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1) 냉장고를 정리하며 – 2004년 ATS 교수시절
요사이 나는 마음이 편치가 못하다. 엊그제 밤도 마음이 불편하여 부엌의자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냉장고를 온통 도배를 해 놓은 것들이 눈에 뜨였다. 임산부용 비타민 제를 복용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우리 딸 은정이가 지난 7월 우리 집에 머물 때에 붙여 놓은 자석이 부착된 리마인더이다. 은정이는 첫 아기인 요시아를 임신했을 때에 임산부 당뇨증세로 영양섭취를 제대로 못하였다. 이러한 연고인지는 모르지만 요시아는 폐가 미숙된 상태로 태어난 데다 왼쪽 눈마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병원 중환자실 Incubator 안에서 2주간을 보내야 했다. 그 후에도 요시아는 1년 이상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어야 했다.
이에 대한 심적 가책 때문이리라. 은정이는 둘째를 임신하자마자 철저한 태아 영양관리에 들어갔다. 태아용 비타민을 매끼 잊지 않고 복용했을 뿐 아니라 태아에게 좋다는 음식만 먹었다. 뿐 아니다. 몸에 주사바늘 꽂는 것을 그토록 혐오해서 예방주사를 맞을 때는 의사와 격투까지 하던 아이가 매일 당도 측정을 위해 식전과 식후 스스로 손끝을 찌르는 고통을 마다 하지 않았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 이렇게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복중의 아기와 엄마의 교제가 얼마나 희생적인 사랑의 교제인지 실감했다. 우리는 둘째 손주의 이름을 이사야라고 할 것인지 아니면 여자 이름을 새로 지을 것인지 의논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인생은 꼭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렇게 정성 들여 보살폈음에도 태아의 몸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애기의 가슴에 물이 차서 폐가 제대로 생성되지 못하고 있어 생존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상상치도 못했던 소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은정이 부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전문의들의 종합검진을 받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임신 기간 중 모종의 바이러스가 태아에게 침투하여 태아의 가슴과 복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지난 2주 동안 은정이는 전화조차 받지 않고 “왜 이런 일이?”라고 자문하며 고통 속에 잠겨 있다. 의사들은 산모의 건강문제를 고려해서 조기에 인공유산할 것을 권유하지만 은정이 부부는 갈 데까지 가겠다고 한다. 현재의 고통은 시작일 뿐인 것을 우리도 알고 은정이 부부도 안다. 우리 부부의 마음도 착잡하기 그지없다.
전쟁 중 태어나 숱한 고난을 겪었지만 자녀를 갖는 일에 관한 한은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남녀가 결혼하면 아기는 당연히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손주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 보니, 한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절감한다. 그래서 그러한지 사위도 이제는 첫 아이 요시아의 재롱을 즐기는 쪽으로 마음을 쏟고 있다. 어쩌다 통화를 할 때에도 대화의 소재를 요시아 쪽으로 돌린다. 요시아는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자칫 절망 가운데로 침잠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요시아의 재롱을 들으며 삶의 의미를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들을 너무 당연시하고 살아왔다. 부모님, 배우자, 자녀, 친구, 교회, 학교, 내 나라 모두가 우리가 감사하고 즐겨야 할 소중한 선물인 것이다. 부정적인 쪽으로 돌리기만 했던 우리들의 마음의 눈길을 긍정적인 쪽으로 돌리면 현재의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