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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한민족과 셈족 특히 아브라함을 연결시키려는 일부 교계인사들의 주장이 비성경적이며 비논리적임을 입증하고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 제시하는 것이다. 이 설은 김성일 씨에 의해 국민일보 등 신문기사와 서적을 통해 세간에 많이 알려졌는 바, 이 설의 주장자들은 주장의 근거를 한민족과 셈족의 문화적인 동질성과 그두라와 그 자녀들이 동방으로 갔다는 창세기 2장의 기록에서 찾는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이들의 소위 두 가지 근거를 분석, 비판함으로서 그 허구성을 입증하겠다. 이 논문은 4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번 째는, 한민족이 셈족이라는 김성일 씨의 주장과 그 두 가지 근거를 그대로 제시하겠다.  두번 째는, 이 두 가지 근거에 대해 성경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분석, 비판하겠다. 세번 째는,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지 필자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서 논문을 마무리짓겠다.    

          먼저 한민족이 셈족이라고 주장하는 김성일 씨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김성일 씨는 그의 소설 “홍수이후”에서 하노스란 가상의 주인공이 니므롯의 양아들로 지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동방으로 와서 그 아들인 단군왕검에 이르러 단군조선을 건국하게 된다는 가설을 내세우더니 급기야는 그것을 역사적인 사실인 양 선전해 왔다. 특히 하노스와 성경에 나오는 에벨 (창 10:25) 두 사람을 사촌형제로 등장시키고 하노스의 아들의 이름을 단으로 한 것을 따라 에벨은 자신의 둘째 아들의 이름을 욕단 (김 성일씨의 해석에 의하면 작은 단이란 뜻)으로 지어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지만 후손끼리 자신의 동질성을 보존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한민족이 셈족이라는 근거로 김씨가 제시하는 증거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첫째, 중동인과 한국인의 문화적인 동질성이다. 그들은 둘 다 가부장적 제도를 고수하고 있고 또한 주택구조가 서로 비슷하다. 특히 사랑채와 안채의 위치와 용도가 비슷하다. 이미 말한 대로 김씨는 욕단과 단, 아라랏과 아리랑을 연결시켜 서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한자에 나타난 구원의 도리를 보면 한자의 배경에 양을 희생으로 바쳐 제사 지내는 속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바, 이는 한자의 배경에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던 셈족의 제사습관이 깔려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타민족과는 달리 한민족은 이미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민족이란 사실이 한민족이 셈족의 후예임을 증거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김씨는 "홍수이후"의 후기에서 단군왕검의 팔조법금이 모세의 십계명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도 한민족이 셈족의 후예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둘째, 성경에 동방으로 간 셈족의 후예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성경에 동방으로 간 셈족의 후예들에 대한 기록이 두 번 있는 바, 첫번 째 이동해 온 무리는 현재의 몽골족이며 300년 후 두 번째로 이동해 온 아브라함의 후손이 한민족이라고 주장한다 ("홍수이후"에서는 이 순서를 뒤 바꾸어서 이야기했음). 첫번 째, 셈족의 이동의 근거를 김씨는 창 10:25-32에서 찾는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웹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백성이 나뉘었더라 (창10:25-32)

             김씨는 이로부터 약 300년 후 두번 째 셈족의 후예의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창세기 25장에 나온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욕산과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창25:1-6)

             김씨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후처의 아들들과 부디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후처 그두라의 아들들을 동쪽 나라로 보냈는 바, 그두라의 아들 중 시므란과 므단과 이스박은 그 후 성경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두라가 그 세 아들을 데리고 동방 즉 한국으로 옮겨 갔을 가능성이 많으며 그두라는 아들들을 지휘할 정도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활동적인 여성으로 바로 고구려의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같은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말과 활에 능하고 진취적인 여성이 국면을 이끄는 고구려적 성품은 바로 그두라에게서 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김성일씨의 주장을 가감없이 요약했다. 이제부터는 김성일씨의 주장의 두 가지 근거인 문화적인 동질성의 문제와 그두라와 그 자녀들이 동방으로 갔다는 기록에 대해 상고함으로서 김성일씨의 주장의 허구성을 입증하겠다.  

             첫째, 소위 셈족과 한국인의 문화적인 동질성의 문제에 대해 상고하겠다. 먼저, 가부장적 제도는 셈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부족사회의 경우 전 세계에 공통된 것으로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오지에도 동일한 제도가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가부장적 제도와 마찬가지로 주택의 구조에 관해서도 이것이 무슨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기후조건에 따라 주택구조는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벨렉의 동생 욕단의 뜻도 작은 단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작다"는 단어는 "카단"인 바, 욕단은 "요"와 "카단"의 합성어로 풀이될 수 있고 그렇게 보면 욕단은 단지 "그는 작다"를 의미할 뿐으로 벨렉보다 늦게 난 동생이란 뜻일 뿐이다. 단과 욕단을 연결시키는 것은 그야 말로 한국말로 셈족 언어를 풀이하는 황당한 경우이다. 아라랏과 아리랑을 연관시키는 것도 기발한 소설가의 상상력이지 과학적인 사고가 결코 아니다.      

          유일신 하나님의 개념이 한국에 있었다는 주장도 우리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란 개념은 성경적인 유일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우리 고어의 한알 혹은 한울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주를 큰 알로 본 것이며 우주 자체를 신격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조물주의 개념과 한알 (울) 님의 개념은 별개의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한알(울)님의 개념은 타민족들에게도 있었던 흔한 개념이다. 조물주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기독교와 함께 우리 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한자에 얽힌 구속의 개념은 흥미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도 두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첫째, 제사법은 성경과 셈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고대 희랍의 문학을 읽어보라. 구약의 제사법과 너무도 비슷한 제사가 얼마나 보편화되어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러한 제사법이 유일신 하나님과 관련 없이 잡신들과 관련된 것이 다른 종교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결코 한자의 근원이 셈족의 유일신 신앙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단군왕검의 팔조법금과 모세의 십계명의 내용 비교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유일신 사상 외에는 십계명 내용은 어느 문화에나 공통적인 도덕율이라는 사실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것,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공자, 노자, 맹자 등 중국 성현의 책 어디에나 있는 가르침이 아닌가? 비근한 예로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의 법금들은 그 내용이 하나같이 비슷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비슷하다고 해서 서로 간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는 없다.    

          이상에서 필자는 김성일씨의 주장의 근거 중 소위 문화적인 동질성에 대해 비판하고 그것 만으로 한민족과 셈족을 연결시킬 수 없음을 입증했다. 다음은 김성일씨가 성경적 근거라고 제시한 그두라와 그 자녀들이 동방으로 갔다는 창 2장의 성경기록에 대해 상고하겠다. 김씨가 드는 성경적 근거야 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부분이다.  

             첫째, 창세기 10장의 욕단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에 대해 살펴보자. 욕단의 아들들이 거한 곳이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라고 했지, 그것이 끝없이 동방으로 갔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김씨는 동쪽이나 동방이란 말만 나오면 한국으로 착각하고 있다. 참고로 욕단의 아들들의 이름들은 어원이 현재의 아랍어에 나오는 지명이나 인명과 일치하며 욕단의 후예들은 현재의 아라비아에 그 거처를 정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당시 성경에서 동쪽이라 하면 아라비아를 지칭했다. 셀렙은 현재 예멘 족속인 살라프가 거주하는 실립과 동일하며, 하살마펠은 예멘 동쪽의 하드라못과 일치하며, 예라는 달이란 뜻으로 남 아라비아 지방의 신의 이름이며, 하도람은 현재 요르단 북부에서 살던 부족의 이름으로 동일한 이름이 성경에도 나온다 (대상 18:1; 대하 10:18). 우살은 현재의 예멘 수도인 사나의 옛 지명이었으며, 디글라는 종려나무란 뜻으로 아라비아에 있는 오아시스 중의 하나이며, 오발은 예멘에 있는 지명이며, 오빌은 금의 산지로 유명하여 솔로몬이 에시온 게베르에서 배를 지어 보낸 것을 감안하면 남 아라비아에 위치한 금광이며, 요밥은 남 아라비아의 유하빕 종족과 일치한다. 메사와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산이 어디였는지는 현재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메사와 스발은 남 아라비아에 위치한 지역으로 메사는 서편 지경한계, 스발은 동편 지경한계를 말한다고 본다.      

          둘째, 그두라와 그 세 아들의 동방으로 간 기록에 대한 김씨의 추측은 그야 말로 억측 중의 억측이다. 이미 말한 대로 구약성경에서 동방이라 함은 주로 아라비아 지역을 칭한다. 그두라의 후손들은 아라비아로 가서 아라비아인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두라는 지금까지도 아라비아인들의 조상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그두라가 아들들을 지휘했으며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여성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그두라를 연결하기 위해 아전인수격으로 조작한 것으로 비판할 값어치도 없는 허무맹랑한 사고의 산물이다.      

          이상에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한민족과 셈족을 연관시키려는 김성일 씨 등 일부 교계인사들의 시도에 대해 그들의 근거를 비판함으로서 그 시도의 허구성을 입증하였다. 흔히 문화의 동질성을 가지고 민족의 뿌리를 추적하려는 시도들을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결정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인류의 문화의 역사는 현재 DNA조사결과로 보아 아주 짧은 것으로 판단되며 현존하는 모든 인종이 모두 동일한 DNA pattern 을 소유한 것으로 보아 인류문화 간 동질성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유사점을 근거로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극히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인 사고이다. 비근한 예로 성경에 나오는 셈족의 문화와 당시 근동의 메소포타미아나 애굽문화의 유사점을 근거로 이스라엘 역사의 특수성을 부인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시도를 고려해 볼 때 김씨 등의 시도는 그 동기는 다르지만 이현령 비현령격의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한민족의 뿌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흔히 몽골 계의 퉁구스 족이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보나 (김씨의 주장도 이에 근거), 이 학설 자체도 학자들의 반대에 부디쳐 왔다. 김씨는 나뭇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몽골족에도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퉁구스족과 한민족의 동질성을 주장하나, 주지하시는 대로 이러한 종류의 설화는 세계 어디에나 공통된 것으로 설화 하나로 같은 뿌리라고 주장하는 데는 큰 무리가 있다. 현재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한민족은 중국의 한족도 아니며, 만주족도 아니며, 퉁구스족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삼한의 언어가 인도의 드라비다족의 언어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학설도 H. B. Hulbert 에 의해 한 때 전개되었으나 이것도 낭설인 것이 이미 밝혀졌다. 한반도에 고석기 문화의 유물이 발굴됨으로 말미암아 문제는 더욱 복잡하여졌다. 그래서 학자들은 원래 한반도에 있었던 고석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있었고 그후 외부에서 도래한 다른 민족이 있었다고 보며 이 도래인이 바로 중국의 선진기록에 나오는 예족과 맥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족과 맥족이 어떤 유래로 한반도에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러한 시도의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데 있다. 신약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혈통으로 육정으로나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침으로서 구약의 이스라엘의 잘못된 선민의식을 수정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선민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구약의 셈족의 후예가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한국인을 셈족으로 만들어서 쓸데없는 자존심을 고취시켜서 어쩌자는 말인가?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예수 안에서의 자아관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민족의 자존심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비젼을 가지고 현재를 준비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얄팍한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허무맹랑한 역사날조를 해서 될 일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c) 2013 All4Jesu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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