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7
나의 이야기 (20) 아부지와 예천에 다녀오다- 1966년 김천 고등학교 1학년
그동안 울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오늘은 내가 울 아부지의 위대하심을 실감하게 한 사건을 나누고자 한다. 아마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66년이었을 것이다. 여름방학 때라, 집에 있는데 아부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야야, 예천에 엿 한 트럭 배달가는데 니도 갈래?”
그때는 내 몸도 다 자라서 어른의 덩치인데다, 장사 눈도 밝아져서 엿공장 일꾼겸 수금원으로 맹활약하던 때였다.
“예, 가지유.”
당시 예천 거래처의 아들이 내 또래라, 들를 때마다 그 친구와 한잔 걸치며 교제하곤 했다. 그 친구는 나보다 한 학년이 높았는데, 일찍부터 나처럼 엿집 일에 발벗고 나서서 지 아부지 일을 도왔다. 거기에다, 나는 어릴 때부터 김천이란 손바닥만한 동네에 갖혀 사는 것이 꼭 감옥처럼 느껴졌기에, 김천을 벗어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따라 나서곤 했다. 그래, 얼른 엿을 트럭 한 가득 싣고 아부지를 따라서 아침 일찍 예천으로 출발했다.
우리 집 엿공장의 거래처는 초기에는 주로 김천 시내에 있는 과자공장이나 거리마다 다니며 엿을 주고 고철을 수거하는 엿장수들을 둔 엿집이었다. 과자공장들은 설탕가격이 비싸니까 그보다 값은 싸도 질은 좋은 묽은 엿, 즉 조청을 사서 설탕과 섞어 반죽을 해서 과자를 만들었다. 엿집들은 우리 집에서 강엿을 사다가, 그걸 데워서 녹인 후, 뜨거운 방 안에서 중국집에서 면을 뽑듯이 엿을 뽑아 그걸 낫개로 잘라 길거리에서 파는 엿을 만들었다. 원래 김천의 엿공장하면 우리 집이 원조였는데, 그동안 경쟁이 늘어나서 우리가 사는 모암동에만 해도 엿집이 4개가 되었다. 거기다, 우리 집도 공장을 계속 키우다 보니 생산량이 늘어나 김천 시내의 거래처만으로는 생산한 제품을 판매하는 데 애로가 많았다. 그래, 거래처를 외처에도 더러 확보를 했는데, 그 중 큰 곳이 예천엿집이었다. 당시, 외처의 우리 거래처들은 모두 엿집이었다.
운전수 옆자리라 덜컹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오랜만에 이 답답한 김천을 벗어나 외처로 가는 것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오랜만에 얻어탄 트럭이라 그걸 타고 국도를 “씽씽” 달리니 열린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리는데 그게 아프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당시야 국도라고 해야, 제대로 포장도 않은 도로였지만 그게 외려 호셔서* 신이 났다. 거기에다, 이렇게 제품을 가득 싣고 거래처에 간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뭐나 된 것처럼 괜히 기분이 우쭐해졌다. 몇 시간 안되어 예천 거래처에 도착하니 거래처의 아들이 반겼다. 엿을 내려놓고 아부지는 거기 계시고, 나는 때가 마침 점심 때라 그 집 아들과 장바닥에 있는 주막에 가서 한잔 걸치며 점심을 나누었다. 고등학생이 뭔 술이냐고 하시겠지만 그건 뭘 모르는 말씀이다. 당시 시골에서는 중학교에만 가도 어른 취급을 받아 어른들이 막걸리 한잔씩 권하는 풍토였다.
“자네도 이젠 고등교육을 받는 어른이니 한 잔해도 괜찮네. 드시게.” 내가 중학교 2학년때 친구 아부지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기분 좋게 점심을 한 후, 거래처에 돌아왔는데 어째 분위기가 살벌했다. 아부지와 거래처 사장과의 논쟁이 한창이었다.
“여보시여, 아 이번 것은 몰라도 지난 번 외상 빚은 다 갚으셔야지, 이기 뭐유.”
아부지 말씀이다.
보니, 그 양반이 대금이라고 내놓은 것이 지난 번 외상 빚을 갚기에도 태부족이었다.
“김주사, 좀 봐 주시여. 요새 통 장사가 안되니더. 글쿠 현금이 통 들어오들 않니더.”
울 아부지께서 이 말을 들으시더니 못 마땅한 표정으로 눈을 들어 거래처의 창고쪽을 힐긋 보셨다. 한참 그러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난 번 외상 빚은 반드시 받아 가야 우리도 재료 사서 공장 돌릴 수 있수다. 안 그럼 공장 문 닫아야 되유. 현금이 안됨 고철이라도 가져가리다. 얼매나 모아놓았수?”
그 양반이 우리를 고철을 모아 둔 창고로 안내해서 그리로 가서 보니 고철을 구분하지 않고 마구잽이로 쌓아놓았는데 내 눈에는 그게 영 돈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참말로 저기 뭐 돈이 된다꼬, 아부지는 황금같은 엿 주고 씨레기를 들고 갈라 카나.”
내가 속으로 투덜거린 말이다.
아 그런데 울 아부지는 그걸 보시더니 그것들을 사람을 시켜 분류를 시키시는데 일사분란하기 짝이 없다. “저건 신쭈 (놋쇠)고 저건 주철이고, 저건….” 말씀하시는데 고철에는 박사이신거다. 아부지가 말씀하시는 대로 분류하니까 금방 고철더미가 쓸만한 제품군들로 탈바꿈했다. 그러니까 거래처 사장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이거 정리해 놓으니 괜찮네. 괜히 고철로 가져가라 캤나.”
아마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래, 그것들을 종류 별로 아부지가 직접 저울로 달아서 종류 별 시가를 쳐서 계산해 내시는데 컴퓨터가 따로 없다. 울 아부지 학교문턱에도 가지 않으신 분이라, 내가 평소에 좀 우습게 보았던 면이 있었는데 울 아부지 대단한 분이셨던거다.
나중에 아부지 말씀을 들으니, 아부지는 9살에 계모 등쌀에 고향집을 떠나서 대구에서 혼자 엿집에서 엿을 받아다 길거리에서 파는 엿장수 노릇을 하셨다고 하셨다. 울 할매는 한량 남편 만나서 아부지와 고모 둘만 낳으신 후 속만 끓이시다가 일찍 가셨고, 할배는 어디서 또 딸 또래의 젊은 할매를 데려다 놓으셔서 울 아부지는 천덕 꾸러기로 전락하셨다. 객지인 대구에서 9살짜리였던 아부지께서 어떤 삶을 사셨을지 눈에 선하다. 보나마나 처음에는 길거리의 천사이셨을거고, 밥이라도 묵을라꼬 엿집에 찾아가서 일꾼으로 시작하셨을 것이다. 그게 왜정 때였는데, 울 아부지 성실함을 인정 받으셔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본인이 엿집을 운영하여, 이를 통해 수거한 고철을 당시 일본 고철업체에 팔아 나이 20세도 안되어 떼돈을 버셨다고 한다. 당시 대동아전쟁으로 물자가 귀해 고철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때라, 고철 한 트럭하면 좋은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특히 아부지는 워낙 성실하고 정직하신 분이라, 거래하던 일본 고철상인들이 울 아부지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거래를 해서 젊은 나이에도 엄청 잘 나가는 대상인이 되셨다. 울 아부지는 공장에서 일하시다가 걸핏하면 일본창가를 신명나게 부르시곤 했는데 내가 들어도 완전 프로 솜씨이셨다. 그게 다 일본상인들과 요정에서 한잔 하시던 가락이라고 하셨다. 참말인지는 모르지만 울 아부지 소리가 청명하고 높아서 한 곡 뽑으심 요정의 기생들이 자지러졌다고 한다. 내가 교인들에게 내 음성이 듣기에 좋고 찌렁찌렁한다고 칭찬을 많이 듣는데, 그거 다 아부지 피를 받은 덕택이다. 그래, 엿과 고철에 관한 한 울 아부지는 전문가요, 박사이셔서 그 정도 고철더미를 분류하시고 값을 셈하시는 거야 아부지에게는 아침 해장감이었던 것이다.
엿을 날랐던 트럭에 고철을 한 가득 싣고 김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부지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야, 오늘 수지 맞았다. 요새 신쭈 시세가 엄청 높다 아이가. 나는 엿집에 수금 갈 때 일부로 차를 바로 안 돌려보낸다. 여차하면 고철을 받아가려고 그랜기다. 오늘 그 집 고철더미를 얼핏 보니 신쭈가 얼매나 많은지 그래 내가 얼른 고철을 가져오겠다고 한기다. 그 집 주인은 내같은 눈이 업는기라. 고철더미를 그래 쌓아놓고 그걸 돈도 안되는 골치 더미로만 본기지. 그러이, 내가 가져 가겠다 카니 얼른 그러라고 하지 않드나. 김천 가마, 엿값보다 훨씬 더 받을거다.”
“아, 아부지 존경합니다. 오늘 또 한 수 배웠네유.” 내가 마음 속으로 탄복해서 했던 말이다.
*”호시다”라는 동사는 당시 김천 사투리로 애들이 널뛰기를 할 때 그게 덜렁거려서 기분을 좋은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