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타르의 짝홀운행제도가 엄해져서 주일 저녁에 출발하지 못하고 월요일인 오늘 출발하기로 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니 훕수굴 교회 지도자 인 어기, 잉케 부부가 이미 숙소에 와 있었다. 함께 짐을 산더미처럼 싣고 다른 세 명의 지도자가 간밤 묵은 중쌀라 지도자 유니스네 게르로 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러한지 교통체증이 별로 없어 중쌀라에 도착해서 일행을 모두 태우고 출발하니 아침 7시 35분이었다. 중쌀라는 작년 9월 내가 선교여행 와서 떠나는 날인 9월 15일 개척예배를 드렸던 교회인데 유니스네 게르에서 예배를 드린다. 어제도 내가 누가복음 15장 말씀으로 설교를 했었다. 원래 땅을 사서 그 곳에 게르 교회를 만들려 했으나 선교부에서 이를 승인하지 않아 포기하고 그냥 유니스네 게르에서 모이고 있다.
이번 전도여행에 동행하는 다섯 명의 지도자는 그 면면이 다양하다. 알콜중독자로 헤매다 예수 믿고 완전히 변화되어 목사가 된 아르항가이 교회 지도자 다브가이, 자밍우드 공산당 부서기장 출신으로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다가 주님 영접하고 완전히 인생의 전환을 경험한 우리 교단 몽골선교회장 뭉크, 러시아 공군 통신장교 출신의 어기와 학교교장이던 어기의 부인 잉케, 다르항 공산당 서기장 출신의 유니스, 이상 다섯 명으로 실질적인 몽골 영적지도자들이다. 모두 지난 3년간 내게 신학훈련을 받은 사람들로 이번 고비전도여행은 신학훈련을 겸한 전도훈련이다.
다들 나이는 50이 넘었는데 여행에 나서는 모습이 소풍가는 국민학생 같았다. 몽골인은 유목민이라 한 자리에 머물기를 싫어하고 여행을 가장 즐기는 민족이다. 중쌀라에서 남부 고비로 가려면 일단 울란바타르 외곽으로 가서 남부쪽으로 가는 길을 타야 한다. 시내로 가는 길은 마침 출근시간으로 끔찍하고, 매연 또한 지독하여 내 목구멍이 벌써 칼칼해지고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20분 정도를 울란바타르 외곽으로 돌아서 남부로 가는 길로 접어드니 길이 공사 중이라 엄청 험하다. 끔찍하게 험한 길을 돌아가니 포장도로가 시작했다. 말이 포장도로이지 험하기는 매일반이어서 곳곳이 푹푹 파여 있어 곡예하듯 운전해야 한다. 그러니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다. 그래도 통행료는 어김없이 받는다. 통행료 2천 뚜구르를 내고 조금 가니 개스 스테이션이 나왔다. 기름을 4만뚜구르치 채우고 기분좋게 출발했다.
2시간 정도를 달리고 나니 짐승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아름다운 초원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길 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늦은 아침식사를 하는데 맛이 그만이었다. 식사를 하기 전에 간단한 예배를 드렸다. 이번 여행의 강사는 내 몫이라 로마서 15장 17절에서 24절 말씀 가지고 지도자들을 격려하니 다들 사기가 대단했다. 에스더 선교사 왈 8일간 먹을 것을 사는 데도 미화 $1000이 넘게 들었다고 한다. 아침식사의 메뉴는 간단했다. 유니스가 가져온 양고기 저민 것, 오이, 삶은 당근, 무우, 감자, 러시아 산 햄, 커피 이 정도면 준수한 셈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는데 시간을 보니 10시 13분이었다. 포장도로의 상태도 양호하여 속도를 내어서 달리는데 절로 감사가 나왔다. 원래 남고비 가는 길은 2013년까지도 포장이 되지 않았으나 작년에 포장된 새 길이 생겼다. 임선교사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라고 길까지 새로 닦아놓았는데 전도여행 안 가면 하나님께서 노하실 것이다.”
이번에는 운전대를 어기에게 맡겼다. 어기는 53세의 덩치가 제법 되는 남자인데 그 출신이 대단하다. 원래 러시아에서 교육받고 러시아 공군장교로 날리던 사람이고 우리가 이번에 방문할 지역인 훕수굴 (고비 훕수굴), 울란바트다랏의 주둔군 대대장으로 있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전도여행 갈 곳에 미리 인연을 만들어 주셔서 사역이 순조롭게 하신 것이다. 어기는 일부러 과거 입던 군복을 입고 왔는데, 더워서 웃도리를 벗으니 과거 러시아 공군장교 시절에 입던 파란 줄무늬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런 옷을 입고 있으면 경찰이 손대지를 않기에 일부러 이렇게 입고 온 것이다. 군대시절 우리가 몰고 온 푸르공을 매일 몰던 경력이 있어 우리 차 운전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러한지 어기가 운전을 하니 차가 어찌나 부드럽게 흘러가는지 앞 조수석에 앉은 내가 즉시 느낄 정도였다. 이 조수석은 모양은 근사한데 실속은 없다. 어찌나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는지 오전에는 아랫도리가 뜨거워 견디기 어려웠다. 에스더 선교사가 요상한 표정으로 깔깔 웃으며 내게 한 마디 던졌다.
“이번에 은퇴한 팸 선교사에 의하면 이 자리에 오래 앉으면 남자가 생식능력을 잃는다고 해요.”
이미 그건 졸업했으니까 지장은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아 윗도리를 거기에 얹고 가기로 했다.
오늘 첫 도착지는 호르뜨이다. 울란바타르에서 약 300 킬로정도 떨어진 광산도시이다. 원래 4년전 임선교사네가 이 곳에 들렀을 때 그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지도자 나르만다를 만나 격려하고 왔던 곳이다. 이번 여행이 워낙 갑자기 결정이 되어 연락도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쳐들어가는데 과연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호르뜨는 말젖을 발효하여 만든 에리악으로 유명한 곳이라 하여 기대가 크다. 달리며 들판을 보니 그런 대로 목초지가 있는 들판이라, 양, 염소, 소, 말떼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이 정겨웠다. 이럴 때는 나도 몽골 체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그 모양을 수시로 바꿔 가며 우리를 반기고 몽골 특유의 푸른 하늘은 더욱 하나님을 생각케 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러한 것이 아닌가, 천국의 풍경이 이런 것이 아닌가!”
기분좋게 한참을 달리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15분이었다. 드넓은 평원이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사방을 보아도 언덕을 찾기 어렵고 내 몸은 뜨거운 햇볓의 은혜로 견디기 어려워 반바지와 얇은 셔츠로 갈아입었다. 정오가 되니 처음으로 쌍봉낙타떼가 보이는 것이 드디어 고비사막의 인근에 온 듯했다. 아직은 그래도 염소와 소떼도 보이지만 머지 않아 쌍봉 낙타만 보일 것이라고 했다. 12시 30분에 노변에 차를 세우고 이른 점심식사를 하는데 토양이 어찌나 척박하고 메마른지 풀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최근에는 기상이변으로 비가 많이 와서 그나마 양과 염소떼가 이 부근에서도 살 수 있다고 했다. 2030년대가 되면 고비사막이 많은 강우량으로 옥토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식사를 하기 전에 다들 용변을 보러 남자는 이 쪽 여자는 저 쪽 가서 볼일을 보기로 했는데 여자들이 무얼 잔뜩 손에 줏어 들고 왔다. 내 눈에는 그저 돌인데 이들의 눈에는 이게 돈이다. 이롄에 가지고 가면 하나에 미화 3불 내지 4불씩 받는 석영이라면서 좋아했다. 그 말을 듣더니 임선교사도 여자들을 쫓아가서 보물찾기에 동참했다.
“참 짐만 늘지, 하여튼.”
여자들이 보물 찾기하는 동안 우리의 기사 어기는 걸레로 차를 닦고 차 밑에 들어가서 이완된 부품들을 조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러시아 푸르공이란 차는 워낙 싸구려로 만들어서 이렇게 항상 손을 보지 않으면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1시 20분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하는데 내 발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원래 내 발은 무좀이 극심한데다 극히 건성이라 이렇게 건조한 곳에 오면 엄청 고생한다. 그래 이번에 가지고 온 바셀린을 듬뿍 바르고 문질러 대니 한결 나았다. 30여분을 가다 보니 갑자기 길을 막아 놓고 아무데로나 돌아가게 해 놓았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길이 너무 패여져서 일부러 길을 막고 수선하는데 그 거리가 무려 10킬로가 넘었다. 몽골의 도로포장이 얼마나 열악한지 보여주는 표식이다. 제대로 아스팔트 두께를 채우지 않아 포장이 종이장처럼 얇다 보니 심지어는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이미 포장된 부분이 파손된다. 이 길도 공사한 지 1년여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이렇게 똥뚜더기처럼 변했다.
오후 3시에 개스 스테이션에 들러 기름을 넣고 출발하는데 그나마 있던 포장도로가 끝나고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자연 그대로의 길이었다. 햇빛은 작렬하고 먼지는 창으로 밀려오고 이제 제대로 된 사막이 나온 것이다. 그래 에스더 선교사에게 내가 가지고 온 마스크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차 지붕위에 얹어 꽁꽁 묶었으니 그냥 참으라고 했다.
“어이그, 그걸 말이라고.”
10분쯤 달리니 만달고비 표지가 나왔다. 만달고비에는 과거 우리 집에서 지냈던 가나의 할머니가 사시는데 지난 번 임선교사네가 우리 지도자들을 대동하고 갔다가 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곳이다.
오후 3시 55분 쯤 되었는데 누가 길에 차를 세워놓고 도와달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래 차를 세웠더니 11살된 자기 딸을 호르뜨까지 태워다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참 몽골 사람들은 특이하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기 딸을 덜렁 맡기고 마음 편히 갈 수 있을까? 사실 이는 바로 몽골인의 대범함에서 기인한다. 마침 우리 목적지가 호르뜨인지라 승낙하고 아이를 뭉크 옆에 태우고 바로 전도작업에 들어갔다. 아이의 이름은 “일기루마”이고 국민학교 6학년에 승급한다 했다. 아빠는 광산에서 일하고 엄마는 학교선생으로 호르뜨에 거주한다. 마침 우리가 방문할 나르만다의 뒷 집에 산다고 했다. 그래 전도지를 주고 뭉크가 복음을 전하니 참 잘 받아들이고 영접기도까지 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연이다. 이 인연을 소중하게 키워가면 호르뜨 복음화의 계기가 되리라.
목적지인 호르뜨에 도착하니 4시 30분이었다. 나르만다의 전화번호를 몰라 그냥 왔기에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에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오늘 오후에 울란바타르에 볼 일 보러 가고 없다고 했다. 그래 숙소를 찾다가 아무래도 오늘은 바로 에리카가 있는 촉칙칙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출발하려는데 학교건물 울타리 너머로 왠 자매가 무어라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도와 달라고 하니 가서 도와주라고 임선교사께서 나를 떠밀었다. 학교 울타리에 아이들 맽을 말리는데 그 중 두 개가 길 바닥으로 떨어져서 줏어 달라는 것이다. 내가 줏어서 깨끗이 털어서 주는데 뭉크와 유니스가 쪼르르 몰려와서 전도지를 주며 전도작업을 시작했다. 좌우간 실전에 강한 우리 지도자들이다. 임선교사도 함께 합류하니 다들 그 학교 여선생들이었다. 전도를 하려 하니 내년에 전도팀을 보내서 아이들을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했다. 임선교사께서 그럼 맨하탄선교교회 전도팀이 내년 1월에 오니 그 때 이 곳을 데리고 와서 복음을 전하기로 하고 전화번호를 받아 왔다. 작은 친절이 이렇게 큰 전도의 기회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촉칙칙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 5시간은 족히 운전해야 했다. 밤 10시나 되어야 도착하겠지만 오히려 시원한 시간이라 운전하기 좋을 것 같아 호르뜨는 다음 기회로 넘기고 오후 5시에 촉칙칙으로 핸들을 돌렸다. 30분쯤 가다 보니 에이락 판다는 표지가 보이고 오른 쪽 평원에 말떼가 40여 마리 함께 모여 있었다. 자녀 셋을 둔 젊은 부부가 말을 기르며 살고 있는데 우리가 가니 젖을 짜고 있었다. 게르에 들어가서 앉으니 에이락을 큰 대접에 한 대접 담아 주고 과자를 먹으라고 주었다. 에이락이 얼마나 양이 많은지 한 모금 마시니 벌써 배가 찼다. 나를 따라 들어온 뭉크와 지도자들이 즉시 전도지를 주고 전도하려 하니 이미 예수를 잘 믿는 자매였다. 에이락을 두 병 구매하고 축복기도를 해 준 후 떠났다.
한 시간여를 촉칙칙을 향해 운전을 하는데 길 왼쪽에 누가 누워있고 여자 한 사람이 도와달라고 손짓했다. 그래 차를 돌리고 다가가니 오토바이 타이어가 망가져서 사고로 사람이 다리가 부러진 채 쓰러져 있었다. 이미 경찰이 와서 의사를 불렀다며 경찰은 우리에게 그냥 가라고 했다. 임선교사는 그래도 그냥 갈 수 없어 구급 셋을 가지고 가서 내가 이번에 가지고 온 타일레놀을 먹이고 겉으로 드러난 상처만 소독하고 치료해 주었다. 그 와중에 의사가 도착해서 나머지는 의사에게 맡기고 떠났다.
30여분을 달리다가 7시 15분 경에 촉보보라는 도시에서 기름을 다시 채우는데 기름집 청년이 주입구에 잘못 꽂아서 기름을 한 바가지 바닥에 쏟았다. 참 한심한 청년이다. 미국 같으면 어디 이런 황당한경우가 있을 수 없는데 쏟은 기름값까지 지불하는 우리 입장은 생각도 않고 씩 웃고 말았다. 이런 일이 보통인지 임선교사는 아무 내색도 않았다. 기름을 넣고 길을 물으니 여기서 좌회전해서 한참 가면 촉칙칙이 나온다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길이 아니고 온 평원이 길이다. 전형적인 몽골의 길의 모습이다. 비가 오면 길이 움푹 패여서 가기 어려운 자기 맘대로 평원에 길을 내며 가고 이것이 또 다른 길이 된다. 어기는 이런 길에서 프루공을 몰아본 경험이 많아 곡예하듯이 차를 몰아가는데 옆에 앉은 내가 감탄할 정도였다. 문제는 8시가 지나니 해가 어두워지더니 완전히 그믐밤이었다. 달도 없고 깜깜한 길을 표지도 없는 험로를 배가 태풍속을 항행하듯 가는데 어기는 그래도 길을 잃지 않고 잘 갔다. 사막의 바람이 어찌나 거친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길을 가는데 앞에 사람 사는 마을의 불빛이 보여서 이제 다 왔나 보다 했는데 왠걸 1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밤에는 빛이 멀리 간다고 하더니 2시간을 운전하고서야 불빛이 보이는 곳에 도착해서 보니 개스 스테이션이었다. 여기가 촉칙칙인가 하여 에리카에 전화를 하고 개스 스테이션에서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었다. 마침 차가 한 대 있어서 청년에 물으니 여기는 촉칙칙이 아니니 다음 도시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 에리카에게 전화했더니 에리카가 이 곳까지 차를 가지고 왔다. 에리카의 차를 따라가는데 촉칙칙은 규모가 꽤 큰 도시이다. 황막한 광야에 세워진 도시인데 근처 최근 엄청난 유연탄 탄광이 개발된 타룬톨고이 때문에 생긴 신도시이다.
에리카는 원래 현재 딘지 교회에서 사는 바스카의 손녀로 이르틴 교회의 지도자였는데 남편이 타룬톨고이 광산에 취직이 되어 이 곳으로 이사 왔다. 마침 은행에서 대부담당직원을 모집하여 이에 응모해서 취직한 것이 이년전인데 벌써 진급해서 부서장이 되었다. 원래 게르에서 살았으나 은행에서 아파트를 한 채 제공해 주어서 게르는 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과거에 참 어렵게 살았는데 예수 잘 믿고 성실하게 이르틴에서 섬겼더니 하나님께서 곱절로 복을 주신 것이다. 촉칙칙에 도착해서 에리카가 교회로 사용하는 게르에 짐을 풀고 게르가 비좁아 지도자들만 거기서 자게 하고 임선교사네와 나는 푸르공 차에 자리를 펴고 눈을 붙이니 시간이 벌써 자정이었다. 새벽 5시 30분에 출발했으니 하루 왼종일 운전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