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6
나의 이야기 (23) 엄마와의 6달- 1971년 대학2학년때 이야기
요사이는 부쩍 울 엄마 생각이 간절하고 옛날 엄마와의 추억이 자꾸 떠오르네요. 바로 요맘때 돌아 가셨거든요. 제가 엄마하고만 6개월간 함께 살았던 적이 있어요. 그게 1971년 초 제가 대학 2학년 올라간 때였어요. 그때 제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엄마가 6개월 정도 저를 돌보셨어요. 저는 원래 어릴 때부터 제대로 못 먹고 자라 음식만 보면 환장을 해서 폭식하는 바람에 위장을 일찌감치 버렸어요. 그 때문에 어릴 때부터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게 객지에서 재수하며 악화된 상태로 대학에 입학했어요. 재수할 때는 제대로 식사를 챙겨 먹을 여유가 없이 독서실에서 살았거든요. 거기에다 1년간 불규칙적인 대학생활을 하고 나니 위가 걷잡을 수 없게 망가져서, 뭐든 먹으면 속이 그걸 받지를 않아 걸핏하면 위액까지 토해내곤 했어요. 그럼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고 빙빙 도는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빈 속에 암포젤이나 제산제를 들이 부으면 속이 좀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음식만 들어가면 다시 뒤집어져요. 데모에 적극 가담해서 거리를 헤매다 보니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지요.
엄마가 오기 전에는 하숙을 하거나 입주해서 가정교사를 했지만, 엄마가 오신 후에는 동숭동 산꼭대기에 방을 하나 얻어서 살았어요. 사실 엄마도 그때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어요. 엄마는 2년 전에 쓸개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으셔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셨거든요. 아무리 육신이 힘들어도 울 집에 계시면 엿공장일과 살림살이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어요.
제가 가정교사로 벌어온 돈을 엄마에게 드리면 엄마가 그걸로 살림을 하셨는데, 엄마가 그걸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몰라요. 엄마의 꿈은 이렇게 아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을 하시며 사는 것이었어요.
"야야, 이래 평생 살면 얼매나 좋겠노." 엄마가 어느날 제게 하셨어요.
엄마와 동거하는 동안 겪었던 별난 일도 많지만 두 가지만 나눌게요.
첫번째 사건은 울 엄마로 하여금 서울인심이 흉악한 것을 깨닫게 한 사건이에요. 당시 서울대학에 입학하니 교복을 맞추게 했는데 그게 꼭 고등학생 교복 같았어요. 그래도 옷감이 좋은 고급 옷인데다, 서울대학생임을 증명하는 신분증명이잖아요. 그래 주야장창 외출 때는 그 옷만 입었어요. 엄마가 올라와서 내 꼴을 보니까 세탁도 않고 사시사철 입어서 때가 끼어 꼬질꼬질한거에요. 그래 제가 학교에 가고 없는 동안에 바지를 빨아 집 앞 골목길에 줄을 매고 널어 두셨어요. 웃도리는 빨기가 어려운 옷이었거든요. 제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보니 골목에 없던 빨래줄이 걸려있는데 거기에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 "아차"해서 엄마에게 물었지요.
"엄마, 여기 뭔 빨래줄이유?"
"네 바지가 넘 고질고질해서 빨아서 거기 널었다."
엄마는 서울이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흉악한 악의 도성임을 미쳐 모르셨던 거에요. 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지요. 누가 빨래를 홀랑 다 걷어가 버렸어요. 뭐 그만하면 서울 사는 수업료로는 싼 셈이었지만 제겐 뼈아픈 경험이었어요. 그래, 그후에는 평화시장에서 사온 군복 물들인 검정 작업복만 애용했지요.
반면에, 서울인심이 후한 것을 깨닫게 한 사건도 있어요. 엄마는 어짜든지 아들이 건강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 온갖 궁리를 다하셨는데, 양배추 파란 껍질을 갈아서 먹으면 위를 강화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으셨나 봐요. 동숭동 산의 이쪽은 서울대학 문리대가 있었고 반대쪽은 삼선교 시장이 있었어요. 엄마는 매일 삼선교 시장에 가셔서 양배추 장수가 까서 버리는 파란 껍질을 줏어다가 제게 그 즙을 매끼마다 마시게 하셨어요. 근데, 어느날은 엄마가 왠 양배추 한 통을 가져 오셔서 그걸 푹 삶아서 된장에 찍어먹으라고 주세요.
"야야, 양배추 삶아서 된장에 찍어묵으면 그기 위장에는 보약이라 카더라. 억지로라도 다 묵으라."
"아니, 이게 왠 양배추에유?" 그랬더니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세요.
“양배추 장사가 돈 안 받을끼니까 이거 가지고 가셔서 묵으라 카더라.”
알고보니, 왠 할머니가 매일 와서 껍질을 줏어가는 것을 본 양배추 장수 아저씨가 오죽하면 껍질만 줏어갈까 불쌍해서 양배추를 한 통 드린거에요. 사실 그 때 엄마의 나이 불과 47세이셨는데 고생을 너무 하셔서 남들이 할머니로 본거에요.
저도 엄마가 오셔서 매끼를 챙겨주시니까, 상태가 호전되나 했는데 어느날 아부지께서 갑자기 올라오셨어요. 오시더니 아무 얘기도 않으시고 함께 지내시기 시작하셨어요. 근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다 가도록 아부지께서 도통 떠나실 기미가 안 보여요. 그래 아부지께 여쭈었어요.
“아부지, 공장은 우짜고 이래 올라오셨읍니까? 우짠 일입니까?”
“공장은 내 없어도 니 성이 알아서 한다. 우째 지내나 싶어 그냥 함 올라와 봤다. 신경 쓰지 말고 니 일이나 보기라.”
아부지 말씀을 듣다가 생각하니 아부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였어요. 엄마가 안 계시니까 너무 외롭고 힘드셔서 모시러 오셨던 거에요. 근데, 그게 저한테 미안하시니까 말은 못하시고 제 눈치만 보고 계셨던 거에요. 안 봐도 뻔했어요. 아마 제가 없는 동안 두 분이 꽤 설왕설래하셨을거에요. 물론 엄마는 절대 시골로 가지 않으려 하셨을거고, 아부지는 가자고 조르셨을거에요. 제가 철이 일찍 들어서 중학교 때부터는 부모님이 중요한 일이 있음 제게 의견을 물어보실 정도여서 아들이라도 함부로 무얼 요구하시지 않으셨어요. 두분은 금슬도 엄청 좋으신데다, 아부지는 엄마를 의지하시는 정도가 대단했어요. 그래 가만히 생각하니 아부지도 엄마가 필요한데 내가 내 욕심으로 엄마를 독점하고 있는 것 같아 아부지께 미안하더라구요. 그래, 아부지께 말씀드렸어요.
“아부지, 지는 인자 전딜 만하이 니리 가실 때 어무이 모시고 가세유.”
그랬더니 아부지께서 못 이기시는 체 하시고 며칠 후 엄마를 모시고 내려가셨어요. 결국 제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휴학하고 시골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지요.
나중에 엄마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하셨다고 해요. 평생 처음으로 휴식이란 걸 취하셨던거에요. 저희 집은 가내수공업으로 엿공장을 하였던지라, 온 식구가 매달릴 수 밖에 없었어요. 엄마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부지와 함께 엿공장에 불을 짚임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어요. 아부지는 밤새 삭혀진 단술을 엿자루에 퍼담으신 후 작끼통에 자루들을 포개고 그걸 작끼로 짜서 짠 엿물을 받아서 솥에 옮기셨어요. 그럼 그걸 달이면 처음에는 묽은 엿인 조청이 되었다가, 더 달이면 엿장수가 파는 엿의 재료인 강엿이 되는거에요. 그 과정이 새벽부터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어요. 그럼, 또 싸래기 등 재료를 깨끗하게 물로 씻어서 물을 짝 뺀 후, 그걸 큰 시루에 쪄서 고두밥을 만들어요. 그리고 고두밥에 따뜻한 물을 붓고, 싹낸 보리인 엿기름과 효소를 붓고, 큰 나무통에 넣고 밀봉해 둬요. 그럼 밤새 효소가 역사해서 녹말이 당화해서 단술로 변해요. 그걸 그 다음날 새벽에 자루에 담아 작끼로 짜서 엿물을 달이는 작업을 해요. 이렇게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 매일의 일과가 진행되니 울 엄마는 새벽부터 한시도 쉴 틈이 없으셨어요. 공장일하시는 중간중간에 온 식구와 일꾼 끼니 챙기셔야 하고, 아침에 엿물을 짜낸 찌꺼기인 엿밥을 사러 온 축산업자들에게 판매하셔야 해요. 보통 엄마가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는 동안은 제가 공장에 불을 땠어요. 그러다가 불이나케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곤 했어요. 공장 일 하루 마감은 보통 저녁 9시, 그럼 그때부터 엿자루 구멍 난 것 꿰매고, 그후에는 우리들의 구멍 난 옷과 양말 꿰매시면 벌써 자정이에요.
여기에 더해서 할배가 우리 집에 오셔서 함께 사실 때도 많았는데, 그 때는 할배 섬기는 일이 엄청난 고난이었어요. 울 할배는 고생 한번 않으시고 한량으로 사신 분인데, 옛날 기준으로 멋쟁이셨어요. 당시에는 모두 한복을 입었는데, 할배는 한복을 한번 입으시면 절대 다시 입으시는 법이 없어요. 한복에 먼지만 묻어도 그걸 손가락으로 탁 튕겨보시고 그게 안 떨어지면 옷을 “홱” 벗어 던지세요. 그럼 엄마가 그걸 모두 실밥을 다 뜯고 분해하셔서 빨래터에 가서 빨아오세요. 겨울에 날이 추우면 손이 온통 벌곃게 어셔서 집에 오시곤 했어요. 밤이면 그걸 늦게까지 다듬이로 두드리시고 다시 옷을 지으셔서 그 다음 날 할배 입고 나가시게 내 드려야 했어요. 안 그럼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엿공장 일하시랴, 밥하랴 정신없는 중에 할배 뒤치닥거리까지 하셨으니 그게 어디 사람 사는거에요? 그래 저는 할배가 엄청 미웠어요. 어릴 때 저는 본 받아야 할 사람과, 본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분명히 구분해서 그대로 살았는데, 울 할배는 후자에 속했어요. 그래, 할배가 하셨던 횡포는 제 평생 한번도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실제 그렇게 살았어요. 물론 울 엄마는 전자에 속하셨지요.
“어머니의 크신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 줍니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 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에 찬송 부르십니다.’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찬송가 가사에요. 울 엄마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저를 위해 평생 아침마다 장독대 위에 정한수 떠놓고 저를 위해 용왕공을 드리셨어요.
요사이는 부쩍 울 엄마 생각이 간절하고 옛날 엄마와의 추억이 자꾸 떠오르네요. 바로 요맘때 돌아 가셨거든요. 제가 엄마하고만 6개월간 함께 살았던 적이 있어요. 그게 1971년 초 제가 대학 2학년 올라간 때였어요. 그때 제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엄마가 6개월 정도 저를 돌보셨어요. 저는 원래 어릴 때부터 제대로 못 먹고 자라 음식만 보면 환장을 해서 폭식하는 바람에 위장을 일찌감치 버렸어요. 그 때문에 어릴 때부터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게 객지에서 재수하며 악화된 상태로 대학에 입학했어요. 재수할 때는 제대로 식사를 챙겨 먹을 여유가 없이 독서실에서 살았거든요. 거기에다 1년간 불규칙적인 대학생활을 하고 나니 위가 걷잡을 수 없게 망가져서, 뭐든 먹으면 속이 그걸 받지를 않아 걸핏하면 위액까지 토해내곤 했어요. 그럼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고 빙빙 도는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빈 속에 암포젤이나 제산제를 들이 부으면 속이 좀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음식만 들어가면 다시 뒤집어졌어요. 데모에 적극 가담해서 거리를 헤매다 보니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지요.
엄마가 오기 전에는 하숙을 하거나 입주해서 가정교사를 했지만, 엄마가 오신 후에는 동숭동 산꼭대기에 방을 하나 얻어서 살았어요. 사실 엄마도 그때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어요. 엄마는 2년 전에 쓸개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으셔서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셨거든요. 아무리 육신이 힘들어도 울 집에 계시면 엿공장일과 살림살이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어요.
제가 가정교사로 벌어온 돈을 엄마에게 드리면 엄마가 그걸로 살림을 하셨는데, 엄마가 그걸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몰라요. 엄마의 꿈은 이렇게 아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을 하시며 사는 것이었어요.
"야야, 이래 평생 살면 얼매나 좋겠노."
엄마가 어느날 제게 말씀하셨어요. 엄마와 동거하는 동안 겪었던 별난 일도 많지만 두 가지만 나눌게요.
첫번째 사건은 울 엄마로 하여금 서울인심이 흉악한 것을 깨닫게 한 사건이에요. 당시 서울대학에 입학하니 교복을 맞추게 했는데 그게 꼭 고등학생 교복 같았어요. 그래도 옷감이 좋은 고급 옷인데다, 서울대학생임을 증명하는 신분증명이잖아요. 그래 주야장창 외출 때는 그 옷만 입었어요. 엄마가 올라와서 내 꼴을 보니까 세탁도 않고 사시사철 입어서 때가 끼어 꼬질꼬질한거에요. 그래 제가 학교에 가고 없는 동안에 바지를 빨아 집 앞 골목길에 줄을 매고 널어 두셨어요. 웃도리는 빨기가 어려운 옷이었거든요. 제가 학교에서 돌아 와서 보니 골목에 없던 빨래줄이 걸려 있는데 거기에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 "아차"해서 엄마에게 물었지요.
"엄마, 여기 뭔 빨래줄이유?"
"네 바지가 넘 고질고질해서 빨아서 거기 널었다."
엄마는 서울이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흉악한 악의 도성임을 미쳐 모르셨던 거에요. 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지요. 누가 빨래를 홀랑 다 걷어가 버렸어요. 뭐 그만하면 서울 사는 수업료로는 싼 셈이었지만 제겐 뼈 아픈 경험이었어요. 그래, 그후에는 평화시장에서 사온 군복 물들인 검정 작업복만 애용했지요.
반면에, 서울인심이 후한 것을 깨닫게 한 사건도 있어요. 엄마는 어짜든지 아들이 건강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 온갖 궁리를 다하셨는데, 양배추 파란 껍질을 갈아서 먹으면 위를 강화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으셨나 봐요. 동숭동 산의 이쪽은 서울대학 문리대가 있었고 반대쪽은 삼선교 시장이 있었어요. 엄마는 매일 삼선교 시장에 가셔서 양배추 장수가 까서 버리는 파란 껍질을 줏어다가 그걸 짓찧으셔서 제게 그 즙을 매끼마다 마시게 하셨어요. 근데, 어느날은 엄마가 왠 양배추 한 통을 가져 오셔서 그걸 푹 삶아서 된장에 찍어먹으라고 주세요.
"야야, 양배추 삶아서 된장에 찍어묵으면 그기 위장에는 보약이라 카더라. 억지로라도 다 묵으라."
"아니, 이게 왠 양배추에유?"
“양배추 장사가 돈 안 받을끼니까 이거 가지고 가셔서 묵으라 카더라.”
알고보니, 왠 할머니가 매일 와서 껍질을 줏어가는 것을 본 양배추 장수가 오죽하면 껍질만 줏어 갈까 불쌍해서 양배추를 한 통 드렸던 거에요. 사실 그 때 엄마의 나이 불과 47세이셨는데 고생을 너무 하셔서 남들이 할머니로 보았어요.
저도 엄마가 오셔서 매끼를 챙겨 주시니까, 상태가 호전되나 했는데 어느날 아부지께서 갑자기 올라오셨어요. 오시더니 아무 얘기도 않으시고 함께 지내시기 시작하셨어요. 근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다 가도록 아부지께서 도통 떠나실 기미가 안 보여요. 그래 아부지께 여쭈었어요.
“아부지, 공장은 우짜고 이래 올라오셨읍니까? 우짠 일입니까?”
“공장은 내 없어도 니 성이 알아서 한다. 우째 지내나 싶어 그냥 함 올라와 봤다. 신경 쓰지 말고 니 일이나 보기라.”
아부지 말씀을 듣다가 생각하니 아부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였어요. 엄마가 안 계시니까 너무 외롭고 힘드셔서 모시러 오셨던 거에요. 근데, 그게 저한테 미안하시니까 말은 못하시고 제 눈치만 보고 계셨던 거에요. 안 봐도 뻔했어요. 아마 제가 없는 동안 두 분이 꽤 설왕설래하셨을거에요. 물론 엄마는 절대 시골로 가지 않으려 하셨을거고, 아부지는 가자고 조르셨을거에요. 제가 철이 일찍 들어서 중학교 때부터는 부모님이 중요한 일이 있음 제게 의견을 물어보실 정도여서 아들이라도 함부로 무얼 요구하시지 않으셨어요. 두분은 금슬도 엄청 좋으셨던 데다, 아부지는 엄마를 의지하시는 정도가 대단했어요. 그래 가만히 생각하니 아부지도 엄마가 필요한데 내가 내 욕심으로 엄마를 독점하고 있는 것 같아 아부지께 미안하더라구요. 그래, 아부지께 말씀드렸어요.
“아부지, 지는 인자 전딜 만하이 니리 가실 때 어무이 모시고 가세유.”
그랬더니 아부지께서 못 이기시는 체 하시고 며칠 후 엄마를 모시고 내려 가셨어요. 결국 제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휴학하고 시골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지요.
나중에 엄마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하셨다고 해요. 평생 처음으로 휴식이란 걸 취하셨던 거에요. 저희 집은 가내수공업으로 엿공장을 하였던지라, 온 식구가 매달릴 수 밖에 없었어요. 엄마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부지와 함께 엿공장에 불을 짚임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어요. 아부지는 밤새 삭혀진 단술을 엿자루에 퍼담으신 후 작끼통에 자루들을 포개고 그걸 작끼로 짜서 짠 엿물을 받아서 솥에 옮기셨어요. 그럼 그걸 달이면 처음에는 묽은 엿인 조청이 되었다가, 더 달이면 엿장수가 파는 엿의 재료인 강엿이 되는거에요. 그 과정이 새벽부터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어요. 그럼, 또 싸래기 등 재료를 깨끗하게 물로 씻어서 물을 짝 뺀 후, 그걸 큰 시루에 쪄서 고두밥을 만들어요. 그리고 고두밥에 따뜻한 물을 붓고, 싹낸 보리인 엿기름과 효소를 붓고, 큰 나무통에 넣고 밀봉해 둬요. 그럼 밤새 효소가 역사해서 녹말이 당화해서 단술로 변해요. 그걸 그 다음날 새벽에 자루에 담아 작끼로 짜서 엿물을 달이는 작업을 해요. 이렇게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 매일의 일과가 진행되니 울 엄마는 새벽부터 한시도 쉴 틈이 없으셨어요. 공장일하시는 중간중간에 온 식구와 일꾼 끼니 챙기셔야 하고, 아침에 엿물을 짜낸 찌꺼기인 엿밥을 사러 온 축산업자들에게 판매하셔야 했어요. 보통 엄마가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는 동안은 제가 공장에 불을 땠어요. 그러다가 불이나케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곤 했어요. 공장 일 하루 마감은 보통 저녁 9시, 그럼 그때부터 엿자루 구멍 난 것 꿰매고, 그후에는 우리들의 구멍 난 옷과 양말 꿰매시면 벌써 자정이에요.
여기에 더해서 할배가 우리 집에 오셔서 함께 사실 때도 많았는데, 그 때는 할배 섬기는 일이 엄청난 고난이었어요. 울 할배는 고생 한번 않으시고 한량으로 사셨는데, 옛날 기준으로 멋쟁이셨어요. 당시에는 모두 한복을 입었는데, 할배는 한복을 한번 입으시면 절대 다시 입으시는 법이 없었어요. 한복에 먼지만 묻어도 그걸 손가락으로 탁 튕겨보시고 그게 안 떨어지면 옷을 “홱” 벗어 던지셨어요. 그럼 엄마가 그걸 모두 실밥을 다 뜯고 분해하셔서 빨래터에 가서 빨아오셨어요. 겨울에 날이 추우면 손이 온통 벌곃게 어셔서 집에 오시곤 했어요. 밤이면 그걸 늦게까지 다듬이로 두드리시고 다시 옷을 지으셔서 그 다음 날 할배 입고 나가시게 내 드려야 했어요. 안 그럼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엿공장 일하시랴, 밥하랴 정신없는 중에 할배 뒤치닥거리까지 하셨으니 그게 어디 사람 사는거에요? 그래 저는 할배가 엄청 미웠어요. 어릴 때 저는 본 받아야 할 사람과, 본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분명히 구분해서 그대로 살았는데, 울 할배는 후자에 속했어요. 그래, 할배가 하셨던 횡포는 제 평생 한번도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실제 그렇게 살았어요. 물론 울 엄마는 전자에 속하셨지요.
“어머니의 크신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 줍니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 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에 찬송 부르십니다.’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찬송가 가사에요. 울 엄마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저를 위해 평생 아침마다 장독대 위에 정한수 떠놓고 저를 위해 용왕공을 드리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