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9
나의 이야기 (1) 감나무 이야기 (1953년)
봄이 되니, 동네 곳곳에 아름다운 꽃이 그 향기를 풍기며 시든 마음에 새 힘을 주네요. 우리 동네에 한국인들도 제법 많은데 그 가운데 한 분이 한국의 감나무를 정원에 심어서 지나 갈 때 감꽃 구경을 할 수 있어요. 감꽃은 맛이 향기로와 어릴 때 목걸이를 만들다가 말고 그냥 먹어 치우곤 했어요. 감나무하면 제 기억에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추억이 있어요. 아마 제가 2살도 안 되었을 때일거에요. 남들은 "야, 그 때 아기가 무얼 그렇게 기억해" 하는데, 저는 아마 특별한 아기였던 것 같아요. 제게는 2살 내외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은게 많거든요. 그 때는 6.25 직후라, 부모님이 제 형님과 누님은 고향에 두고 두 분만 쌀 한 됫박만 가지고 김천으로 피난 오셨어요. 산꼴짝 방 2 개 있는 창구네 초가집 건넌방에 세 드셔서 사셨는데,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아버지는 동네 엿방에 가셔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그나마 가지고 오신 쌀로 떡을 만드셔서 김천 역전에 가셔서 피난민들에게 팔아 끼니를 근근히 이었던 시절이었어요. 근데 오시자 얼마 안 되어 저를 벽지도 장판도 제대로 없던 토방에서 낳으셨어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루라도 나가서 일하지 않으시면 끼니를 이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해산 후 몸도 제대로 풀지 못한 산모가 떡을 하셔서 머리에 이고 역전으로 나갔다 밤중에나 돌아 오시곤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 젖을 한 방울도 먹지 못했어요. 제가 나고 얼마 되지 않아 누나와 형님을 고향에서 데려 오셔서 저는 저보다 10살 많은 누나에게 업혀 살았구요. 그래서 아기 보는 일은 늘 누나의 몫이었어요. 엄마가 없으니 누나가 나를 돌보다가 해질 녁이 되면 동네 어귀에 있는 큰 감나무 밑에서 배고파 자지러지게 우는 저를 업고 엄마 돌아오시길 기다리곤 했어요. 그래 감나무하면 그 감나무가 생각나요. 어릴 때 못 먹어서 어찌나 울어 대었는지, 덕분에 제 목이 잘 트여서 소리도 우렁차고 듣기에 좋다고 그러대요. 감꽃하니 근 70여년 전의 기억이 나고 어머님 생각이 더욱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