 고가품이라 흥미가 있다고 해서 본격적인 수주작업을 진행했다. 그해, 이 회사와 거래가 성사되어 백만 불에 상당하는 첫 주문을 받았고, 그게 매년 분기마다 반복되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직거래 실적이 전무했던 강관이 당당하게 삼성물산의 주요 수출품목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출장 갈 때, 인상을 쓰며 내가 폭망할 것이라고 속으로 수군수군하던 동료직원들이 부러운 눈으로 날 쳐다 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당시 한국 3대 강관제조업체 가운데 하나인 한국강관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거래선 향 제품을 거기에 몰아서 주었기 때문이다. 이게 강관 직거래로 한국 종합상사가 미국에서 수주한 첫 거래이자 대형 수주였다. 이게 내 초기 강관사업의 기반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내에서나, 사외에서나 내 입지는 성큼 올라갔다. 그동안 나를 거지 대하듯 대했던 한국강관 수출부 직원으로부터 수출부 총책 상무까지 나를 중요 거래선으로 인정해서 그때부터 내가 들고 가는 건이면 성실하게 답을 주기 시작했다. 나를 특히 좋아했던 수출부 직원 한 사람은 내게 주는 가격은 일부러 다른 거래선보다 가격을 낮게 책정해 주어서 내가 수주를 성사할 수 있도록 암암리에 돕기까지 했다. 거지에서 왕자 대우로 바뀐 것이다. 내가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얼굴에 뻔쩍뻔쩍 빛이 나서 종횡무진 회사를 뛰어 다니며 매일을 신나게 살았다. 사내에서도 쫄따구가 지 하고 싶은 대로 다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 내 윗분들은 뭐든 내가 품의를 올리면 읽어 보지도 않고 도장을 빵 찍어주셨다. 당시 내가 워낙 쫄짜이다 보니, 미국에 있는 지점들이 내가 요구하는 수주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고, 텔렉스를 보내도 깜깜무소식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 내가 애용했던 양반이 바로 주 부사장이셨다. 내가 주 부사장의 이름으로 "지점을 족치는" 텔렉스를 직접 기안해서 부사장실로 가져 가면 씩 웃으시며 도장을 빵 찍어주셨다. 신입사원이 부사장실 드나들기를 제 집 드나들 듯하며 부려 먹은 것도 아마 삼성에서 유례가 없었을 것이다. 그게 초기 지점의 게으른 선배들을 내 손발처럼 부려 먹을 수 있었던 내 비장의 카드였다. 참고로 주 부사장은 그걸 엄청 즐거워하셨다.
"자네는 날 맘껏 부려 먹게. 그러라고 나 같은 사람이 위에 있는걸쎄."
언젠가 내게 하신 말씀이다. 사실 주 부사장과 얽힌 재미있고 황당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건 또 다른 글에서 나누겠다.
둘째는, 신규시장 개발이었다. 나는 출장을 통해 그동안 미국 서부의 거래선들에게 가격을 내어도 성사가 안 된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서부시장은 한국에서 가장 가깝고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필요가 없는 데다, 미국 강관제조업쳬가 없는 고로 한국 강관업체들의 경쟁력이 높았다. 그래서, 서부지역 거래선들은 오래 전부터 강관업체들로부터 직접 수입했기 때문에 후발주자인 상사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를 깨달은 나는 강관업체들이 수출을 하지 않았던 시장을 개척하기로 했다.
"아니, 서부가 안되면 딴 데로 수출함 되지. 시상에 메이커고 상사고 모두 미리 안된다고 포기하는 바보들만 있네."
내가 했던 말이다. 왜냐 하면 미국 걸프 해안지역과 동부와 중부지역은 운임도 비싸고, 수송기간도 오래 걸리고, 미국 강관제조업체들의 독점시장이었기 때문에 수입품은 발을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 강관제조업체나 상사들의 공통적인 견해였기 때문이다. 안 될 이유가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나 되니 이들 생각도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남이 안 된다고 하면 꼭 해내려는 반골기질이 있어서 남들이 안 된다고 하니까 더 하고 싶었다. 그래 그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려 했고, 그 시도는 후에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셋째는, 전망이 좋은 신규품목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내가 미국에서 받았던 첫 수주제품도 그 전까지는 한국에서 생산하지 않았던 신규품목이었다. 나는 내 멋대로 시장성이 좋고 전망이 좋은 석유산업용 강관제품을 판매 주종제품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있다. 내가 미국 시장에 출장 가서 보니 한국 강관업체들이 수출했던 일반강관을 송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거기 송유관 취급업자들에게 물었다.
“아니, 일반강관을 송유관으로 사용하면 그게 버텨 냅니까?”
“그 모르는 소리 말게. 한국제품의 품질이 얼마나 좋은지 당신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걸쎄. 일반강관이지만 송유관으로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들의 대답이었다. 당시 송유관은 고가품으로 일반강관에 비해 그 가격이 20% 이상 비싸게 팔렸는데, 일본 강관업체들이 수입품 시장을 주도했다. 한국제품은 일반강관 가격인데도 그 품질은 송유관으로도 문제가 없었으니 당연히 인기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를 뿐 아니라 믿으려 하지 않은 것은 한국 강관업체들 밖에 없었다. 이제 신규품목을 개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신나게 거래선의 문의내용을 들고 강관업체들의 수출부에 가져갔더니 하나같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하도 답답해서 물었다.
“아니, 거기서는 이미 당신들 제품을 송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것이요?”
그랬더니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김형, 우리 현재 시설이나 기술로는 석유산업용 강관제품을 생산할 수 없어요. 그러니 송유관 건은 말도 꺼내지 마시오.”
그래 내가 어쨌을 것 같아요? 내겐 원래 거머리 근성이 있잖습니까? 계속 찾아 가서 비벼댔지요. 그랬더니, 지겨워진 수출부 담당자가 내게 이렇게 얘기했어요.
"김형, 문제는 기술진이 죽어도 불가능하다고 수주 못 하게 막는 것이요. 그러니, 기술진부터 설득해서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이 친구도 내가 그동안 끈질기게 쪼아대니까 마음이 반은 하는 것으로 돌아 선 것이었다. 그래서, 공장까지 찾아가서 기술진을 만나 설득하기 시작했는데, 이 양반들 죽어도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뼈 속까지 스며 있었다. 한국 강관업체들의 설비는 모두 일본 강관업체들이 공급해서 최초가동 뿐 아니라, 그 기술진의 교육까지 도맡았었기에, 한국 기술진은 일본 기술진의 말이라면 예수님 말씀처럼 믿었다. 일본 기술자들이 이들에게 맨트라처럼 이렇게 얘기했다고 했다.
"당신들 기계설비는 물 파이프와 개스 파이프 정도나 생산할 수 있도록 설치된 것이다. 석유산업용 강관생산은 그걸로는 생각도 하지 말아라!"
이 소리를 들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 바보들 어째 경쟁사의 말을 그렇게 믿나? 지들이 미국시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나 해."
그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아마 삼십 번 정도 찍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죽어도 안 된다고 버티더니, 결국 내 설득에 넘어갔다.
"문제가 생기면 삼성이 책임 질테니 No claim 조건으로 생산하시지요. 계약 조건에 그걸 삽입하셔도 좋습니다."
쫄따구였던 내가 임의로 약속했던 내용이다. 윗 사람이 알았으면 회사 말아먹을 놈이라고 펄펄 뛰었을 일인데, 그때는 내 재량이 사장급이어서 어물쩡 그냥 넘어갔다. 사실 이외에도 내가 임의로 저질렀던 만행(?)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 확신대로 송유관 수출사업에서 문제가 발생한 건은 한 건도 없었다. 급기야는, 한국 강관업체들도 더 이상 “No claim”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그 조건을 삽입하는 대신 내가 그 가격을 일반강관 수준으로 후려 쳐서 엄청난 이득을 남긴 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 과감한 결정은 매번 회사에 엄청난 이득을 가져왔기에 나중에 알고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아니, 큰 사업 치고 위험부담 없는 사업이 어디 있어? 그거 겁내다 맨날 막차나 타지." 겁대가리 없던 쫄짜가 했던 말이다.
그 결과, 당시 석유파동으로 황금시장을 이루었던 미 걸프 해안지역의 송유관 시장을 한국 최초로 공략하여 1억불 상당을 수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강관업체였던 부산파이프는 송유관에 관한 한 삼성에 독점권을 허락했고, 이를 본 한국강관도 말은 안 해도 실질적인 독점권을 주었다. 입사 3년차에는 내가 혼자 미국시장에 수출했던 실적이 한국전체 강관 미국수출의 절반을 훌쩍 윗돌았고, 특히 서부지역을 제외한 지역만 계산하면 압도적으로 시장 자체를 지배했다. 참고로, 당시 한국의 대미 강관총수출은 2억불 상당이었다. 그래, 초기에는 마지 못해서 내 일을 도왔던 지점들도 내 말이라면 재깍 움직이게 되었다.
한 마디로 내 출장은 대성공이었던 것이다. 김진태 파동 이후로 삼성물산에서도 사원출장의 문호가 트였다.
“쫄짜도 보내니 해오는구나, 출장은 꼭 높은 사람이 가야 하는게 아니구나.”
뭐 이런 의식이 회사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승승장구한 결과, 나 혼자 시작했던 강관은 1년 후 별도 부서로 독립하여 강관선재과가 되었고, 그게 후에 강관부로 승격했다. 과로 승격했을 때, 내가 처음 받은 직원은 경기고 65회 서울상대 출신 K 씨로 삼성비서실 감사팀의 핵심인재였는데 나보다 한참 고참이었지만 내 조수로 받아서 교육해서 중동 담당을 하게 했다. 이 양반 내가 뉴욕 지점 사임한 후 내 후임으로 부임해서 나와 좋은 인연을 이어 갔다. 그래 나는 항상 고참을 조수로 받고, 과장, 부장을 받아서 부리는 위세를 누리다가 입사한지 4년도 안 된 1981년 4월 내가 개척했던 미국시장에 주재원으로 부임했다.
누구도 원치 않았던 “개”같은 품목 받아 “황금알을 낳는 오리”로 탈바꿈시켰던 이야기이다. 이것도 신데렐라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뜻을 세우고, 갈 길을 걸어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을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가라.”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울 형님과 함께 지내던 방 벽에 걸렸던 형님이 세계지도를 하나 붙여놓았는데, 그 지도 밑에 쓰였던 말이다. 나는 그걸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위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원래 모두 실명으로 기록하였으나, 그 분들의 신상정보임을 감안하여 이미 세상을 버리신 분을 제외하고는 약자로 대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