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30, 2014 자밍우드에서의 하루
오전 5시에 기상하여 인터넷을 사용하려고 앞방 문을 두드리니 소식이 없다. 그래 6시에 또 두드려도 소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단하여 오래 주무시나 보다 하여 포기하고 그동안 기록한 일지를 정리하는데 임선교사께서 전화기를 가져다 주고 갔다. Wifi를 켜놓고 인터넷을 시도하는데 어찌된 것이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포기하고 일지를 정리하는데 아침식사하라고 에스더 선교사가 불렀다. 함께 앞방에서 식사를 하며 왜 인터넷이 안되는지 연구하니 모비콤에 돈낸 것이 28일자로 끝나서 인터넷이 안되는 것이다. 에스더 선교사가 모비콤에 가서 돈을 내고 온다고 나간 후 임선교사와 함께 이것 저것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고비선교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전략을 세우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에스더 선교사가 돌아와 인터넷이 되기에 오랜 만에 급한 이멜 처리를 하고 1주일간 밀린 온라인 강의를 처리했다. 우리가 이렇게 쉬면서 밀린 일을 처리하는 동안 뭉크는 두 남자 지도자 어기와 다브가이와 함께 자밍우드 기차역 광장에서 전도하러 나가고 여자들은 모두 중국 이롄에 교회 비품과 다른 물건들을 구매하러 넘어갔다. 정오쯤 되니 뭉크가 자밍우드 교회 톡샤와 오르나를 대동하고 우리 방으로 왔다. 오르나에게 하탄볼락에서 만난 여의사 오트고와 울란바드라흐의 나사에 관해 얘기했더니 모두 자기 조카라고 하며 자신도 우리가 방문했던 하탄볼락 국민학교에서 선생으로 있었을 때 나사의 담임까지 했다고 했다. 오르나의 부친은 하탄볼락 출신이고 어머니는 울란바르다흐 출신이라 도르노 고비 주요도시에는 모두 일가친척이 있다. 이렇게 하탄볼락, 울란바드라흐, 자밍우드를 잇는 교회개척전략의 핵심이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오르나는 선생출신이라 공부를 잘해서 다르항 신학교를 우수생으로 졸업했으니 오르나가 하탄볼락과 울란바드라흐를 방문하여 조카들을 교육하고 교회를 시작하도록 인도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이들은 좀 있다 함께 이롄으로 가 물건을 해올 예정인데 가기 전에 우리에게 들렀다. 오르나가 복통이 심하다고 기도해 달래서 배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니 기뻐한다. 같이 온 톡샤는 자밍우드교회의 여자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작년 자밍우드를 방문했을 때 독감으로 반쯤 맛이 간데다 오른 쪽 귀가 완전히 먹은 지 여러 해라고 하며 내게 신유기도를 요청했었다. 당시 나도 여행 3주가 끝날 즈음이라 정신이 혼몽할 정도로 몸이 아파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을 때였다. 그런데 내 형편은 생각 않고 교인들이 하나같이 나만 보면 붙들고 기도해 달라고 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톡샤의 머리와 귀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독감을 치유해 주시고 무엇보다 안 들리는 오른 쪽 귀를 뚫어 주소서!”
“예수 이름으로 막힌 귀는 뚫릴지어다” 명했었다.
그런데 오늘 나를 보자 마자 안 들리던 귀가 그 때 기도 받은 후 좋아지더니 이젠 잘 들린다고 어린애처럼 자랑했다. 이 말을 들을 때는 그저 그렇거니 했는데 생각할 수록 부족한 내 기도를, 그것도 몸이 온통 엉망이라 마지 못해서 한 기도조차 들어 주셔서 막힌 귀를 뚫어 들리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몽골에서 내가 겪은 신유의 역사는 이 뿐이 아니다. 작년 몽골 동편 비렉호트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지도자 길오뜨로부터 재작년 내 기도를 받고 신장암이 치유되었다는 간증을 들었고 이로 인해 내 사역이 더욱 힘을 받았었다. 이 외에도 신유의 간증은 차고도 넘친다. 오르나가 뭉크와 같이 온 이유도 톡샤가 치유를 받은 데 힘입은 듯했다. 작년 선교여행시 임선교사께서 내게 하던 말이 생각난다.
“김목사님, 내년에 오시면 더 놀라운 간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냥 지나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역사를 목사님을 통해 행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적과 기사를 몽골 땅에 베푸심으로 내가 이 곳에 계속 올 수 밖에 없도록 강요하시는가?
자매들을 보내고 나서 방에 돌아가 한 숨 오수를 즐겼다. 어제 밤부터 어쩐 일인지 푹 쉬는데도 몸에 피로가 넘쳐 목구멍, 콧구멍이 바싹 마르고 열이 났다. 수천 마일에 달하는 열사의 광야를 닷새동안 주파하며 아무 데서나 눈을 붙이고 아무 것이나 먹으며 버틴 결과이리라. 길이란 것이 맨 땅이나 모래길이라 차가 나사가 풀려서 수시로 조여야 했으니 사람의 몸인들 충격이 없었을까? 몸의 관절이란 관절은 덜덜거리는 진동을 그대로 받아 나사가 풀리고 쑤셨다. 특히 나는 운전수 옆 조수석에서 햇볓을 고스란히 온 몸에 받으며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지평선을 계속 보며 왔으니 상황이 더욱 나빴다. 앞좌석 좁은 공간에 무릎을 오그리고 있었기에 무릎관절이 다 쑤셨다. 엉덩이 엉치뼈는 딱딱한 프루공 의자와의 마찰로 상처가 생겼는지 아파서 앉기조차 힘들었다. 메마른 광야, 먼지바람으로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길을 달리느라 몸에 수분이 부족하여 더욱 몸상태가 망가진 듯했다. 그래도 이미 시차적응도 끝냈고 괌에서 6개월동안 몸관리를 잘 한 덕분에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늦은 점심 겸 저녁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나서 거리를 산책하러 나갔다. 자밍우드도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라 저녁 6시인데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 작년 내가 이 곳에 왔을 때보다 자밍우드는 더욱 큰 발전을 했다. 곳곳에 없던 빌딩이 들어서고 건물신축작업이 한창이었다. 수년 내에 이 거리 일대가 모두 아파트 단지로 꽉 매워지리라. 몽골이라는 나라의 지정학적인 특성상 중국 물자에 의존할 밖에 없고 자밍우드는 모든 물자의 교차점이다. 울란바타르까지 기차가 연결되어 노선의 폭은 바뀌지만 중국의 철로로 바로 연결이 되니 중국의 물자가 이입되는 통로이다. 다른 길과 달리 울란바타르까지 포장이 제법 잘된 고속도로가 깔려 있어 우리의 남은 여정을 쉽게 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이롄을 전략적으로 개발하여 어마어마한 고층건물을 건설하고 거리는 8차선으로 깔아 놓아 북경까지 고속으로 달릴 수 있게 해 놓았다. 아직 이롄의 화려한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의 자밍우드이지만 계속 도시의 모습을 갖춰가는 것이 머지 않아 사막의 꽃처럼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하리라. 자밍우드 건설의 주역도 모두 중국 회사들과 노동자들이다. 몽골인들에게는 아직 기술도, 숙련된 인력도, 자본도 없기 때문이다.
막 시내 길목으로 들어 서는데 왠 젊은 아가씨가 만취했는지 비틀거리며 달리는 차 사이를 허우적거리며 건너는 모습이 우리 눈에 들어왔다. 그래 자세히 살펴 보니 위태롭기 그지 없었다. 임선교사께서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가던 길을 돌아서 이 아가씨에게로 가니 신발도 신지 않았고 얼굴을 보니 잘 되어야 18살이나 되었을까 한 애띈 모습의 몽골 아가씨였다. 에스더 선교사가 다가 가 “너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물었더니 에스더 선교사를 끌어안고 “엄마, 왜 나를 버렸어. 이젠 제발 날 버리지 마”하며 매달렸다. 아마 에스더를 자기 엄마로 착각했나 보았다. 만취한 입에서 나오는 말로 보아 고향은 훕수굴인데 울란바타르에서 인신매매범들에게 납취되어 자밍우드로 끌려와 중국사람들에게 팔려 가는 와중에 뛰쳐나온 듯했다.
많은 시골 처녀들이 시골의 열악한 환경이 싫어 수도인 울란바타르로 왔다가 쉬운 돈벌이가 있다는 말에 속아 이렇게 인신매매단의 밥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곳 자밍우드는 중국과 접경한 국경도시라 이렇게 인신매매범들이 아가씨들을 납취해다 중국 이롄으로 데려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고 했다. 아가씨가 얼굴이 곱고 몸매도 날씬한 것이 상품가치가 높으니까 울란바타르에서 데려온 것이리라. 신발을 안 신고 도망쳐 나오느라 발이 아프대서 임선교사께서 숙소로 가서 에스더 선교사의 샌달을 가져다가 신기려 했더니 이 아가씨가 손도 못 대게 하고 발버둥을 쳤다. 아마도 남자들에게 끌려 오며 온갖 행패를 당해서 남자라면 무조건 납취범으로 알고 무의식 중에 몸부림치는 것이리라. 넘어지려는 것을 내가 부축했더니 악을 쓰며 발광을 했다.
“엄마, 이 할아버지에게 나를 보내지 마. 중국사람 싫어.”
에스더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울부짖는 아가씨의 말이었다.
에스더 선교사가 이 아가씨를 부축하고 달래는 동안, 왠 메르세데스 벤즈가 우리 옆에 오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차안을 보니 화장을 진하게 한 여인 두 명이 타고 앉아서 우리가 데리고 있는 아가씨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추측컨데 이 아가씨를 잡아와서 억류하고 있던 곳에서 온 여인들로 이 아가씨를 도로 잡아가려고 온 것 같은데 우리가 있어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우리가 떠나면 즉시 이 아가씨를 데려 가려 온 것 같았다. 이 거리 건너편에에는 6층짜리 아파트 단지인데 5층은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매춘업이 성행하고 있는 곳이라 하는데, 아마도 그 곳의 포주들이리라. 이 시간 이후 시내에 배회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호객하러 나온 창녀들이라 했다. 우리가 이 아가씨를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경찰을 부르는 것 같으니까 슬며서 차를 빼고 사라져갔다. 우리가 처리하기에는 외국인으로서 입장이 난처한 지라, 자밍우드 교회 지도자 뭉크를 오게 해서 맡기고 자리를 떠났다. 외국인인 우리가 이러고 있는데 경찰이 오면 인신매매범으로 오해받기 쉽상이라며 뭉크가 빨리 자리를 비키라고 했다. 그래 자리를 떠나는데 우리 마음이 씁쓸했다. 자밍우드의 발전의 이면에 이런 어둠이 그 입을 벌리고 사람들을 삼키고 있는 것이다.
몽골이라는 나라의 슬픈 현실이다. 옆에서 누가 납치를 당해도, 매를 맞아도, 강간을 당해도 누구도 상관 않는다. 특히 연약해 보이는 여자들이 억울한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길거리에서 장 바구니를 빼앗아 가도, 카메라를 빼앗아도, 반항하는 여인의 얼굴을 후려쳐도 옆에서 도와 주기는 커녕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다. 울란바타르에는 선교사들 사이에 봉변 당한 이야기가 많다. 여자 선교사들이 장바구니 빼앗기고, 카메라 빼앗기고 반항하다 얼굴을 얻어 맞아 광대뼈가 부러진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에스더 선교사도 이런 경험을 당했다. 이르틴에서 장을 보고 오는데 왠 덩치 큰 술 취한 남자가 뒤에서 콱 끌어안아서 세 번이나 양팔꿈치로 가격하고서야 벗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장바닥에 사람들이 득실거렸음에도 아무도 도와 줄 생각도 않고 방관하기만 했다. 그야 말로 도덕도 의리도 없는 무법천지이다. 약자가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약탈문화의 비정한 모습이다. 그래 이 곳에서는 항상 눈을 똑바로 뜨고 인상을 콱 쓰면서 거리를 걸어야지 그렇게 않으면 와서 시비를 걸고 가진 것 다 빼앗아 가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이현호 선교사는 이 곳에 처음 와서 1개월만에 체중이 5 킬로가 빠졌다고 한다. 길에 나갈 때마다 얼굴에 힘을 주고 걸어야 하는 것 이 한 가지 때문에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쌓여서 그리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아니면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민족 가운데 하나가 몽골인이다. 성질 급하고, 자존심과 고집은 이유없이 세고, 외국인이라면 무조건 적대의식을 가지고 대하고, 약속 어기는 것을 식은 죽 먹기보다 더하고, 생산성과 숙련도가 워낙 떨어져서 일을 시킬 수가 없고, 무엇 하나 끝장을 보지 못한다. 도시 논리도 법도 통하지 않는다. 결점을 들라면 끝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지 모르겠다. 오늘의 몽골인의 모습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 와서 겪었던 우리 한국인의 모습과 판박이로 닮았다. 한국인도 기독교가 들어와서 의식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에게 먹혀 들들 볶이지 않았다면, 육이오의 참혹한 전화가 없었다면, 박정희 정권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비전을 제시하고 강압적으로 국민들을 훈련시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민족으로 변모시키지 않았다면 과거의 한심한 모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최하등국가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문창국 장로가 온누리교회에서 강연한 내용 가지고 한국 국회에서 문 장로를 난도질했지만 문 장로의 말 중에 틀린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우리의 과거가 한심했던 것을 듣기 싫어하는 우리의 용렬한 사고가 우리의 발전을 막는다. 이웃 나라 일본이 과거사 정리를 않는다고 우리는 곧잘 흥분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대하다. 미화한다고 추한 과거가 사라지는가? 아니 우리는 과거의 우리의 모습에서 얼마나 발전했는가? 아직도 과거의 추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부분적인 긍정이다. 몽골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들이 우리의 거울임을 다시금 인식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우리의 경계로 삼아 이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칭키스칸이 이런 몽골인들을 데리고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데는 칭키스칸이 강력한 독재를 한 데 기인했다. 군율을 엄하게 세우고 조금이라도 군율을 범하면 가차없이 목을 베어 군율을 세웠기에 몽골 군대를 강군으로 탈바꿈시켰다. 이것이 바로 칭키스칸의 위대한 리더십이다. 오늘 날 몽골의 문제는 이렇게 강력한 독재자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만일 몽골 대통령이라면 나라의 법을 세우고 약자와 외국인을 보호하는데 우선적으로 힘을 쓸 것이다. 필요하다면 칭키스칸처럼 이렇게 범법행위를 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하는 과감한 개혁으로 법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부정부패도 예외가 아니다. 장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쫓겨가서 최우선으로 삼은 것이 부정부패 척결이다. 그래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정부패는 극형으로 다스렸다. 심지어는 자신의 며느리마저 극형으로 다스림으로 법을 세웠다. 몽골의 부의 95퍼센트 이상을 5퍼센트 미만이 독식하고 있고 이들은 바로 정권을 잡은 자들이라고 한다. 아무리 자원이 풍부해도 무얼하는가? 이러고서는 이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 부정부패방지청까지 따로 만들어서 이를 막으려고 하고 있지만 과연 이를 강력하게 시행할 만큼 청렴결백한 지도자가 언제 등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