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38) 요시야를 보내고 - 2003년 ATS 교수시절
지난 5월 31일은 여러 가지로 나의 인생에 큰 이정표가 되는 날이었다. 바로 작년 9월부터 우리와 함께 거하던 딸네 가정이 시카고로 완전히 떠났던 날이다. 딸의 첫째 아들 요시야가 우리 가정에 옴으로 인해 많은 사연이 있었다. 이미 지면에서 독자 여러분에게 알려드린 대로 요시야가 눈에 암이 있다는 의사의 진단으로 온 가정이 한바탕 큰 풍파에 휩쓸렸다가 오진으로 밝혀져 한숨을 덜었던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요시야가 옴으로 인해 일어났던 일 가운데 나와 직접 관련이 있는 건을 독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한다.
나는 지난 94년부터 오랫 동안 끌어오던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느라 초읽기를 하던 급박한 상황이었던지라, 가뜩이면 풀 타임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며 논문을 집필한다는 것이 과중한 부담이었는데, 하나님이 이 급한 형편에 왜 딸네까지 이 좁은 아파트에 보내셔서 짐을 더해 주시는가 의아했다.
형편을 잘 아는 친구인 부총장은 그 좁은 아파트에서 두 가정이 동거하며 어떻게 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사실 학위논문의 집필은 온 영혼과 마음과 육신을 집중해야만 가능한 피를 말리는 작업인지라, 밤낮으로 울어 대고 돌봐야 하는 아기와 함께 지내며 집필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워낙이 좁은 맨하탄의 아파트라 거실에다 책상을 놓고 집필하던 나는 의자에서 몸을 돌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공간이 부족했고, 방을 제 누나 부부에게 양보한 아들은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고 생활을 해야 했으니 그 스트레스가 오죽했겠는가?
더욱이나 딸도 사위도 아들도 아직 공부를 마치지 않은 상황이었고 우리 처도 학교에서 도서관 사서로 주 5일을 근무하는 몸이었다. 그러하니 갓난 아기 뒤치닥거리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인 나의 몫이 되었다. 논문집필 때문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만사 젖혀놓고 아파트에서 책상 앞에 붙어있던 나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지금까지 나의 삶에 항상 선하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뜻이 계셔서 요시야를 돌보게 하셨고 나의 학위논문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훌륭하게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결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나는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논문제출 최종시한인 금년 1월 15일까지 논문을 제출할 수 있었고 지난 5월 29일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졸업식에서 학위수여를 받았다.
우리는 어려운 여건에 부딪칠 때마다 왜냐고 하나님께 항의할 때가 많다. 그러나 신실한 하나님이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 여하에 따라 이 어려움을 축복의 계기로 삼게 하신다는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다. 나는 논문집필 과정의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요시야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대함으로 씻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격무 가운데서도 쉼을 얻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논문을 끝낼 수 있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면 창조적인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요시야는 수시로 나의 품에 안길 때마다 나에게 생산적인 집필을 할 수 있는 청량제 역할을 감당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