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8일 다르항에서 중하라, 그리고 울란바타르
어제는 밤늦게까지 인터넷을 시도하다가 일기불순 때문인지 아무 것도 되지 않아 결국 자정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잠을 좀 깊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왠 얼람이 계속 울려서 결국 항복하고 나오니 시간이 아침 6시였다. 결국 다섯 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항상 아침마다 이렇게 깨우는 주범이 누구인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명희 선교사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얼람을 해 놓은 사람은 나몰라라 잘 자고 엉뚱한 우리는 잠 못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이왕 일어난 것 다시 인터넷을 시도했으나 도저히 안되어서 포기했다. 항상 하는 아침운동을 하려는데 임선교사께서 나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래 아예 건강관리사로 직업을 바꾸었다. 임선교사의 배가 작년보다 더 복스럽게 나와서 함께 다니는 동안 덜 복스럽게 바꾸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명희 선교사의 명령이었다. 좀 격렬한 아침운동끝에 가져온 빵과 차로 아침식사를 하니 음식이 절로 들어갔다. 일기가 불순하여 중하라 가는 길이 험할 것을 대비해서 아침일찍 오전 8시 30분에 밖으로 나오니 밤새 눈도 내려서 땅바닥이 뿌연데다 바람은 여전히 드세다. 거기다 찬 비까지 뿌려대니 이거 완전 한겨울날씨가 온 것같았다.
불안한 마음을 주저앉히고 랜크루즈를 끌고 다르항을 벗어나 국도를 달리는데 길 좌우에 추수를 기다리는 밀밭이 눈을 배부르게 했다. 참 몽골이란 나라는 여러 모로 복받은 나라이다. 농사만 지어도 최소한 3천만은 충분히 먹고 살 것이다. 거기에다 드넓은 초원이 있으니 가축을 치기에 그만이요, 덤으로 엄청난 광산자원이 도처에 미개발상태로 놓여 있으니 세상에 이렇게 풍요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몽골에는 얼어죽는 사람은 있어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 포장된 국도를 40 킬로 정도 달리니 바롱하라가 나왔다. 바롱하라에도 우리 교회가 있다. 바롱이란 말은 오른 쪽이란 뜻이고 하라라는 말은 강이란 뜻이다. 셀링게 강이 이 도시의 오른 쪽으로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에 중하라라는 말은 셀링게 강이 이 도시의 왼쪽으로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은 왼쪽이란 말이다. 몽골어에는 강이란 뜻의 단어가 세 가지가 있다. 제일 깊고 넓은 강을 “무롱”이라 하고 이보다 약간 작은 강을 “하라”라고 하며, 가장 작은 내를 일컬어 “골”이라고 부른다. 바롱하라 교회는 과거 김재호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로 수흐바타르 교회와 중하라 교회와 함께 다르항에서 관리하던 곳이다.
바롱하라에서 중하라로 가려면 국도를 벗어나 왼쪽을 꺾어서 비포장도로로 진입해야 한다. 험한 산길을 양장구절 굽이굽이 돌아 가야 중하라가 나온다. 어찌나 길이 험한지 도시 속도를 낼 수 없어 차가 엉금엉금 기었다. 길은 어찌나 굴곡이 심한지 차바퀴가 빠질 것처럼 터덜거렸다. 길만 좋다면 40분이면 도착할 곳을 기어서 가니 3시간여가 소요되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상황일 때 이야기이다. 한번 차가 빠지면 언제 나올 수 있을지 세월이 없다. 임선교사네가 다르항에서 언어연수를 받는 동안 이 곳에 와서 살다시피 하며 가가호호 문을 두드려 전도하여 주말에 300명의 주민들이 몰려와서 교회가 시작된 곳이다. 2004년에 개된 교회이니 벌써 8년이 넘었다. 이를 위해 전도팀과 함께 중하라를 오가던 모험담을 모으면 한 권의 책은 충분히 될 것이다. 생명을 잃을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차바퀴가 망가져서 오도 가도 못하고 15시간을 울란바타르에서 바퀴를 구해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이런 고생 끝에 처음으로 개척했던 교회라 더욱 애착이 가나보다. 그래서인지 중하라 교회와 관련된 명희 선교사의 간증은 끝이 없었다.
비록 길은 험하지만 경치 하나는 일품이다. 사방이 산인데 산 아래 푸른 초장이 비단처럼 펼쳐져 있고 셀링게 강이 여러 갈래로 흘러 들판을 적신다. 작년 볼강 근처 오르콘 강 유역에 자리잡은 두슈눅을 가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적이 있는데 중하라도 이에 못지 않았다. 거기에다 도시인지라 그 규모가 장대했다. 곡예하듯 차를 몰아가니 앞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중하라의 모습이 들어오고 입구에서 “오보” (한국의 서낭당 같은 것으로 마을 입구마다 있다)와 표지판이 우리를 맞는다. 보통 보는 오보 외에 청색천을 위 아래로 두른 몽둥이처럼 생긴 바위가 특이하다. 몽골에 박사인 명희 선교사도 무언지 모른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한국에 있는 남근상인 듯하다. 오보 옆에는 큰 바위에 “만달” (석양이란 뜻의 몽골어)이라고 크게 쓰여져 있다. 이 지역의 석양이 너무 아름답다는 데서 기인한 중하라의 공식지명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기는 하나 갈 길이 급하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차를 세우고 사방을 돌아 보니 사진을 찍으며 보니 지나가는 차들이 오보와 표지판이 있는 일대를 한 바퀴 돌고 지나갔다. 원래 오보를 시계반대방향으로 세 바퀴씩 돌며 복을 비는 것이 관습이지만 차 기름도 아깝고 하니까 한 바퀴만 돌고 가는 것이다.
눈을 들어보니 장중하게 용자를 뽐내는 산밑에 마을들이 그림처럼 깔려 있었다. 산위로는 검은 구름이 중하라를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 싸고 있고 마을 앞 초원에는 말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말 무리 옆에는 이제 곧 남쪽으로 날아갈 황새떼가 초원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줏어먹고 있었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철로와 높은 시멘트 담으로 둘러 싸인 중범자 감옥이었다. 중하라를 본 내 인상을 네 단어로 표현하자면, 경치, 농사, 감옥, 술공장이다. 풍부한 수량으로 밀, 감자, 야채 농사가 성행하는 축복의 도시이기 하지만, 중범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이 위치한 곳이다. 바로 딘지 교회의 쵸카의 막내아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다. 몽골 어디를 가든 보이는 “하라”라는 술 브랜드가 있는데 바로 중하라에서 생산되는 술이다. 인구 4만 정도의 도시로 울란바타르, 이르틴, 다르항, 무룬, 쵸이발산과 함께 몽골 5대도시이다.
시가지로 들어서니 엉성하긴 하지만 시멘트 포장이 된 길이 깔려 있고 이르틴에서 내려오는 철로와 기차역이 보였다. 중하라교회는 철로역에서 가까운 큰 길 가에 있는데 러시아 인들이 약 75년전에 지은 건물이다. 명희 선교사가 8년전에 2500불을 주고 산 건물인데 그동안 기반이 침수되어 벽에 크랙이 크게 가고 천정이 망가진 상태였다. 지도자인 간치찌가 시에서 보낸 공문을 몇 가지 가져와서 살펴 보니 시에서 이 건물이 곧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양쪽 담과 천정과 바닥을 새로 보수를 하라는 경고장이었다. 지난 주 순복음교회의 팀이 Vacation Bible School 을 이 곳에서 인도했는데 아이들 30여명이 찬양을 불러대니까 천정이 갈라지며 시멘트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 간치찌의 남편에게 물으니 담을 보수하는 데만 해도 미화로 4만불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임선교사는 이런 건물을 그 값에 수리하느니 차라리 팔아버리고 근처 침수되지 않는 곳에 땅을 사서 새로 건물을 짓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내가 보아도 그러했다. 어찌됬던 중하라 교회의 부흥을 위해 시급한 것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교회건물을 옮기려면 적어도 4만불 정도는 있어야 할텐데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 일을 이루어주실 줄 믿는다. 임선교사는 아무래도 현재 상태로 예배를 드리기에는 건물상태가 위험하니 마당에 게르 (이동식 천막집)를 치고 예배를 드리게 해야겠다고 했다. 어차피 이 교회를 관리하던 다르항 선교사들은 비자문제로 출국하기 때문에 임선교사가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곳에 와서 교회수리와 부흥을 위해 투자해야겠다고 했다.
예배시간인 정오가 되어서 임선교사 인도로 예배를 시작하니 성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회 크기가 워낙 협소하여 많은 인원이 함께 예배드릴 수는 없으나 열명 정도의 성도가 아이들과 섞여 앉아 예배를 드렸다. 바로 지난 주에 Vacation Bible School 을 했던 아이들이었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어찌나 진지하게 예배에 임하는지 은혜가 되었다. 열두해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마가복음 5장 말씀으로 내가 말씀을 증거하니 앞에 앉았던 몸 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매의 눈이 반짝거렸다.
예배후 기도 받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물었더니 이 자매가 먼저 나왔다. 나이가 26세된 처녀인데 교회 바로 건너편에 사는 자매이다. 왼손을 만져보니 어깨부터 손 끝까지 굳어서 손이 말려 올라갔고 얼굴에는 고통의 빛이 역역했다. 안수하고 기도하며 왼손을 굽혔다 폈다 하니 큰 무리없이 되었다. 아마 이 자매가 이렇게 왼손을 쓸 수 있는 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자매가 어떻게 기뻐하는지. 지금까지 자기 손이 나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못하다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느끼고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나도 이상한 체험을 했다. 날씨가 추워서 옷을 겹으로 껴입고 예배를 드렸는데 이 자매를 위해 안수기도하는 도중 온 몸에 열이 올라 도저히 더워서 견딜 수 없어 겉옷을 다 벗어야 했다. 이 자매의 안수기도를 끝내니까 자매 한 분이 또 나왔다. 이 자매도 중하라 교회 시작부터 함께 한 신실한 자매인데 갑상선 기능저하로 고생한다고 했다. 갑상선 문제는 나도 고생했던 친숙한 문제이다. 그래 기도하고 나니 간치찌가 12살된 손녀를 데리고 왔다. 간치찌는 딸이 여행사에서 일하여 월 100만 뚜구루 (미화 700불 정도)를 받아 자기 딸을 키우는 엄마에게 월 30만 뚜구루를 보내서 생활한다. 이 손녀는 예쁘고 착하기는 한데 12살 치고는 몸이 너무 작았다. 그래서 물으니 선천적으로 심장에 구멍이 있어 항상 통증으로 고생한다고 했다. 아이의 심장에 손을 엊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아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다. 기도하고 나니 아이가 천사 같은 웃음을 내게 보냈다. 몸이 어떠냐고 했더니 가슴에 통증이 없어졌다고 기뻐했다. 예배를 끝내고 안수기도까지 하고 나니 시간이 벌써 오후 2시가 되었다. 울란바타르 갈 길이 멀기에 나오려 하는데 간치찌 부부가 마실 차와 먹을 거리를 내어 놓고 먹으라고 권했다. 이런 상황에는 아무리 갈 길이 급해도 같이 먹고 가야 한다. 그래서 빵 한 조각과 차를 마시고 길을 나섰다.
원래 임선교사는 국도가 있는 바롱하라로 다시 돌아가서 울란바타르로 가려 했는데 간치찌의 남편이 그렇게 하면 너무 돌아간다고 질러가는 길을 알려 주어서 길을 가는데 처음 가는 길이라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하기는 했지만 큰 문제없이 울란바타르에 도착하니 오후 6시 30분이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