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교회사역을 하다 보니 상담을 원하는 분들을 많이 만난다. 상담을 원하는 분들의 상당수가 인간관계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가 무분별한 인간관계로 인한 소위 관계바이러스에 노출된 사람들이다. 자신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약자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약점을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들과 사귐으로서 만회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약자들은 강자들에게 쉽게 이용 당하고 혹사당한다.
그런가 하면 나름대로 도덕관이 있는 성도들도 이 관계바이러스에 감염된다. 누가 와서 “나를 좀 도와 주세요”하고 사정하면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대부분 거절하지 못한다. 무분별한 착한 성도들의 이 약점을 아는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항상 노리고 다가온다. 어떤 경우는 전도에 몰입된 성도의 약점을 이용하여 다가와 교회에 나가주며 기회있을 때마다 이 핑게 저 핑게로 도움을 청한다. 교회에 만만한 성도들을 모두 벗겨 먹고 난 후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지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들이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분수에 넘치게 베푸는 사람들은 내면으로 상처입고 서서히 병들어 간다. 급기야는 이유도 없이 무슨 일에나 부정적이고 걸핏하면 아무한테나 화를 낸다. 그리고는 다시는 상처를 입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관계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분별력있는 인간관계를 가지면 된다. 그러면 분별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흔히들 사람은 사리분별을 해야할줄 알아야한다고 한다. 사리분별이란 한자 뜻 그대로 세상사의 이치를 분별할줄 알아야 한다는것이다. 분별력은 결국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꼭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과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왕왕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은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지나간 나의 삶을 통해 느낀 것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자신의 한계를 알라. 인간관계에도 급수가 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되, 모든 사람과 동일한 수준의 인간관계를가지겠다는 착각은 버려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급수가 있었다. 예수님을 둘러싼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가운데 열두명을 택해 제자로 삼았고 그 가운데서도 베드로, 야곱, 요한 세 사람을 택하여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먼저, 당신을 포용하고 당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소수의 사람으로 당신 주변을 둘러싸겠다고 결심하라.
둘째, 우선순위를 알라. 가장 소중한것은 나 자신이고 그다음이 가족이며 그 다음이 친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위대한 사역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가족마저도 사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이 많고 또한 이를 자랑스럽게 고백하고는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정을 불행하게 하면서 하는 사역은 결단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이 아니며 인간관계가 아니다.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 가운데 바로 남편이나 아내 이외의 이성과의 우정으로 인한 것들이 많다.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타락이 얼마나 교회를 침륜에 빠뜨렸는지 우리는 가까운 예를 보아서 안다.
셋째, 구걸하지 말라. 건강한 인간관계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이다. 어떤 친구는 꼭 자기가 자랑할 일이 있을 때에만 전화를 한다. 특히 내가 같은 일로 속상한 일이 있을 때를 골라서 전화를 해서 내 속을 북북 긁어 놓는다. 이런 식으로 나의 자긍심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자긍심만 만족시키려 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겸손하게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되 나의 자존감조차 버리는 비굴한 인간관계는 가지지 말아야 한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얼굴을 세우려고 나를 희생양으로 삼는 사람, 말만 나오면 자기가 잘나서 절대로 지지 않고 나를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항상 나의 장점은 무시하고 단점을 꼬집고 지적하고 비웃는 사람,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다. 이런 행태를 받아 주면 결국 나의 감정이 상하고 나의 자존감도 상처입는다.
넷째, 짝사랑하는 관계는 삼가하라. 성경은 모든 사람을 대하여 선을 추구하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진실된 마음으로 진심을 주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상대가 그것을 모르거나 외면한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을때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건강한 거리 (healthy distance)를 두라. 아무리 친구일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그 한계를 분명히 긋고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내 개인의 privacy와 자유와 인격과 도덕률을 침해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친구니까 어디든 함께 해야 된다는 착각된 때문에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함께 하는 것, 나의 분수에 넘치는 도움을 주는 것 이런 것들은 병든 관계로 발전하는 지름길이다. 유착 (Collusion)과 우정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 자신의 한계를 알고 선별적인 인간관계를 가지며, 인간관계의 우선순위를 똑 바로 인식하고 인간관계를 정립하며, 구걸하지 않는 대등하게 서로 존중하는 인간관계를 가지고 항상 유착이 아니라 건강한 거리를 두고 인간관계를 유지함으로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빈다.
이상,
그런가 하면 나름대로 도덕관이 있는 성도들도 이 관계바이러스에 감염된다. 누가 와서 “나를 좀 도와 주세요”하고 사정하면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대부분 거절하지 못한다. 무분별한 착한 성도들의 이 약점을 아는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항상 노리고 다가온다. 어떤 경우는 전도에 몰입된 성도의 약점을 이용하여 다가와 교회에 나가주며 기회있을 때마다 이 핑게 저 핑게로 도움을 청한다. 교회에 만만한 성도들을 모두 벗겨 먹고 난 후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지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들이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분수에 넘치게 베푸는 사람들은 내면으로 상처입고 서서히 병들어 간다. 급기야는 이유도 없이 무슨 일에나 부정적이고 걸핏하면 아무한테나 화를 낸다. 그리고는 다시는 상처를 입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관계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분별력있는 인간관계를 가지면 된다. 그러면 분별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흔히들 사람은 사리분별을 해야할줄 알아야한다고 한다. 사리분별이란 한자 뜻 그대로 세상사의 이치를 분별할줄 알아야 한다는것이다. 분별력은 결국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꼭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과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왕왕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은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지나간 나의 삶을 통해 느낀 것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자신의 한계를 알라. 인간관계에도 급수가 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되, 모든 사람과 동일한 수준의 인간관계를가지겠다는 착각은 버려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급수가 있었다. 예수님을 둘러싼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가운데 열두명을 택해 제자로 삼았고 그 가운데서도 베드로, 야곱, 요한 세 사람을 택하여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먼저, 당신을 포용하고 당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소수의 사람으로 당신 주변을 둘러싸겠다고 결심하라.
둘째, 우선순위를 알라. 가장 소중한것은 나 자신이고 그다음이 가족이며 그 다음이 친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위대한 사역자들 가운데는 자신의 가족마저도 사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이 많고 또한 이를 자랑스럽게 고백하고는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정을 불행하게 하면서 하는 사역은 결단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이 아니며 인간관계가 아니다.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 가운데 바로 남편이나 아내 이외의 이성과의 우정으로 인한 것들이 많다.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타락이 얼마나 교회를 침륜에 빠뜨렸는지 우리는 가까운 예를 보아서 안다.
셋째, 구걸하지 말라. 건강한 인간관계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이다. 어떤 친구는 꼭 자기가 자랑할 일이 있을 때에만 전화를 한다. 특히 내가 같은 일로 속상한 일이 있을 때를 골라서 전화를 해서 내 속을 북북 긁어 놓는다. 이런 식으로 나의 자긍심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자긍심만 만족시키려 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겸손하게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되 나의 자존감조차 버리는 비굴한 인간관계는 가지지 말아야 한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얼굴을 세우려고 나를 희생양으로 삼는 사람, 말만 나오면 자기가 잘나서 절대로 지지 않고 나를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항상 나의 장점은 무시하고 단점을 꼬집고 지적하고 비웃는 사람,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다. 이런 행태를 받아 주면 결국 나의 감정이 상하고 나의 자존감도 상처입는다.
넷째, 짝사랑하는 관계는 삼가하라. 성경은 모든 사람을 대하여 선을 추구하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진실된 마음으로 진심을 주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상대가 그것을 모르거나 외면한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을때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건강한 거리 (healthy distance)를 두라. 아무리 친구일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그 한계를 분명히 긋고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내 개인의 privacy와 자유와 인격과 도덕률을 침해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친구니까 어디든 함께 해야 된다는 착각된 때문에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함께 하는 것, 나의 분수에 넘치는 도움을 주는 것 이런 것들은 병든 관계로 발전하는 지름길이다. 유착 (Collusion)과 우정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 자신의 한계를 알고 선별적인 인간관계를 가지며, 인간관계의 우선순위를 똑 바로 인식하고 인간관계를 정립하며, 구걸하지 않는 대등하게 서로 존중하는 인간관계를 가지고 항상 유착이 아니라 건강한 거리를 두고 인간관계를 유지함으로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