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7일 이르틴에서 다르항까지
다르항으로 가면 이제 이르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아침부터 세 사람 모두 짐을 꾸리는데 가야 할 곳이 여러 곳이라 짐이 장난이 아니었다. 날씨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거기에다 다르항과 중하라는겨울날씨인데 자밍우드는 찌는 듯한 여름날씨라니 꾸릴 것이 더욱 많았다. 고비사막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하기에 사막용 장비도 챙겨야 했다. 변압기까지 챙기니 내 가방이 쇠덩어리 같았다.
짐을 꾸리고 나서려는데 명희 선교사에게 전화가 왔다. 자로갈랑교회 지도자인 슈세가 김 박시(박시란 말은 목사, 교수, 의사 등에 사용하는 존칭이다.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에게 드릴 것이 있다고 들르겠다고 했다. 조금 기다리니 슈세가 와서 내게 너무 쉽게 (몽골어로 “얼굼치테”) 신학강의를 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며 몽골산 다이어리를 한 권 선물했다. 보니 미국에서도 보기 힘들게 고급으로 만든 다이어리였다. 내가 계속 노트에 일지를 기록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이 다이어리를 구입해 온 것이다. 임선교사 말씀이 몽골에서 11년째 사역하지만 이렇게 다이어리를 선물받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슈세는 나이가 70세인 자매로 머리가 썩 좋지는 않다. 자로갈랑교회를 맡아 사역하기 때문에 교육을 시키려 다르항에 있는 우리 신학교에 보내려 해도 한사코 가지 않았다. 왜냐 하면 정규신학교육하듯이 가르치니 도시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내 강의를 들으니 그동안 답답했던 부분이 탁 트이게 이해가 되어서 그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몽골 현지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서구식 신학교육을 무리하게 하는 신학교들의 애로가 여기에 있다. 나는 2008년에 처음 몽골에 왔을 때에 사람들을 만나본 후 즉각 몽골에서 서구식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 절감했다. 세 번의 몽골선교여행을 통해 내가 시도했던 것은 완전히 새로운 신학교육 방법이었다. 기존 신학교육체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성경위주로 직접 교재를 만들어서 가르쳤다. 해결해야 할 과제는 어떻게 하면 몽골의 지도자들에게 맞는 맞춤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고심 끝에 가장 쉽게 하면서도 신학전반과 목회에 관해 필수적인 부분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슈세가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다면 내 시도가 성공한 것이다. 슈세의 말을 들은 내 마음이 어떠했을지 여러분은 짐작하실 것이다. 선생은 학생이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고 사용하면 가장 기쁜 것이다.
슈세가 떠나고 나서 기분 좋게 짐을 챙기는데 딘지 교회에서 게르를 치고 사는 바스카 할머니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손녀 바담에게 전달해 달라고 과자, 아롤 등 음식을 한 보따리 가지고 왔다. 바담이는 그동안 이르틴 센터와 딘지 교회의 주일학교를 맡아 가르치다가 한국대학에 진학했다. 어제는 내 아내와 내가 차를 탈 때에 따뜻하게 하라고 양털로 짠 방석을 두 개 선물하시더니 오늘은 손녀에게 줄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런 농산물 반입은 불법이지만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마음인 것을 어찌하랴. 가방에 넣으니 무게도 무겁고 부피도 상당했다. 그래저래 이 할머니가 주신 선물만 해도 한 가방이다. 일단 한국에 가지고 가서 공항에서 압수 당하면 할 수 없지.
바스카가 떠나고 나서 짐을 차에 싣기 시작했다. 나가서 하늘을 보니 구름이 불길하게 휘날리고 온갖 새들이 하늘을 빠르게 비행하는 것이 일기가 급작스럽게 불순해질 징조가 보였다. 그러나 어떡하랴. 갈 길이 멀지만 가야 할 길이니 그냥 출발할 수 밖에. 짐을 일부 싣고 숙소에 다시 올라오니 명희 선교사가 자로갈랑 시장부인이 잠깐 들르겠다고 하니 기다리라고 했다. 이 분은 2008년 8월에 내가 몽골에 왔을 때 임선교사와 함께 방문하고 전도와 의료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던 시장의 부인이다. 자로갈랑에 교회를 개척하는데 수훈 갑인 분이다. 마침 시장이 임선교사 숙소 근처에 살고 있어 이 후 명희 선교사와 친구가 되었다.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도 안되기는 하는데 명희 선교사를 좋아해서 걸핏하면 먹을 것을 싸가지고 와서 방문한다고 했다. 오늘도 손님이 왔다니까 우유 한병과 애이락 한 병을 싸 가지고 와서 가는 길에 먹으라고 내놓았다. 명희 선교사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바로 누구든 1초만에 친구로 만드는 재주이다. 임선교사의 교회개척사역이 활발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동안 내 집처럼 정들었던 숙소를 뒤로 하고 이르틴을 떠나 다르항으로 가는 국도를 달리려니 좌우로 펼쳐지는 밀밭이 장관이었다. 다르항 주변은 몽골의 다른 지역에 비해 강우량이 두 배가 넘는데다 여름 햇볕이 강렬해서 밀재배에 그만이다. 광활한 초원을 모두 개간하여 밀밭으로 만들었는데 황금빛 이삭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가을의 풍요를 가슴 깊숙이까지 느끼게 했다. 대부분 기업영농으로 트렉터와 훼이로더 등 최신 장비를 동원한 최신영농이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밀농사가 대풍작이다. 이미 대형 훼이로더로 밀수확이 한창이었다. 몽골은 원래 식량을 중국에 의존했던 나라인데 작년에는 밀농사가 풍작이라 수출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초원을 밀밭, 감자밭으로 바꾸다 보면 이 나라가 목축업 위주의 국가에서 농업국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먼 훗날이 아닐 것이다.
4시간 여 초원을 달리니 다르항이 다가왔다. 벌써 네 번째 방문하는 도시라 낯설지도 않고 오히려 정겹기만 했다. 다르항은 공산당의 뿌리가 가장 깊은 도시 중 하나이고 우상숭배가 가장 성한 곳이기도 하다. 다르항 시가지 중앙에는 거대한 불상이 그 모습을 뽐내고 있어 도시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이정표 노릇을 하고 있다. 교회 핍박도 그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이번에 새로 시장이 된 사람의 선거공약이 교회수를 반으로 줄이고 모든 외국인들을 쫓아내겠다는 것이었다니 말 다 했다. 이 사람 현재 자신이 선거에서 공약한 대로 시행하고 있다. 그 여파는 우리 교단선교사들에게 고스란히 미쳤다. TV에서는 외국인들이 모든 부동산과 사업을 차지하여 몽골인들의 부를 빼앗았다고 비난하는 방송이 한창이다. 정부의 모든 실책과 부패를 외국인 탓으로 돌리기 위한 대중선동의 일환이다. 러시아인에게서 배운 공산주의의 전형적인 술책이다. 다르항은 원래 러시아인들이 지배하던 당시 몽골의 중화학 공업의 본산이었으나 러시아인들이 물러가면서 시장성이 없어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한 때는 몽골의 두번째 대형도시로서 살기 좋은 곳이었으나 러시아인들이 물러감으로서 가장 가난한 도시로 전락했다. 이르틴 같은 도시는 35년전 동광산개발로 매년 6억불의 순익이 10만의 인구를 흥청망청 소비문화로 몰아넣었으나 상대적으로 이런 호재가 없는 다르항의 빈곤은 더욱 크게 체감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런 대중선동을 하여 인기를 끌려 하는 것이다. 외국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서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가능하면 외국인들을 들볶아서 다르항시에 금전적인 기여를 더하게 하려는 술책이기도 하다.
교단 신학교를 다르항에서 운영하는 데오렌 박사와 마크는 교회허가 갱신이 되지 않아 이미 비행기표를 사서 내주 초에 떠나기로 되어 있다. 이 분들은 몽골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 듯했다. 우리와 대책을 논의하지 않고 그냥 방콕행 비행기표부터 사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마음도 산란하고 짐 싸느라 정신 없을텐데 찾아가서 번거롭게 하기 싫어 연락을 않고 CAMA에서 의료사역을 하고 있는 닥터 팸 부부에게 연락하니 저녁을 준비해 두었다고 바로 오라고 하셨다. 교단 소유의 아파트 중 하나인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두 분 댁에 가서 진짜 월남국수를 대접 받았다. 이 분들은 원래 월남출신이라 내가 올 때마다 초대하여 월남음식을 대접하신다. 우리 교단의 임준호 선교사 시절부터 이 곳에서 15년간 사역하신 신실한 일꾼이다. 내년 3월 은퇴인데 만일 CAMA도 허가연장이 되지 않으면 금년 11월에 조기은퇴하시고 몽골을 떠나야 한다. 식사 후에 이 모든 어려운 상황에 관해 협의하고 함께 기도하고 나오는데 입구 다용도실의 유리창이 깨져서 종이를 붙여 놓았다. 왜 이렇게 했느냐 물으니 얼마전에 토네이도가 와서 창문을 모두 박살내고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용도실의 유리까지 깨고 집 반대편 창문을 깨고 나갔다고 했다. 마침 이 분들이 집에 없을 때에 일어난 일이라 인명피해는 없었다니 다행이다. 다르항에는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분다. 벌써 7년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르틴에 대형불상이 세워진 것처럼 원래 몽골 제2의 도시였던 다르항 중앙에는 대형불상이 있어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다. 우리 선교사들이 이를 보고 마음이 답답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던 중 토네이도가 불상을 쳐서 목이 댕강 부러졌다. 물론 시 당국이 다시 이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 우상을 섬기는 마음은 극진해서 다르항 시 예산의 상당부분을 우상보존에 낭비한다고 했다. 이르틴도 그러하지만 다르항도 영적 분위기가 암울하기 짝이 없다. 특히 교회 핍박의 정도는 이르틴을 훨씬 능가한다.
저녁식사 후 임선교사와 함께 몽골어 연수를 받아 다르항에서 11년째 사역하는 S목사님 댁을 방문하기로 해서 함께 다녀왔다. 이 분도 이번에 비자만료일인 9월 10일 이전에 교회허가연장이 불가능하여 출국을 해야 한다. 말씀을 들으니 이 때문에 최근에 울란바타르를 떠난 한국 선교사만 해도 23가정이라 했다. 몽골정부는 외국선교사들을 다 쫓아내기로 이미 작정했다. 작년 국회를 통과한 법령에 의하면 한 명의 선교사 비자를 Sponsor 하려면 교회가 최소한 20명의 직원을 고용해야 하며 한 선교사가 5년이상 몽골에 체류할 수 없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직 이를 적용하여 추방하지는 않았으나 조만간 시행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교회가 무슨 사업체도 아니고 20명의 직원을 고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말은 곧 모든 외국인 선교사를 쫓아내겠다는 말이다. 이와는 별도로 금년 5월에 선교사를 Sponsor 한 교회는 허가를 연장하지 않도록 훈령을 시달했다는 것이다. 현재 일어나는 사태는 이러한 상황의 연장이다.
S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기도한 후 그 분 아파트를 나서니 바깥 날씨가 장난이 아니다. 태풍이 몰아치고 먼지바람이 아파트 단지를 뒤덮어서 눈뜨고 걷기도 힘들었다. 공중에는 휴지조각 쓰레기가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배회하는데 함석조각이라도 섞여 있으면 엄청나게 위험할 상황이다. 머리를 덮어쓰고 가는데도 입안에 모래가 서걱거리고 날씨는 완전히 겨울날씨이다. 먼지폭풍 속을 뚫고 한참을 걸어서 우리가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오니 벌써 시간이 밤 10시가 후딱 넘었다.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서면서 보니 식탁도 의자도 TV도 어째 모두 안면이 있다. 명희 선교사의 얘기를 들으니 이 가구들이 모두 임선교사네가 과거에 사용하던 것이라 했다. 내가 2008년에 이르틴에 갔을 그 때에 사택에 있던 것이라 내 눈에 익었던 것이다. 몽골은 나무가 귀하기 때문에 이런 나무가구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떠날 때에 모든 가구와 심지어는 집까지 후임선교사에게 주고 떠난다. 임선교사네는 당장 필요가 없는 가구는 모두 이렇게 전체의 필요를 위해 내어놓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이다. 가구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옷이고 신발이고 음식이고 간에 있는 대로 다 주어버린다. 하나님께서 또 공급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주셨다.
내일 중하라 가는 길은 엄청나게 험한 길이라는데 이런 날씨에 갈 수 있을 지 걱정이다. 중하라는 임선교사가 8년전에 가서 13명를 침례함으로 시작한 교회이다. 당시는 다르항에서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곳이라 한 겨울에 험하디 험한 길을 갔다가 죽을 뻔 했다고 했다. 땅인 줄 알고 가다 보니 그것이 얼음으로 덮인 강 위였다. 얼음이 깨졌으면 그대로 수장될 뻔했다. 침례주러 가는 곳이 너무 험하여 차로 갈 수 없어 서투른 승마솜씨로 말을 타고 갔는데 얼마나 위험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 때 세례받았던 13명 중 한 사람이 이번에 세미나에 와서 교육 받았던 같치찌 자매이다. 내일 아침 일어나자 마자 나서서 정오에 드리는 예배에서 내가 설교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험한 길 무사히 가서 새로 일어나는 이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을 전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눈을 붙이기 전에 일지를 실으려 휴대용 모비콤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려다 어찌나 느린지 도저히 올릴 수가 없어 포기하고 잠자리에 드니 벌써 자정이 훌쩍 넘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