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울 아부지와 대화를 나눈 기억은 별로 없어요. 옛날 부자간에는 원래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나, 아부지와의 추억은 꽤 여러 가지가 있어요. 어릴 때 새벽마다 동네 주막에 가서 해장술 받아 오기, 아부지와 함께 약숫골 선산에 가서 고조, 증조 할배들에게 참배하러 갔다가 그 옆 개울에서 함께 등목을 감았던 일, 아부지 따라 외처 거래처 갔다가 주막집에 들어 생전 처음으로 장터국수를 먹던 추억.... 오늘은 약수물과 관련해서 울 아부지와의 추억을 더듬어 보려 해요. 제가 출생해서 살던 속꾸모티를 떠나 모암동으로 이사 온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해요. 모암동 우리 집에서 걸어서 한 30분 걸어가면 거기는 온통 논과 밭이었는데, 그 중 한 논에 작은 둠붕이 있었어요. 제가 가끔 피부병이 생기면 아버지께서 저를 거기 데리고 가셔서 홀랑 벗고 씻게 하셨어요. 처음 씻었을 때는 늦가을이라 물을 끼엊는데 오싹오싹했어요. 근데 그 물이 약수에요. 희한한 것이 거기서 한번만 씻어도 피부가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제 생각에는 그 둠붕이 냉천이라 피부병에는 즉효약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집 식구 가운데 이 둠붕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오래 전 돌아가신 울 아부지도 이 둠붕의 신세를 여러 번 지셨어요. 이 얘기를 이해하시려면 제 몸에 대해 먼저 아셔야 해요. 저는 겉보기는 멀쩡해도 어릴 때부터 고장 안 난 곳이 없을 정도로 약골이에 병골이었어요. 설상가상으로, 대학입시에서 낙방한 후 객지에서 무일푼으로 혼자 독서실을 전전하며 재수를 하며 위를 아주 망쳤어요. 근데 그게 대학을 다니면서 낫기는 커녕 고학의 어려움 가운데 악화되어 2학년 1학기 후 휴학하고 낙향했습니다. 당시 저는 위가 전혀 작동을 않아서 거의 아무 것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는데, 그게 통 호전되지를 않고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인생 이 따위로 고생하며 살면 뭐하노"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워서 스스로 삶을 끝낼 생각까지 했더랬습니다. 당시에야 무신론자였으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덜 고생하고 삶을 끝낼까 하여 한번은 금오산 꼭대기를 폭우 속에 혼자 올라갔던 적도 있습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한밤중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막상 절벽앞에 서니 그거 떨어지면 꽤 아플 것 같더라구요. 그래, 다시 집에 와서 이번에는 농약을 먹으려고 생각했어요. 근데 막상 죽을 생각을 하니 내야 이렇게 가면 그만이지만 남은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어떻게 되실지 걱정이 확 밀려 오더군요. 그래, 그 순간 우짜든지 살기로 결심하고 넘어가지 않는 암죽부터 시작해서 한 숟가락씩 먹고 100번 이상 씹으면서 내 스스로에게 "넘어간다 넘어간다"라고 계속 암시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내 꼬라지를 보신 울 아부지께서 아들 살리겠다고 그 둠붕 근처 옻나무밭에서 옻나무를 쪄다가 그걸 마당에다 가마솥 걸어놓고 닭고기 조금 넣고는 펄펄 끓여서 제가 다 먹게 하셨지요. 옻닭을 먹으면 위가 튼튼해 진다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들으셨던 것이지요. 물도 제대로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던 때였는데 그 역겨운 것을 하루에 세 사발씩 그해 여름 내내 먹었어요. 문제는 정작 먹은 저는 옻에 면역이 되어서 그러한지 괜찮았는데 울 아부지는 옻을 쪄오실 때마다 온 몸에 옻이 올라 고생하셨어요. 아들 살리시겠다고 옻나무를 쪄 오시고, 그걸 불 앞에서 고으셨으니 옻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때마다 아부지께선 그 둠붕에 가셔서 씻고 오심 곧 나으셨어요. 오늘 약숫터 얘기를 나누다가 아부지 생각이 간절해서 이렇게 글로 남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