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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Sep
Trip to Mongolia Sept 8-9, 2012작성자: JintaeKim 조회 수: 900
9월 8일 오후 7:50분 비행기라 시간이 어중간해서 머뭇거리던 중, 용일이가 운전해서 오후 2시에 강남도심 공항 터미날로 갔다. 짐을 4개 부치고 간편하게 리모 버스 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이 오후 3시 밖에 되지 않았다. 하고 많은 시간을 무엇으로 보낼까 하여 아내와 함께 게이트마다 산보하며 돌아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지역마다 특색 있는 가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천공항은 여러 면에서 승객들의 호평을 받게 되어 있었다. 가는 곳마다 무료로 인터넷이 제공되고 수하물을 담고 다니는 카트도 무료로 있어 돌아다니기에 용이했다. 오랜 동안의 기다림 끝에 비행기를 타니 오후 8시었다. 저녁식사를 않고 비행기를 타서 밥 주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도시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막상 밥상을 받은 것은 저녁 9시가 넘어서였다.
우리 좌석은 비상구 옆이라 앞은 툭 트였는데 안내양의 의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아가씨가 앉기에 보니 몽골 아가씨였다. 한국어가 서투른데도 어떻게 직장을 잘 잡았는지 물었더니 꼭 한국어를 보고 선발하지 않는다 했다. 이 아가씨는 CAMA 병원이 소재한 다르항이 고향인 아가씨로 서울 삼선동에 소재한 한성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3시간 반 정도 걸려서 울란바토르 징기스칸 공항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이 저녁 10월 40분이었다. 통관절차를 끝내고 나서 짐을 찾으니 다행히 짐이 제일 먼저 나왔다.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하면서 몽골사회의 변치 않은 모습도 발견했다. 한 사람씩 입국절차를 밟게 되어 있어 내가 먼저 끝내고 물러나서 아내가 수속하는 것을 기다리려 했더니 남자 직원이 아래 층으로 내려 가라고 고함을 친다. 아내를 기다린다고 했더니 한 대 때릴 것처럼 강압적인 말투로 고함을 지르기에 할 수 없기 먼저 내려 가서 짐 찾는 곳으로 갔다. 외국인 입국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러하니 아직도 몽골이 근대화되려면 멀었다. 경찰국가의 태가 그대로 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짐이 제일 먼저 나와서 바로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내가 모닝캄 회원이어서 짐을 그렇게 실었기 때문인가 보다. 짐을 찾아 출구를 나오니 임 선교사 부부께서 마중 나오셔서 함께 이르틴으로 차를 몰아가는데 비가 뚝뚝 떨어진다. 이런 철에 비가 이렇게 내리는 것도 처음이라 한다. 도착부터 비가 쏟아지더니 밤새 내렸다. 그냥 이르틴으로 직행하려니 밤을 새워서 운전해야 할 것 같아 중간에 하룻밤 숙박을 하기로 하고 중간에 있는 "Secret History of Mongolia"에 도착하여 짐을 푸니 9월 9일 새벽 2시가 넘었다. 2008년에 방문했을 때 들렀던 곳으로 수양관이다. 몽골의 경기가 좋아져서 외국인들이 밀려 들어오는 바람에 호텔방 구하기가 어렵다 보니 이 곳도 빈 방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짐을 들고 들판에 세운 "게르" (몽고식 천막집)에 들어갔다. 날씨가 너무 쌀쌀해서 난로를 집히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하는 아가씨가 30분은 끌면서 겨우 불을 붙이니 석탄냄새가 게르 내부에 가득 찬 것이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제대로 양치도 못하고 세수도 못한 채 침대에 몸을 누이니 잠이 오지를 않는다. 겨우 새우잠을 조금 자고 일어나니 아침 7시 30분이었다. 임 선교사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간단하게 주일예배를 드리고 나서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나누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수태차 맛이 그만이었다.
샤워도 하고 아침도 먹고 하니 기분이 그만이었다. 밤새 내린 비도 거의 멎고 차를 몰고 출발하니 몽골 특유의 푸른 하늘이 눈을 즐겁게 한다. 달리면서 눈에 뜨인 것은 유독 길에 차가 많다는 것이다. 임 선교사 부부의 얘기를 들으니 2008년에 내가 방문했을 때와는 몽골사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한다. 세계각국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몽골에 엄청난 투자를 하다 보니 매년 경제성장률이 20 퍼센트를 상회하고 차량도 이에 비례해서 증가했다. 남고비 오양톨고이에 동광산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 캐나다 광산회사인 이바노프 사가 벌써 180억불을 투자해서 그 지역에 온통 부동산 붐이 일어났다고 한다. 오양톨고이는 중국국경에 인접한 150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도시인데 동광산 개발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중국정부는 생산품 모두를 중국에서 가져 갈테니 중국까지 철도를 놓아주겠다고 제의했는데 중국을 싫어하는 몽골정부에서 거절하고 러시아에 수출하기 위해 동쪽에 위치한 "생산"까지 철로를 놓아서 러시아까지 철도수송이 가능하게 할 계획으로 있다. 생산은 현재는 인구 4만 정도 규모의 소도시인데 오양톨고이와 철로로 연결되면 인구 30만 이상의 대도시로 탈바꿈할 것이어서 임 선교사는 이 곳으로 거점을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다. 임 선교사는 그 곳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이미 지도자를 파송해서 작업하고 있다. 오양톨고이 근교에는 다른 광물자원도 풍부하다. 근처의 타룬톨고이는 철 제련 시 사용하는 유연탄 광산이 있어 한국도 그 지분을 얻으려 했으나 한국대사의 섹스 스캔달 문제가 발생하여서 실패했다고 한다. 이런 경제개발의 여파는 사회에 악영향도 끼친다. 갑자기 엄청난 외화가 유입되다 보니 부동산 가격이 터무니 없이 올라가고 물가도 덩달아 뛰는데 정작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외화의 혜택은 없고 그것 때문에 땅도 빼앗기고 생활도 궁핍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다른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급작스럽게 늘어간 차량대수에다 밀집된 게르에서 피워대는 석탄 때문에 울란바토르의 공기는 숨쉬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그래서 임 선교사는 울란바토르에 머물 생각도 않고 바로 9시간 운전거리인 이르틴을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정권도 과거에는 공산당이 장기 집권했는데 이번 여름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여 집권함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제 초겨울이라 다들 월동준비를 하는지 초원마다 풀을 베서 곳곳에 모아 놓았는데 그 모양이 꼭 공동묘지 같은 모양이다. 이렇게 쌓인 풀 더미를 몽골 말로는 "오보"라고 한다고 한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풀이 있고 보다 따뜻한 곳을 찾아 이사를 하는 철이라 그 준비를 하는 것이다. 몽골 유목민들은 1년에 20번 이상씩 옮겨 다닌다. 숙소인 천막을 조립하는데 30분 밖에 안 걸린다니 참 대단하다. 이번 겨울은 영하 70도까지 내려 간다니 생각만 해도 섬찟하다. 풀 더미가 있는 초원을 지나니 사방으로 밀밭이 광활하게 뻗어 있다. 대량영농방법을 동원한 기업영농인데 4년 전보다 훨씬 많은 땅이 밀밭으로 변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몽골의 유목민들이 거주할 땅이 거의 없어질 것 같다. 2020년이 되면 목초지가 거의 없어질 것이란 말까지 들린다. 몽골은 겨울이 길기는 하나 햇볕이 강해 밀 재배에 적합하고 초원이 광활해서 얼마든지 경작 가능한 땅을 확보할 수 있다. 밀밭 위에는 John Deer 의 영농장비가 즐비하게 달리고 있고 이동식 sprinkler system 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곳곳에서 소, 양, 영보, 낙타 등 가축들을 만나면서 3시간여를 달렸다. 시멘트 공장이 있는 헛틀이란 도시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니 시간이 정오였다. 임명희 선교사께서 우리 대신 식사를 주문했는데 내 것은 소고기 김치 볶음밥이었다. 고기가 좀 질기기는 해도 한국사람 식성에 맞아서 먹을 만했다. 몽골사람들에게 한국김치는 이제 완전히 자기 나라 음식처럼 변했다. 식사 후부터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이르틴에 도착하기 직전에 과거 임 선교사와 내가 함께 교회개척을 위해 방문했던 자로갈랑에 가서 교회지도자인 슈샤를 만나서 교회모임을 위해 3500불에 새로 구매한 건물에 가보았다. 이 교회에는 현재 장년만 15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과거 소련사람들이 건설했던 아파트 건물의 1층에 위치한 방 하나짜리 아파트인데 교인들이 건물을 수선하느라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슈샤네 집을 심방하니 귀한 손님 왔다고 “타락” (몽골 야구르트)과 “아롤” (몽골 치즈)을 내놓았다. 처음 심방인데도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 받아 먹으니 기분이 좋은지 이것 저것 내놓는다. 맑은 물을 잔에 담아 주기에 차인 줄 알고 왕창 마셨는데 아뿔싸 맛이 완전히 소주 맛이다. 알고 보니 타락을 증류해서 만든 몽골 소주이다. 슈샤의 남편인 뿌재가 머리 허연 나를 보니 반가워서 몇 살이냐고 물었다. 60살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71살이라면서 너는 나한테 비교하면 청년이라고 으시 대었다. 사람은 좋은데 술을 너무 좋아해서 낮인데도 얼굴이 불그레하다. 일은 모두 아내인 슈샤가 다하고 자기는 집에서 술이나 먹고 쉬는 사람이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 뿌재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방문한 것이 그리도 기뻤는가 보다.
잠깐 머물다가 인사하고 차를 몰고 이르틴에 도착하니 시간이 오후 3시 40분이었다. 이르틴의 입구에서 나를 반긴 것은 4년 전 내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선사했던 "하루가이"였다. 집 근처에 흔한 풀인데 요사이 만지면 독성이 어찌나 강한지 말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 오르고 얼마다 따가운지 견딜 수가 없다. 그런데 하루가이가 고통만 주는 게 아니라 한다. 이걸 물에 다려서 머리를 감으면 대머리도 머리털이 보송보송하게 새로 난다고 한다. 그래서 몽골에는 대머리가 없다나.... 믿거나 말거나.... 어찌되었던 환갑 들어 부쩍 머리 숱이 적어지고 있는 내 형편이라 관심이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르틴의 입구에서 눈에 뜨인 또 한 가지는 아파트 벽에 거창하게 그려진 맑스, 레닌, 스탈린의 모습이다. 맑스의 그림 밑에는 "맑스의 가르침은 영원히 아름다운 가르침이다"라고 몽골어로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에서도 철거된 이들의 동상인데 이르틴에는 아직도 이들이 영웅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르틴 동광산을 운영하는 1000여명의 기술진이 모두 러시아 인들이고 동광산에서 일하는 5천명이 이르틴 10만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셈이니 공산주의를 동경할 수 밖에 없나 보다.
임 선교사 댁에 도착하자 마자 9월 10일부터 시작하는 세미나 자료를 새로 편집하고 있는데 몽골 손님들이 우루루 방문했다. 모두 이 근처에 사는 교회 지도자들인데 두 사람은 학교 교장 출신으로 은퇴한 후 교회를 섬기는 일에 삶을 바치는 분들이라 한다. 약 2년 전 임 선교사와 만났던 사이인데 오랫만에 방문했는데도 어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다. 인사를 하는데 얼굴을 비벼 대는 진한 러시아식 인사를 한다. 함께 찬양을 하는데 어떻게나 씩씩하게 찬양하는지 옆에서 보기만 해도 힘이 나고 은혜가 된다. 이런 모임은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다행인 것은 몽골의 인터넷 사정이 4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된 것이다. 임 선교사 집에도 과거에는 케이블 서비스가 들어오지 않아 수동으로 컴퓨터에 모뎀을 설치하여 사용했었는데 이제는 인터넷을 자유롭게 무선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내가 온라인 강의하는데 차질이 없었다. 임 선교사 아파트도 무선 인터넷이 작년까지는 공급이 안되었고 금년 초에야 이르틴에 무선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한다. 그러나 서비스가 제한이 많고 수요자는 많아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겨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실정이었는데 마침 내가 도착하기 1주일 전에 서비스가 개통되어서 내가 온라인 강의를 하는데 차질이 없어 마음 놓고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 무선방송 탑이 이 아파트 앞 뒤로 세워져 있어 인터넷이 가장 잘 되는 상황이라 한다. 임 선교사네 순서까지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딱 한 자리 남은 것을 배정 받았다 하니 이 또한 은혜이다. 밤 늦게까지 내일 세미나 준비를 하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내일도 새벽에 깨리라. 밤에는 다들 인터넷을 사용하기 때문에 서비스가 느리지만 새벽에는 인터넷이 잘되어서 일하기에 좋다. 9월 15일이 되어야 난방이 일괄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집안은 썰렁하다. 새벽을 기다리며 싸늘한 공기를 즐기며 옷 입은 채로 이불 속에 내 몸을 구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