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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4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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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비젼 형성기간

1873-1881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1 장

루이빌 사역

때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던 우리의 꿈도 하나님이 도우시기만 하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1873-1879년


시대적 배경

1865년 남북전쟁 (1861-65)이 끝났다고는 하나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처와 분노로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250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남과 북의 명분을 걸고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려갔던 내전, 참전자중 4분의 1이 귀향치 못하고 전쟁의 이슬로 스러져 갔던 뼈아픈 상처가 아직도 아물기는커녕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옥의 불길처럼 이글거리던 고통의 세월이었다.

내전에 패한 남부의 재건문제는 승리자인 북부의 가혹한 요구조건 때문에 암초에 부딪친다. 역사의 비극적인 교훈이 여기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쟁에 이기기는 쉬워도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극히 어렵다." 북부연합을 이끌었던 링컨대통령은 관대한 아량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남부전쟁직후 암살 당했고 권력의 진공상태에 나섰던 북부의 자칭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부에 보복해야 한다고 나섰던 것이다. 남부는 남부대로 분쟁속에 휘말려 들었다. 대다수의 남부는 남부군의 영웅 로버트 리 장군을 추종하였으나 일부는 쿠클락스 클랜의 창설자인 나단 포리스트를 따르기로 결정함으로 남부도 두 세력으로 갈라졌던 대결과 분쟁의 시대였다.

이러한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기독교계가 화해와 안정에 기여했어야만 했스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남, 북부군을 막론하고 10여만명의 젊은이들이 전투의 와중에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영적으로 깨어지는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터의 참혹한 현실가운데서 젊은이들이 기도의 눈물을 뿌리는 와중에서도 정작 교계의 지도자들은 서로 상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서로간에 불신과 증오의 불길을 부채질하기에 바빴던 한심한 시대였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이 닥칠 때마다 자문해 보는 말은 인간에게 소망이 있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인간의 분노를 초월하여 역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다. 첫째는, 남북전쟁직전 소수의 뉴욕의 사업가들이 시작한 "Noon Prayer 모임" (정오의 기도회)에서 시작된 "Laymen's Revival" (평신도의 부흥운동)은 활발히 진행되어 전쟁 중에도 무수한 교회에 영향을 끼쳤고 꺼져가던 신앙의 불꽃을 다시금 타오르게 하였다. 둘째는, 윌리엄 보드맨이 성결(Sanctification)을 주제로 1858년 저술한 "Higher Christian Life"이다. 이 책은 폭팔적인 수요에 힘입어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였다. 1875년만 해도 출판사 한군데서 6만부가 판매되었다고 하니 그 인기와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보드맨은 피어쌀 스미스부부와 함께 당시 성결운동을 미국과 영국에 일으키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한 중요한 인물이다. 보드맨의 책과 스미스부인이 1871년 저술한 "The Christian Secret of a Happy Life" 는 성결운동에 기폭제역할을 감당하였다. 이 두 권의 책이 미국과 영국의 당시 성결운동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보드맨과 스미스는 1873년 무디의 부흥운동직후 영국을 방문하고 영국의 성결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이때 시작되었던 성결을 주제로 한 모임이 후일 케직사경회로 발전한다.-역자주]

세 번째로 중요한 사건은 당시에는 무명의 인사였던 드와이트 무디와 (1837-99) 아이라 샌키 두사람이 1873년 영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사건이다. 1873년 그 해가 저물기도 전에 무디와 샌키 팀이 시작한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 전역을 뜨거운 불길로 덮어버렸다. 2년동안의 영국체류기간동안 무디와 샌키 팀은 3백만이상의 사람들에게 복음과 찬양으로 은혜를 전파하였다. 2년 후 귀국하자 두 사람은 미국인들에게 영웅대우를 받았고 그들이 즉시 시작한 대형전도집회는 19세기후반 미국 기독교계를 부흥의 불기로 휩쓸게 된다.

이 부흥운동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첫째는 일개 교회가 아닌 대규모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형전도집회이며, 둘째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성결운동이다. 이 두 가지 부흥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남부전쟁의 영적폐허를 재건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젊은 캐나다출신 목사 한 분이 국경을 넘어 남부 캔터키주 소재 교회로 향한다. 이 때만 해도 자신이 미국을 휩쓸 영적 대각성운동에 얼마나 큰 역할을 감당할 인물이 될지 이 젊은 목사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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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늦은 겨울 새 사역지를 향해 미국 남부향 기차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젊은 캐나다출신 목사 심슨의 눈에는 모든 것이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여러 모로 보아 심슨은 승리자의 면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심슨의 걸음걸이는 당당하나 품위를 잃지 않았고 파리하나 강인한 인상과 사려깊은 눈매는 나이에 비해 성숙함을 풍기어서 누구나 보기만 해도 신뢰감을 가질만한 면모의 소유자였다.

면모에서 드러나는 성품은 심슨의 삶속에서도 입증되었다. 약관 30세에 심슨목사는 고향인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이미 성공적인 목회경력을 가졌다.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은 선지자가 드문데 심슨은 이 면에서도 전례를 깨뜨린 것이다.

그는 1865년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온타리오 주 헤밀턴시의 녹스교회에 원목으로 초빙을 받고 부임하였다. 당시 녹스교회는 캐나다에서 장로교회로는 두 번째로 큰 건물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교회는 침체하여 성전의 4분의 1만 채우던 교회였다. 그러나 8 년반동안의 녹스교회의 사역을 뒤로 하고 심슨이 두 번째 사역지를 향해 캔터키주 루이빌시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 가졌던 고별예배에는 성전이 비좁아 500명의 성도들이 입당을 못할 정도로 녹스교회가 성장해 있었다. 심슨의 녹스교회 사역을 대변하는 자료가 있다. 첫째, 숫적성장이다. 심슨 재임중 750명의 교인이 증가하였다. 둘째, 심슨의 능력에 대한 현지 신문의 평가이다. "탁월한 설교능력, 다양한 재능, 성공적인 목회 이 세 가지 분야에서 심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슨의 성공적인 목회에 다른 하나의 큰 자산이 있다. 루이빌향 기차에 함께 몸을 실은 매력적인 사모 마가렛 여사와 세 자녀이다. 1미터 50센티의 작은 키지만 생기가 넘치는 마가렛은 심슨의 헤밀턴 사역에 사모로서 적극 내조하였고 심슨이 루이빌로 사역지를 옮기는 결정에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두 아들, 알버트 헨리와 제임스 고든 헤밀턴, 이제 돌이 갓 지난 마벨 제인의 재롱으로 루이빌로 가는 긴 여로도 그들에게는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헤밀턴목회의 성공으로 자신에 넘친 심슨에게 1873년 12월 루이빌에서의 목회의 전망은 그저 희망적이기만 했다.

루이빌의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에서 심슨을 초빙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다. 루이빌에 부임하기 두 달전 심슨목사가 뉴욕에서 열린 모임에 참여하러 왔다가 뉴욕소재 한 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 그 때 마침 동일한 목적으로 뉴욕을 방문했던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의 교인 몇 분이 심슨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루이빌로 돌아가자 마자 당시 공석이던 원목자리에 심슨목사를 초빙하도록 강력히 건의했다.

이들의 건의에 따라 당회에서 조사한 결과 심슨이 뛰어난 설교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목회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심슨을 선호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심슨은 미국인이 아니고 캐나다인이기 때문에 당시 북부 장로교단에 소속되었던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와 루이빌에 있는 다른 교회와의 갈등을 무마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루이빌은 최근 끝난 남북전쟁의 여파로 갈등과 반목이 상존한 도시였다.

심슨목사를 청빙하려던 교회가 루이빌의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만은 아니었다. 1873년 12월 3일 헤밀턴 교회의 당회에는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외에도 심슨목사을 청빙하는 교회의 청빙서가 제출되었스나, 심슨목사는 캐나다 소재의 교회를 택하지 않고 미국 루이빌 소재의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를 택했던 것이다. 헤밀턴 교회의 당회는 마지 못해 심슨의 이임을 승인하였다.

역사의 아이로니이다. 심슨목사가 선택을 하기 전에 루이빌을 방문하고 그 곳이 얼마나 분쟁으로 가득찬 골치아픈 곳인지 알았더라면 어떻게 하였슬까? 아마도 심슨은 자신의 거취에 대해 재고하였슬 것이며 어쩌면 루이빌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슨의 인생에 펼쳐지는 사건들을 고려해 보면 심슨의 선택은 지극히 옳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숨겨진 문제들

제반 요소들을 고려할 때 심슨목사의 루이빌 사역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헤밀턴시절보다 더 큰 사역도 가능해 보였고 루이빌로 그를 초빙했던 성도들도 심슨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심슨 본인은 남모르는 문제들을 부여안고 고통 당하고 있었스며 때로는 이것들이 너무 커서 심슨과 그의 사역에 암운을 드리웠던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심슨의 건강문제였다. 사실 심슨이 루이빌을 택한 이유는 악화된 건강 때문에 사역의 짐이 덜 무겁고 휴식할 시간이 많은 작은 목장을 택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역지를 바꾸면 과거 자료들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설교준비를 항상 새롭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슨의 건강을 고려해서 루이빌 회중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교인심방을 않아도 되도록 허용하였고 매년 2개월 동안의 하기휴가를 허용하였다. 거기에다 헤밀턴 사역때보다 2배에 달하는 5000불의 년봉을 제시함으로 심슨의 건강과 가족들에게 여러모로 호조건을 제시했던 것이다.

심슨의 건강문제는 사역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심슨은 과도한 학과공부 때문에 건강을 해쳤고 급기야는 의사가 1년동안은 절대로 책을 읽지 말도록 지시하기까지 이르렀다. 거기에다 녹스 교회시절 심슨은 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은 결과 몇 번이나 졸도직전에 이르러서 두 번이나 장기간 휴가를 가지도록 교회에서 요구할 정도였다. 문제는 타고 난 열정이 너무나 강렬하여서 자신의 열정대로 육신이 따르지 못할 때마다 심각한 좌절감과 절망의 수렁에 몸부림치곤 했던 것이다.

둘째는 내적인 갈등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심슨 스스로가 가졌던 자화상의 문제이다. 심슨은 스스로를 "실속없이 덤벙거리만 하고 야심만 큰 젊은 설교가"라고 단정하였고 자신의 영적생활을 묘사하기를 "열정과 강한 자기중심적 의지와 유혹과의 승산없는 긴 투쟁"이라고 했다. 이러한 영적 패배감은 심슨을 끊임없는 좌절로 몰고 갔고 자신의 영적현실과는 괴리된 설교를 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패배의식을 가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훗날 루이빌 시절을 회상하며 심슨목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 말을 할 때마다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제 심령 속에 내주하는 성령님으로 알지 못하던 시절에는 말이지요. 설교후에 교인이 찿아와서 '목사님, 진정한 성결의 삶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기껏 찾아오시는 분들은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죄사함에 관해서는 그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심슨의 영적인 좌절감은 그로 하여금 보다 영적이고 만족스러운 영적 삶을 추구하도록 항상 몰고 갔다. 문제는 심슨이 성결이 무엇인가에 대해 오해를 했던 데서도 기인한다. 그렇게 지적이고 고등교육으로 훈련받은 심슨이었지만 성화와 영화를 혼동하여서 성화가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마지막으로 역사하는 것으로 일단 성화가 되면 즉시 하늘나라로 불려 가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슨은 성화후 금방 죽을까보아 하나님께 성화에 대해 기도하기를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심슨은 그 후 성화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거룩케 되는 긍정적인 체험임을 인정하였으나 그 후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성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한번은 심슨은 자신의 영에 무엇인가 예사롭지 못한 느낌이 오자 이 상태를 잃어버릴까보아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이 느낌을 붙잡고 늘어지려 했던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영적 상태는 금방 사라져 버렸고 심슨은 이보다 나은 무엇인가를 자신의 영적 삶에서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심슨의 이러한 내적 갈등은 헤밀턴 사역시절 내내 계속되었고 이러한 영적 짐을 끌어안고 루이빌로 왔던 것이다.

심슨이 루이빌에 도착해서 부딪친 상황은 그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뿐이었다. 남국전쟁이 끝난 지 8년이 지났지만 입술로 주고 받는 치열한 포화는 상존하였고 교회들도 덩달아 남북으로 갈라져서 암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어떤 목사들은 10년 동안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고 하니 그 상처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만하다. 더 한심한 것은 국가적으로는 전쟁의 상처에서 정상으로 회복되고 있었지만 교회들은 아직도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단지 북부와 남부라는 것 차이 때문에 메이슨-딕슨 라인 [남부의 흑백분리지역과 북부의 흑백비분리지역을 가르는 당시 선-역자주] 근교에 위치한 도시들마다 교회간의 반목은 극에 달했다. 간간히 이를 타개하려는 부흥운동도 항상 된서리를 맞곤 했다. 루이빌은 남부에 속한 북부 도시라고 볼 수도 있고 북부에 속한 남부 도시라고 볼 수도 있는 경계지역의 도시였기 때문에 교회들간의 반목의 불길이 특히 심했던 것이다."

새로운 비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심슨의 목회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고 이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를 원하신다. 심슨도 어쩔수 없는 상황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성결과 성령세례의 체험을 한 것이다.

당시 심슨의 상황은 안팎으로 문제투성이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자신의 내면적 갈등과 당장 사역지에 상존한 갈등 두 가지 문제사이에서 심슨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자신이 처한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안팎으로 밀려드는 이 두 가지 어쩔 수 없는 갈등을 놓고 심슨은 모든 해결의 근원이신 하나님, 온 맘을 다하여 찾으면 찾으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심슨에게 다가온 한 권의 책이 있다. 바로 윌리암 보드맨이 1858년에 쓴 "The Higher Christian Life"이다. 1874년 어느 날 서재에서 이 낡은 책을 발견하고 심슨은 이 책에 몰입한다. 이로 인해 심슨은 주 예수님을 살아 역사하시고 모든 것에 충분하신 존재로 발견한다. 후일 심슨은 증언한다. "우리를 의롭다하신 주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영안에 들어오셔서 주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기쁨과 사랑과 믿음과 능력으로 우리의 형편없고 한심한 모습을 대신케 하셔서 우리가 삶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것으로 친히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심슨은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엎드려 주님의 약속을 자기 것으로 주장한다.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고후 6:16). 바로 이 순간 인격체이신 예수님께서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친히 임하셨던 만큼이나 생생하게 친히 심슨의 영에 임하셨다. 바로 이 순간부터 이 새로운 체험은 심슨의 삶에 사람을 끄는 매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그 후 40 여년의 사역을 통해 심슨은 자신의 사역의 비결을 모두 예수님만이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성결의 주로 인정하고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 순간으로 돌린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순간과 마찬가지로 심슨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후일 심슨은 이렇게 말한다. "감히 말하지만 모든 믿는 자가 다 성령을 인격적으로 환영하고 자신의 심령속에 다스리는 이로 영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이 체험을 하기 전에는 믿는 자가 아니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설교자로 복음을 전한지 10 년이 지난 후에야, 성령의 내주하심을 인격적인 하나님의 임재로서, 나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육신과 생각과 사역에서 살아 역사하도록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또한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은 내가 그 분께 나의 심령의 집을 자발적으로 내어 드리고 나는 더 이상 주인이 아니고 잠시 대여하고 있는 존재일 따름이며, 성령님이 친히 주인으로서 나를 관리하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야, 이러한 임재로서 내 심령의 집에 주인으로 임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성결의 체험이 심슨으로 하여금 영적 발전에 대한 추구를 중단시키지는 않았다. 심슨에게 있어 성결의 체험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심슨은 계속 주장한다. "성결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지, 인간이 스스로 개선하거나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결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과 완전하신 성품을 믿는 자에게 불어넣어 주셔서,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심슨은 이러한 이유로 인해 성결은 하나님의 임재가 들어오는 순간 완성이며 완전이나 우리의 삶을 통해 계속 완성되어야 하고 완전해져야 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심슨에게는 성결이란 순간적인 성취가 아니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심령의 태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의 주시오 완성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앞에 분별된 심령이 취할 태도는 항상 주님께 내어드리는 포기의 역사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태도라야 한다. 우리의 영적성장에는 끊임없는 전진만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단계적 성화가 있는 것이다."

심슨의 성화에 대한 태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 있다.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성결체험 직후, 심슨은 부흥사 무디가 주최한 목사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에 참석하려 시카고를 방문한 적이 있다. 심슨이 집회에 참석하였더니 아직 무디가 말씀을 전할 본예배는 시작되지 않았고 예비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마침 한 사람의 평범해 보이는 설교자가 온통 얼굴 가득히 희색을 띄고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저는 무디선생의 도움을 받으려고 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밤 저는 예수님을 친히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받는 순간 제 마음속에 떠오른 확신이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사는 동안 예수외에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을 것같은 확신이 들더라구요." 이 간증을 듣는 순간 무엇인가 심슨의 심령을 강타하였다고 심슨은 회상한다. "예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다. 예수께만 의지하면 된다." 심슨은 더 이상 무디의 말씀이 있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주저없시 루이빌향 기차에 몸을 실었고, 돌아가는 즉시 교회 사무실로 직행했다. "저는 주님 발앞에 무릎꿇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제 입술에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노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보았네, 내 마음에 다른 어떤 것도 없네;
예수를 보았네,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네;
예수를 보았네, 내 심령이 만족하다네,
예수만으로 만족하다네."

폭풍전야의 루이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종에게 두 가지 큰 은혜를 베푸신 데는 목적이 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빛과 성령세례를 허락하신 사건은 즉시 루이빌 전체에 엄청난 충격으로 역사하되 심슨이 과거 사역에서 체험했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의 새 빛은 심슨의 골수안에 불길처럼 타올라 모두가 잠든 밤 기도하게 만든다. 바로 남북전쟁의 상처로 찢어지고 갈라진 루이빌에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가져오도록 몸부림쳐 기도하게 한다.

심슨의 역할은 기도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중보기도하게 하시고 중보기도자를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루이빌 소재의 많은 교회들을 순회하며 말씀을 전할 기회가 심슨에게 주어진 것이다. 캐나다인이라는 배경이 교회들로 하여금 거리낌없는 강단을 제공하도록 만들엇던 것이다. 심슨의 메시지는 시종여일하였다. "성령의 임하심을 위해 기도하라." 무엇보다 먼저 목사들이 화해하고 교인들에게 성령의 부흥의 불길이 임하여야 루이빌의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심슨의 활동은 강단을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심슨목사는 루이빌 지역의 동료목사님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여 함께 기도하고 부흥집회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다. 당시 유명했던 부흥사 휫틀과 찬양사역자 필립 블리스의 이름을 거명한 것도 아마 심슨이었을 것이다. 이 일에 심슨은 전도 팀과 지역교회사이에서 다리역할을 감당하였다.

다음 단계는 부흥을 위한 연합집회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1875년 1월의 첫 주간 첫 번째 연합집회가 있었다. 아마도 이 집회의 배후에는 "Evangelical Alliance" (복음주의 연합)의 호소가 주효했는지도 모른다. "Evangelical Alliance"는 런던에 본부를 둔 단체로 이미 여러 해동안 전 세계기독교인들이 새해 첫주를 기도회에 바칠 것을 권면해 왔다. 루이빌시 목사들은 당시 가장 큰 성전을 가진 월넛 스트리트 침례교회를 연합기도집회의 장소로 선정함으로 이 집회에 대한 저들의 믿음의 정도를 보여주었다. 정작 집회를 시작하니 아침, 저녁집회마다 성도들의 숫자가 넘쳐서 주일 오후에 대규모집회를 추가하도록 결정해야 했다.

왕왕 체험하듯 성령님은 이미 성도들의 한사람 한사람의 심령속에 역사하셔서 화해와 부흥을 준비시키셨던 것을 발견한다. 성도들은 사실은 지도자들이 깨어 일어나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성공적인 첫 주 집회는 1월 마지막 주간 두 번째 연합기도회로 이어졌고 성도들의 적극적인 호응 때문에 급기야는 무한정 계속되어 1년이란 기간이 경과하고서야 집회가 끝났다.

크나큰 기대

막상 부흥집회가 개최될 예정이던 1875년 2월 7일 주일저녁이 오기도 전에 이미 부흥은 각 교회들을 휩쓸었고 루이빌 전 도시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었다. 마침 휫틀과 블리스 두분이 집회시간에 대어 도착하지 못함으로 인해 루이빌 지역의 목사들이 번갈아 공용 도서관의 강당겸 전시회장에 가득찬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증거하였고 심슨목사도 순서를 맡아야 했다. 집회기간 내내 문제는 이 많은 군중을 수용할 공간확보였다. 시내의 공공시설이란 시설은 다 세를 내어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쏟아지는 폭우도, 진눈개비도, 폭설도 열광적인 군중들을 막지 못했다. 부흥집회 때문에 손해본 사업도 있었다. 특히 술집이나 오락시설등은 손님격감으로 고전했다. 시내 사업가들은 휫틀을 사업장으로 초빙해서 의견을 물었고 기차마다 외부에서 루이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소문을 듣고 보러오는 방문객들과 성령의 체험을 갈구하는 성도들로 붐비었다.

루이빌 지역신문에 부흥집회에 대해 난 기사이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회중들의 모임... 수백명이 자리가 없서 서서 집회에 참석하다.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출석인원.... 빈구석 하나없시 사용된 건물...." 다른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복음의 도도한 물길이 저항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터져 나와 수다한 지역으로 확산될 것이다."

부흥집회 셋째 주가 끝날 즈음, 휫틀은 부친의 임종 때문에 시카고로 돌아가게 되어 여러 목사님들이 휫틀을 대신하여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주일저녁 심슨목사는 성전을 메운 성도들에게 누가복음 14장 17절 "오라 모든 것이 준비되었느니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월요일 신문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심슨의 설교는 지금까지 집회기간 중 어느 설교보다 빼어난 설교였다. 이 설교는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다. 300내지 400명의 불신자가 말씀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인들에게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기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러한 놀라운 반응을 일으킨 설교는 루이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러한 놀라운 청중들의 반응은 심슨에게 아마도 참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심슨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사역범위를 자신이 시무하신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는데 제한시켜왔기 때문이었다. 심슨의 설교 후 다음주일인 3월 7일주일에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라면 교회이건 공공시설을 막론하고 가득 찼다. 아침에는 목사님들은 각자의 교회에서 성전을 가득 메운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오후에는 흑인형제들을 위한 집회가 "Globe's Rink"스케이트장에서 열렸고, 백인형제들 중 노무자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가 "Liederkranz Hall"연주장에서 열렸다. 공공도서관의 강당에서 열린 젊은이들용 집회에는 젊은이들에게만 표를 발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령층을 불문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Macauley 극장의 집회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

3월 12일 금요일 집회를 마지막으로 휫틀-블라스 두 부흥사의 집회는 일단 막을 내렸다. 기도회는 온종일 계속되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기도회에 만명이 참석하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종교적 열정분출." 부흥집회는 두 번의 대형집회로 절정을 이룬다. 저녁 6시반 집회는 원래 새 신자만 참석하게 되어있었으나 정작 7시반 두 번째 집회를 시작하려 문을 여니 "수천명의 군중이 앞다투어 밀려들어와 순식간에 자리를 메워버렸다. 3천명의 군중이 혼잡을 이루고 밀려들어왔고 또 3천명은 들어갈 수도 없었다."

휫틀의 설교직후 기립한 군중들은 "주 예수 이름 높이어"를 합창하였다. 블리스는 참석한 모든 목사님들에게 함께 손잡도록 권면했고 목사님들의 연합된 줄은 강단위를 가득히 메웠다. 바야흐로 루이빌의 성도들이 다시금 예수님의 십자가아래 하나로 연합하는 놀라운 화해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남은 불꽃

부흥집회는 끝났다. 그러나 일단 발동이 걸린 심슨은 이제 막 시작된 부흥운동을 급작스럽게 멈추려 하지 않았다. 부흥집회의 마지막날 저녁 심슨은 주일 저녁대중집회는 계속될 것임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는 이미 공공 도서관 강당을 전세놓았던 것이다. 심슨목사는 다른 교회도 심슨의 제안에 부응하여 함께 공동집회를 했스면 하는 바램을 가졌스나 다른 교회들은 각자대로 부흥을 이어가기로 결정하였다. 루이빌 지방신문은 심슨목사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집회를 계속하기로 한 것을 보도하면서 심슨의 진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고자 하는 소원은 널리 퍼졌스나 정규교회에 출석치 못하는 사람들"을 감안한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심슨의 마음속에 품었던 소원 즉 정규교회에서 외면받았지만 하나님에게서는 외면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무교회 대중들에 대한 관심이 이제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그 길이 아무도 따르지 않는 외로운 길일지라도 말이다.

신문은 후일 심슨이 가장 큰 강점으로 판명되는 일면에 대해 보도하였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심슨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의 목적이 교단이나 파당적인 것이 아니고 복음적이고 연합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또 좋았던 것은 모든 복음주의 목사와 교회들이 다 환영받는 집회였다는 것이다." 휫틀-블리스 부흥집회직후 일어난 사건 d으로 당시로는 사소한 것이었지만 심슨의 사역에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캔터키 렉싱턴시의 목사님들이 심슨목사에게 일련의 부흥집회를 인도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수년전 심슨목사가 녹스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에도 동료 장로교회 목사님이 심슨에게 비슷한 요청을 한 적이 있었지만 심슨목사는 단호히 거부했다: "저는 부흥사가 아니고 목회자임을 믿기 때문에 못합니다."

루이빌 부흥집회의 불꽃이 아직도 남아있는 시점이라 그러했던지 2개월여의 연속집회로 지칠대로 지친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즉시 렉싱턴시 목사님들에 초청에 응하였고, 심지어는 이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교회의 평일 야간집회까지 취소하기까지 했다. 바야흐로 심슨은 목회자로서뿐 아니라 부흥사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훗날 심슨은 부흥사로서 큰 일을 감당하게 된다.

렉싱턴에서 돌아오자 마자, 심슨목사는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에서 열린 평일 야간집회와 주일 도서관 강당에서 가진 야간집회를 통해 전도활동에 계속 박차를 가하였다. 집회마다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고 수백명씩 그리스도 앞에 믿음을 고백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흑인형제들도 주일 저녁 집회에 몰려들었다. 심슨은 이 일로 더욱 기뻤을 것이다. 휫틀-블리스 집회동안 심슨은 가난한 이들이 교회에 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격에 어울리는 옷가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공식적인 항의를 제기하였고 성전의 좌석들은 빈부, 흑백, 교육여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야 한다고 탄원하였다. [왜냐면 당시에는 좌석마다 매년 좌석에 상응한 자릿세를 헌금으로 내는 주인이 있어 자릿세를 낼 여유가 없는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 들어와 앉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역자주]. 이제 자신이 인도하는 집회인지라 심슨은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올 수 있도록 확인까지 하였던 것이다. 심슨의 마음속에는 이미 기존교회에서 소외된 무교회 교인들이 먼저 환영받는 교회에 대한 패턴이 정립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1875년 6월 도서관 강당에서 개최되던 15주간의 주일 저녁집회를 끝낸 후 심슨은 자신의 교회에서만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였고 1개월후에는 심슨가족 전원이 6주간의 휴가를 떠났다. 7개월 동안의 힘든 연속집회로 심신이 완전히 메말라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주야로 심슨을 가정에서 빼앗아 갔던 집회에 지칠 대로 지친 가족들도 이 휴식을 반갑게 받아드렸을 것이다.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도 심슨이 떠난 기간동안 일종의 휴가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심슨이 없는 동안 주일아침에만 대리목사가 설교를 했슬 뿐이었스니 그동안의 집회의 강도와 빈도에 비해 휴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전신축과 갈등표출

6주간의 휴가는 여러 가지로 많은 손실을 가져온다. 부흥에 대한 열정도 식었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사건은 심슨목사와 성도들간의 성전신축과 관련한 의견대립이었다. 겉으로 보면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심슨목사가 휴가에서 돌아온 후에도 교회는 주일 저녁집회를 다시 시작하는데 동의하였다. 도서관 강당시설이 여의치 않아 장소만 마클리극장으로 옮겼슬 뿐이다.

문제는 신축성전을 어떤 모양으로 짓느냐에 대한 의견대립이었다. 심슨의 꿈은 누구가 들어올 수 있는 대형교회를 저렴한 비용으로 단기간에 신축하여 당장 공간이 없서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어려운 대중들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심슨이 휴가를 떠나기 전만 해도 교회는 이에 동의하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새 성전은 2500석으로 부흥집회동안 사용하던 도서관 강당과 비슷한 규모로 짓기로 하였다. 현재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의 성정은 650석밖에 되지 않아 그동안 급속도로 증가한 교인수를 감당할 수도 없었고 거기에다 앞으로도 계속될 전도집회를 통해 교인수는 더욱 증가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막상 휴가를 다녀오고 나니 교회의 지도자들과 심슨간에 의견충돌이 노골화된 것이다. 심슨은 후일 루이빌에서의 체험에 대해 회고하며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비록 온전히 헌신된 흡족한 사역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엄청난 영적 축복을 맛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소득은 성령세례의 체험을 통해 지금까지 제가 생각했던 교회사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역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바로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대형전도집회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틀에 박힌 장로교회에서 사역하며 이 열망을 실현시키려 무한히 애썼고 실제 어느 정도 성취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배타주의와 틀에 박힌 고루한 방법론에 묶여 옴치고 뛸 수도 없는 경우도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더 이상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에 연연할 때가 아님을 깨달은 심슨은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 시기가 마침 1875년 성전신축과 관련해서 왔을 뿐이다.

성전신축 프로젝트가 발표되자 1만 8천불의 헌금이 즉시 들어왔고 번화가에 있는 건물신축부지도 즉시 매입하게 되었다. 심슨목사는 이에 관련하여 세가지를 제안한다: (1) 건물은 단순하되 많은 인원을 수용하여야 하고; (2) 건축비는 6만 5천불내지 7만불경비로 제한하며; (3) 당장 교인증가를 감안하여 9개월이내에 입주 가능하도록 건축하자. 그러나 심슨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건축비는 10만 5천불규모로 늘리고 완공하는데 2년이상이 걸리는 화려하고 멋진 건축물로 짓고 건축물을 짓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더 넓은 곳을 향하여

심슨은 루이빌을 떠나 더 넓은 곳을 향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이에 계기가 된 사건이 있다. 1877년 뉴욕주 왓킨스 글렌에서 "Believers' Conference"가 개최되었는데 심슨목사도 육신적 영적 재충전을 위해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모임에서는 주로 두 가지 메시지가 논의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보다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나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강단에 서는 사람마다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강력히 설파하였던 것이다. 루이빌에서의 부흥집회이후 소외되었던 일반 대중들을 향한 전도의 열정으로 타 올랐던 심슨목사는 이 집회를 통해 그 소외되었던 일반 대중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곳곳에 있음을 인식하고 세계선교에 대한 책임감이 자신의 심령을 강타하는 것을 체험한다. 왓킨스 글렌의 모임을 떠나 심슨은 시카고에 들러서 친구들을 방문하였고 시간을 내어 이 문제에 대해 상고하고 기도하게 된다. 선교에 대한 메시지는 심슨의 자신의 과거의 추억까지 회상하게 만든다. 왜냐면 심슨은 선교와 출생부터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1843년 심슨은 태어나자 마자 캐나다 최초의 선교사로 South Sea Islands로 파송되어 가던 길에 방문한 죤 게디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로 헌신된 몸이었기 때문이다.

토저는 심슨의 삶의 패턴에 대해 말했다. "심슨은 자신의 마음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심령을 강타하는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마음속에 품은 뜻이 외부로 폭팔해 나가기까지는 심슨은 이를 내면에 간직하고 때로는 여러 해동안 이 아이디어에 대해 숙고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더미같은 업무속에 파뭏혀 경황을 찾기 어려울 때는 까맣게 잊고 지내기도 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도 일단 결정적인 계기가 닥치면 먼저 하나님앞에 기도한 후 엄청난 힘을 가지고 밀어 닥치는 아이디어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아이디어의 화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심슨의 시카고의 체험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심슨은 자신의 시카고에서 겪은 체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날 밤 저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신비롬고도 장엄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저를 완전히 뒤덮고 있음을 깨닫고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깨어난 것입니다. 금방 제가 꾸었던 기이한 꿈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제 영혼을 온통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거대한 강당같은 곳에 앉아 있었고 제 주위에는 수백만의 인파가 앉아 있었습니다. 온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다 모인 것 같았는데 강단위에는 엄청난 무리가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그 분들이 모두 중국사람같았습니다. [동양사람을 접하지 않았던 심슨이기에 동양사람은 모두 중국사람처럼 보였슬 것이다- 역자주]. 강단위의 무리들이 말없이 뻗어대는 손짓은 절망속 고뇌를 표현하는 소리없는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들의 얼굴표정의 참담함이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중국인이나 이방세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물론 언급도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꿈에서 깨어난 후 저는 제 안에 있는 성령님과 함께 몸부림치며 무릎꿇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주여, 제가 가겠습니다.' "

다음날 심슨은 아내 마가렛에게 편지를 쓴다. 아내여 이 놀라운 믿음의 새 역사에 동참하지 않겠는가? 마가렛의 답신은 심슨의 허를 찌른다. 마가렛여사의 말을 빌려 보자. "황당한 편지가 왔기에 저는 이렇게 답신했지요. 당신이 중국으로 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저는 집에 머물며 당신을 도우고 자녀들을 키울테니 떠나려거든 혼자 떠나시라. 이 답신받고 이 양반이 정신을 차리고 당분간은 엉뚱한 소리 안할 줄 알았기에 그렇게 답신했지요." 마가렛의 반응에 대해 아마 심슨은 이것이 단순히 자녀들의 양육과 남편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는 현실적인 아내의 말일 뿐 아니라 마가렛의 입술을 통해 섯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않도록 억제하는 주님의 음성임을 깨달았을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과감하게 답신한 마가렛도 대단하지만 아내의 말에 순종한 심슨도 과연 현명한 주의 사람이다. 심슨이 후일 북미에서 이룩한 선교사역의 엄청난 성취를 감안하면 심슨이 직접 중국오지에 선교사로 나가서 이루었슬 사역은 비교도 할 수 없게 작은 규모였슬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반대로 선교사로 나가지만 못했지만 그냥 앉아서 마음으로 선교를 해야 한다고 동의만 하고 있기에는 심슨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선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가? 심슨은 우선 유럽과 북미출신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조사한다. 당시 선교의 개척자로는 영국출신 데이빗 리빙스턴, 헛슨 테일러와 메리 스렛스, 미국출신 아도니람 졋슨, 캐나다출신 죠나단 고포스와 로살린더 고포스부부등을 들 수 있다. 바로 이들의 사역에 힘입어 1800년대는 "위대한 세계선교의 18세기"가 되었던 것이다. 캐나다인들이 헛슨 테일러와 아도니람 졋슨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의 개척자로 손꼽는 죤 게디는 바로 심슨출생직후 세례를 주고 심슨을 선교사로 헌신시킨 장본인이다.

당시만 해도 선교활동은 특정 선교단체나 개인이 서로 각개전투식으로 활동하였다. 서로간의 활동에 대해 정보교환수단이 없이 무지한 가운데 선교가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낭비가 있었다. 이에 착안하여 심슨은 전 세계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사역내용들을 수집해서 선교잡지를 만들되 사진과 삽화를 곁드린 잡지를 만들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제안한다. 그러나 심슨이 자문한 사람들은 모두 이런 잡지를 만들 가능성도 현실성도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심슨은 그렇다고 좌절하고 주저앉을 인물이 아니었다. 선교잡지 프로젝트는 심슨의 일생을 몰아 부치는 중요한 건이 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심슨의 삶에 끼친 영향은 심각하였다. 심슨의 미래 청사진에도 큰 부분을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항상 그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가뜩이나 연약했던 육신을 망가뜨린 주범이 되었다. 이러한 문젯점에도 불구하고 심슨의 선교잡지가 성취한 업적은 대단하였다. 예일대학의 선교학 교수 할란 비치박사는 후일 이렇게 평가했다. "심슨의 업적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심슨은 선교잡지를 만들되 사진과 삽화를 곁들인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므로 이 부분에 세계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우리를 박차고

다시 루이빌 성전건으로 화제를 돌리자. 1878년 6월 9일은 신축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린 날이다. 무려 3천명의 성도들이 루이빌의 브로드웨이 성전에 운집하여 성대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성전신축으로 인한 빚더미와 명분없는 신축이라는 짐이 심슨의 마음을 억눌렀다. 그래서 심슨은 헌당식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교회 빚이 청산되기 전에는 자신의 월급도 받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비록 교인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 저렴한 비용의 대중용 성전을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그들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단 신축된 성전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 지에 대해 첫 예배에서 분명히 하였다. 교회건물은 어떤 디자인으로 지어졌던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가지 이 존립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갈 곳없는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문제가 심슨과 성도들간에 불화를 가져오지는 않았고 우호적인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과거 휫틀-블리스 부흥집회와 그 후 교회주관으로 계속된 부흥집회 당시의 분위기는 이미 찾아볼수 없었다. 심슨목사는 이제 하나님께서 루이빌 사역에서 해방시키시는 손길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로부터 18개월후 우리를 박차고 자신의 꿈을 펼칠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믿음의 발길을 옮기게 된다.

루이빌사역의 의미: 새로운 방향정립

심슨의 삶에 있서 루이빌시절은 방향정립의 계기였다. 그의 메시지, 사역과 그가 시작한 무브먼트 어느 하나를 막론하고 루이빌 목회시절에 그 뿌리를 두지 않은 것이 없다. 루이빌에서 성령세례를 체험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고 남북전쟁의 상처로 찢어지고 갈라졌던 루이빌에 부흥과 화해의 불길을 지필 수 있었다. 이 부흥집회후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이 향후 심슨의 사역에 대한 태도와 세계안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해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네 가지로 이를 요약할 수 있겠다: (1) 자신의 소명의식의 변화이다. 목회자로 뿐 아니라 부흥사로 부름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2) 교회관의 변화이다. 기존 교단소속의 전통적 교회관뿐 아니라 초교단, 초교파교회관을 가지게 되었다. (3) 목회관의 변화이다. 전통적으로 부유하여 교회에 속한 교인들뿐 아니라 가난하고 갈 교회가 없던 소외된 대중을 품는 목회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4) 선교비젼의 확대이다. 단순한 국내 전도활동뿐 아니라 세계를 품는 선교관이 그의 비젼이 된 것이다.

6년에서 1개월이 부족한 기간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송두리채 바쳤던 정든 목회지 루이빌, 자신을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던 성도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심슨목사는 발길을 다음 목적지로 옮긴다. 헤밀턴, 루이빌 공히 심슨은 동료사역자가운데서 발군의 업적을 세워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셨음을 드러낸 사역자임을 입증하였다. 캐나다 온타리오 서부 인적이 드문 농장출신 심슨 이제까지의 삶의 여정을 돌이킬 때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심슨의 성장은 부친 제임스와 모친 제인의 경건한 가정과 청교도적 전통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다음 장은 심슨의 출생배경부터 성장기의 삶과 헤밀턴 사역을 조명함으로 심슨의 비젼의 뿌리를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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