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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4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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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뉴욕목회

뉴욕시: "뉴욕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
어디 가서도 성공할 수 있다."
심슨은 뉴욕에서도 성공했다.

1879-1881년


시대적 배경

3장은 심슨 목사의 뉴욕목회에 대해 다룬다. 이에 앞서 먼저 심슨의 뉴욕목회시 뉴욕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먼저 상고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역사학자는 심슨이 뉴욕에서 사역했던 기간이었던 뉴욕의 19세기 4반세기를 가리켜 "an era of velvet and vice, of magnificance and misery" 라고 묘사했다. [극과 극이 공존하던 뉴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역자주.]

첫째, 극빈과 극부가 공존한 시대였다. 음악연주회에 몰려드는 부유층들의 재산을 합치면 한번에 당시 천문학적 숫자인 5억불에 달하는 극부가 밀집된 곳인 가하면 셔쓰공은 12개의 수제 셔쓰를 만들어야 겨우 35센트밖에 받지 못하는 시대였다. 빈익빈 부익부가 갈수록 심화되던 시대, 에스터가와 벤다빌트가의 부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였다.

둘째, 1875-1900년 25년간 뉴욕시는 문화면에서 큰 성취를 이루었던 시대였다. 1879년에는 성당으로는 세계에서 11번째로 큰 세인트 페트릭스 성당이 헌당되었다.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도 이 시기에 거의 완공되었고 자유의 여신상을 건립하기 위한 헌금운동도 한창이었던 시대였다.

셋째, 엄청난 과학기술의 진보를 체험한 시대였다. 뉴욕시에 최초로 상용 전화시설이 도입되었고, 발명가 챨스 부시가 최초의 아크등을 가설했다. 거기에다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최초의 백열등을 시범으로 달아 뉴욕을 밝혔던 발전과 발명의 시대였다.

넷째, 급증한 이민과 이로 인한 로마 카돌릭 교회의 교세확장이다. 뉴욕 항은 남유럽과 동유럽 등지에서 밀려들어오는 이민자들로 붐비었고 이들 대부분은 뉴욕시내에 대부분 정착하였다. 이들의 출신은 다양하기 짝이 없어 이탤리인, 폴란드인, 희랍인, 크로아시아인, 항가리 마자르인, 포르투갈인, 리투아니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등을 망라했다. 이들 중 로마 카돌릭교인들이 많았고 이들에게 성당은 이 낯선 이방에서 자신들에게 친숙한 유일한 표지가 되었다. 이들이 성당으로 몰려옴으로 로마 카돌릭교회의 교세는 유례없는 확장을 거듭하여 개신교 교회들이 넘볼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다섯째, 급증한 이민자들의 문제도 있었지만 이보다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냉혹한 환경에서 생존키 위해 몸부림친 시대였다. 이들은 모두 뉴욕시 태생으로 아직도 정규교회에서 외면받고 복음에서 소외된 계층이었다. 이는 비단 뉴욕시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절실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막강한 재정과 교세를 자랑하는 대형교회들은 이렇게 소외된 계층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름난 설교가를 강단에 모시느냐에 쏠려있어서 이를 위해 서로 숨가쁜 경쟁이나 하던 한심한 시대였다. 뉴욕시에는 헨리 워드 비져와 드윗 탈메이지, 보스톤시에는 필립 브룩스, 필라델피아에는 럿셀 콘웰이 명설교가로 이름을 날리던 시대였다.

극이 극이 공존하는 이 세대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셔서 시대를 선도하는 일꾼으로 사용하셨다. 이 시대 특별히 하나님이 이룩한 역사를 들어보자.

첫째, 사회 구제활동이다. 아도니람 고든은 보스턴에서 활약한 침례교목사로 입술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사역하는 사역자의 본을 보여주었다. 그는 강단에서 힘찬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한편 알콜중독자들을 위한 회복시설을 만들어 이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나아가 사회에 정상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범교단적 부흥운동이다. 드와이트 무디는 영국전도여행이후 얻은 명성대로 부흥사로서 당시 시대를 선도해 나간다. 무디의 메시지의 초점은 중생의 필요성과 성결한 삶이었다. 무디는 기존 교단의 지도자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일에 힘을 합하지 못하고 서로 물고 뜯고 경쟁하는 데 대해 꾸짖고는 했다. 어느 설교에서 무디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미국의 목사님들에게 한 가지 좌우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대강 쓸데없는 일로 다투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하되 복음을 난잡하게 하지 말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간단한 복음을 전하십시오.' "

셋째, 캠프집회와 성결운동이다. 죤 잉스킵은 동료 감리교목사님들과 함께 "National Camp Meeting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 (성결을 부르짖는 전국 캠프집회 연합)을 결성했다. 1867년 결성된 이 모임은 범 교단적인 캠프집회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고조시켰스며, 성결운동이 교단과 국경을 초월하여 번져나가는데 기여하였다.

넷째, 성결운동과 동시에 진행된 신유운동이다. 성결운동은 신유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신유라 함은 하나님께서 환자들에게 직접 역사하셔서 이들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가르침이다. 신유의 가르침은 당시 유명한 설교가였던 안드류 머레이나 아도니람 고든목사와, 평신도 의사인 챨스 컬리스박사의 사역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영국에도 성결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주목할 사건은 유명한 케직 무브먼트가 1875년 제 1차 "for the promotion of practical holiness" (삶속에서 역사하는 성결을 주창하는) 연례총회를 개최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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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젊은 장로교 목사였던 심슨은 시대의 부름을 밝히 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남부의 소도시 루이빌에서 부흥의 불길을 집히는 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비젼의 모양이 확실해질수록, 심슨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하신 비젼은 루이빌같은 소도시가 아닌 세상의 문물이 교차되는 대도시, 세계의 수도로 부상하는 도시, 폭팔적으로 발전하는 대도시 뉴욕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슨의 루이빌 사역 6년간도 헤밀턴 사역 못지 않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1874년에서 1879년 사이 교인수도 급증했고, 헌금도 증가했으며 사역의 범위도 자신의 교회뿐 아니라 루이빌의 모든 교회로 확장되었다. 성공적인 목회사역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특권층을 위주로 한 교회가 변화없이 숫자만 성장하기만 하는데 더 이상 만족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루이빌 사역을 통해 심슨의 목회관과 목회에 대한 기대도 변화했기 때문이다. 심슨의 삶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두가지 결정적 사건이 있다: (1) 성결의 체험과; (2) 휫틀-블리스 부흥집회에 참여해서 겪었던 놀라운 체험이다. 그의 꿈은 이제 우리를 박차고 비상한다. 이제 더 이상 한 교회를 섬기며 한 회중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에 만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루이빌 시내에 아직도 교회에서 소외된 영혼들의 복음화 뿐 아니라 복음에서 소외된 전 세계의 수많은 영혼들의 복음화가 그의 비젼이 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소도시 루이빌의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 성도들이 따르기에는 심슨의 비젼과 그릇은 너무 컸다. 심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엄청난 부채를 감수하고 화려하기만 한 성전을 택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회중들이 더 이상 심슨의 비젼을 따르지 않기로 작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슨은 절대로 자신의 주장을 성도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들과 다투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보다는 자신의 꿈을 펼칠 더 넓은 곳을 향하여 루이빌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신축성전이 완공된 지 1주년이 되는 1879년 9월 심슨은 뉴욕을 방문하여 13가 장로교회에서 3주간 주일설교를 하게된다. 독자들이 이미 읽어 아시는 대로, 이 13가 장로교회 강단은 심슨의 삶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곳이다. 심슨 목사가 헤밀턴 녹스교회 담임시 "복음주의 연합"의 뉴욕총회에 참석차 뉴욕에 방문하던 중 바로 이 13가 장로교회에서 초청강사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당시 대의원으로 총회에 참석하러 왔던 루이빌 교인들이 심슨의 설교를 듣고 심슨을 루이빌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13가 장로교회의 순서가 닥친 것이다. 심슨의 설교를 들은 13가 장로교회 회중은 심슨을 담임목사로 모실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한다. 심슨은 결단력있는 성품대로 즉시 루이빌 사역을 마감하고 뉴욕으로 이사하여 이로부터 불과 6주만에 13가 장로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된다.

비록 급작스러운 사임이기는 했지만 심슨과 루이빌 회중의 이별은 화목하게 이루어졌다. 체스넛 스트릿 장로교회는 심슨의 사임을 만류하였지만 심슨의 마음이 이미 결정된 것을 깨닫고 마지 못해 사표를 수락했다. 성도들에 대한 심슨의 사랑은 떠나는 날까지 루이빌 성도들의 가정을 한 가정도 빼놓지 않고 심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심슨의 위대한 면이 여기 있다. 심슨은 시작도 깨끗하지만 마무리도 깨끗한 것이다. 헤어지면서도 인간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태도는 목자의 귀감이다.

아내와의 갈등

심슨의 뉴욕행은 아내와의 갈등을 가져온다. 아내 마가렛은 이제 막 정착한 루이빌에서 다시 뿌리를 파서 새로운 목회지 그것도 온갖 죄악과 범죄가 난무하는 뉴욕으로 떠난다는 데 대해 극구 반대했다. 아내의 반대가 정도를 넘어서자 심슨은 고심하던 끝에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중재를 요청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래 보았자 아무 효험이 없을 것이 분명한 것을 깨닫고 단념하였다. 오죽했으면 심슨이 일기에다 기록하기를 아내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내에 대한 동정과 사랑을 유지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까지 하였을까?

이미 말한 대로 마가렛이 뉴욕행을 극구 반대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뉴욕이란 대도시의 환경이 네 자녀들에게 끼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였다. 당시 맏아들 알버트 헨리는 13살, 차남 제임스 고든은 9살이었고 맏딸 마벨 제인은 7살, 막내 마가렛 메이는 2살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내 마가렛의 우려는 후일 현실로 드러난다. 두 아들 알버트와 제임스는 훗날 뉴욕에 팽배했던 여러 가지 악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고 뉴욕에서 출생한 삼남 하워드 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 형제들은 늙어서야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훗날 심슨의 손녀 캐서린은 할아버지께서 이에 대해 얼마나 후회했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걸핏하면 말씀하시기를 인생을 다시 살 기회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절대로 뉴욕에서 자녀들을 키우지 않겠다고 한탄하시는 것을 들었지요."

과연 자녀문제만이 마가렛이 뉴욕행을 극구 반대한 이유였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마가렛이 입으로는 표현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으리라. 심슨이 루이빌을 떠나려 할 즈음에는 심슨이 안정된 담임목회보다는 교회에서 소외된 영혼들에게 전도하는 도시선교와 해외선교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사역의 중심을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대해 마가렛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러한 판국이었으니 안정된 목회지인 루이빌에서 떠나려는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마가렛의 의심과 분노를 촉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슨의 태도는 확고했다. 루이빌 교회 성도들의 만류를 단호히 거부했듯이 아내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1879년 11월 10일 심슨은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루이빌 목회에서 떠나도록 오늘 저녁 당회에서 허가를 받았다. 이제 나는 자유로운 그리스도의 종이다. 지금까지는 서두르지 않고 주님의 인도를 기다려왔다."

뉴욕행 북행열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면서도 심슨은 뉴욕에서 무슨 사역을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심슨은 네 자녀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기도하며 앞날에 대한 계획수립에 몰두한다. 심슨의 그 주 토요일 일기장의 기록을 보자. "여행중 기도하며 받은 말씀이다. '너는 이 비젼을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2, 3)."

일단 뉴욕에 도착하고 나니 사태는 급속히 진전되어 심슨이 당장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명백해진다. 뉴욕에 도착한지 이틀 후 심슨 목사는 13가 장로교회의 주일아침예배에서 말씀을 전했고 그 다음날인 월요일에는 교인총회에서 노회에다 하루빨리 심슨을 담임목사로 취임시키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심슨의 마음은 아직도 분명히 결정되지는 않았다. 심슨의 일기를 보자. "주님께서 확실히 내게 13가 장로교회의 담임이 되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이 결정을 잠시 미루고 주님께서 그토록 내 마음에 소원을 주신 부흥사로서의 사역을 하도록 자유를 갖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우선은 13가 장로교회의 담임직을 수락하되 하나님께서 장래 내게 두신 사역으로 나를 인도할 여지를 남겨두기를 원하시는가?"

이러한 심슨의 마음은 그가 만든 선교잡지에 잘 기록되어있다. "이 밤 하나님께서 선교잡지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허락하시다. 일단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선교잡지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확실하다." 그 주 수요일까지는 심슨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그의 일기의 기록을 보자. "신나고 복된 날이다. 아침 기도에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토록 내 마음을 지배했던 부흥사로서의 사역에 대한 나의 태도가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주셨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말씀과 암시로 내게 길을 제시해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내가 엉뚱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은 아직도 분명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내게 분명히 계시하실 것이다. 우선은 선교잡지를 집필하게 하신 것은 확실하다. 이 시간 모든 불안과 의심은 내 마음에서 떠나다."

일기에 기록된 대로 일단 심슨의 마음은 확실히 결정되었다. 우선 13가 장로교회를 담임하면서 선교지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아내 마가렛의 입장을 살펴보자. 만일 남편이 그저 목회자로 안정된 수입을 올려 가정을 잘 부양하기만 했어도 그렇게 남편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심슨이 그나마 저축한 돈도 모두 선교지 출판에 탕진할 뿐더러 그나마 선교지 구독비로 들어오는 수입도 몽땅 선교지 출판에 쏟아 부은 것이다. 그러하니 황량한 뉴욕에서 네 자녀를 양육하는 아내의 분노가 오죽했겠는가? 선교지 출판은 시작에 불과했다. 후일 심슨은 그나마 안정된 수입원이던 담임목사의 자리와 안정된 지위를 보장하는 장로교 교단마저 박차고 나가, 당시로는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던 독립사역을 오직 믿음 하나로 시작하게 된다. 그동안 아내가 겪었을 고난은 독자들이 짐작하시라.

선구자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심슨은 하나님의 비젼에 따를 준비가 되었으나 그의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세월이 가면 아내 마가렛과 자녀들도 결국 심슨의 비젼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심슨의 가족뿐이 아니라 심슨이 담임했던 루이빌 체스넛 스트릿장로교회와 뉴욕 13가 장로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심슨같은 거인을 담기에는 그 그릇들이 너무 작았던 것이다. 1879년 12월 1일 월요일 장로교 뉴욕 노회는 심슨 목사를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동시에 심슨 목사는 13가 장로교회의 담임자리를 수락한다.

뉴욕 전역을 교구로

사실 13가 장로교회가 루이빌에서 심슨을 청빙한 동기는 심슨의 유창한 설교에 기인했다. 이들을 놀라게 한 일이 즉시 발생한다. 일단 심슨은 담임목사직을 수락하자마자 취임식이 있던 12월 9일까지 불과 9일 동안에 40가정을 제외한 전교인의 가정을 심방하여 설교목사로서 뿐 아니라 심방목사로서의 뛰어나 면모를 드러낸다. 심지어는 취임식날에도 16가정을 심방하는 열성을 보였다. 심슨의 그날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너무 지쳤다." 취임식후 이틀만에 20가정을 더 심방했고 이로 인해 불과 1개월이란 기간동안 루이빌과 뉴욕 두 교회 교인들의 가정을 모두 심방 할 수 있도록 능력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복된 열매에 대해서도 감사드렸다.

심슨이 말하는 복된 열매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열매는 하나님이 꾸준하게 보내주신 신입교인들이다. 심슨의 일기는 교회성장기록부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 저녁 대규모 기도회를 갖다. 성전을 가득 메운 성도들. 축복된 순간들. 다수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다." "모든 예배마다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다." "주일에 임한 많은 축복.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앞으로 돌아오다." "교인수가 대폭 증가하다. 오늘 저녁 예배에서만 35명의 신입교인이 입교하다." "37명의 신입교인이 입교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 중 20명은 초신자이다."

교회 의사록도 동일한 축복의 기록으로 차 있다. 정기 당회는 매월 첫 월요일마다 모이게 되어 있었으나 1879년 12월 31에도 신입교인가입을 허가하기 위해 모여야 했고 1880년 1월 4일 월요일에도 모였을 뿐 아니라 같은 이 때문에 그 주 내내 금요일까지 매일 모여야 했다. 신입교인 중 21명은 초신자로 입교한 사람들이었고 14명은 타교회에서 전입해온 성도였다. 심슨재임 중 모든 모임의 의사록에는 신입교인가입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는 심슨이 떠나는 마지막 주일에도 10명의 신규교인이 입교하였다.

그러나 13가 장로교회의 교인 모두가 급증하는 신입교인가입에 대해 기뻐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나 신입교인들의 구성이 자기들처럼 유족하고 유식한 사람만 있던 것이 아니고 가난해서 누추한 복장으로 주일예배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교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유족하고 유식한 상류층 교인들이 주류인 13가 장로교회의 전통을 고수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의 숫적성장이 가져오는 이미지훼손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일단 뉴욕 빈민선교로 교회가 소문이 나면 이런 교회에 자기들처럼 상류층사람들이 앞으로 입교하겠는가?

드디어 정면대결이 불가피한 사태가 발생했다. 심슨목사는 그동안 뉴욕 빈민가를 순회하며 노방설교를 통해 많은 전도의 열매를 얻었는데 이 중 이태리 출신 노동자들 100명을 신입교인으로 받아달라고 교인총회에 요청한 것이다. 당회는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당회의 조치는 심슨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슨을 더욱 실망시킨 것은 이들의 조치는 당초 심슨이 담임으로 부임하기 전에 교회 지도자들과 합의한 내용과 모순된 조치였기 때문이었다. 심슨은 후일 이 일에 대해 자신의 소감을 말한다. "제가 뉴욕으로 부임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13가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이 저와 힘을 합해 기존교회에서 소외된 대중을 복음화하는 도시선교에 동참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심슨목사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지만 100명의 이태리출신 새 교인들이 다른 교회에서 제자로 양육받도록 알선했다. 이때 심슨은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오랜 전통으로 굳어진 기존교회의 틀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도시선교의 비젼, 즉 소외된 많은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몸부림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당회는 그 날 목사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교회는 담임목사를 잃었다.

비젼은 선교잡지부터

월간선교잡지를 만들되 삽화와 사진을 곁들인 멋진 잡지를 심슨 자신이 직접 집필하고 제작하겠다는 의지는 처음부터 확고했다. 선교잡지를 제작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중 하나라는 사실은 벌써 상당 기간동안 심슨의 마음속에 확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심슨이 뉴욕으로 오게 된 배경에는 뉴욕이 선교잡지 제작에 적합한 곳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시는 이미 출판에 관한 한 미국제일일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정보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심슨은 13가 장로교회 담임으로 취임도 하기 전에 이미 일기에다 선교잡지에 대해 기록했다. "오늘 이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내게 명확히 주신 메시지는 '기사를 쓰라'는 것이다."

과연 심슨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직접 저질러야 했슬까? 심슨이 대학시절 특상을 수상하는 논문을 쓴 경력과 오랜 동안 설교안을 정서한 경험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리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정작 출판업에 대해서 심슨은 백지상태였고, 잡지를 낼 만한 재원도 없었으며, 광고주도 없었고 잡지를 제작할 도움의 손길도 전혀 없는 한심한 상황임이었다. 구독자수도 기껏해야 몇 안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담임으로 부임한 교회는 당시 대형교회로 목회에 전심 전력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잡지제작에 시간을 낸다는 것도 큰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초월해서 심슨을 몰고 간 한 가지 요소가 있었다. 바로 세계 각처에 아직도 복음을 모르고 죽어 가는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심슨의 내면에 억제할 수 없는 불길로 타올랐기 때문이다.

"The Gospel in All Lands" (만천하에 복음을)의 창간호는 1880년 2월에 발간되었다. 심슨은 사설에서 자신의 선교잡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들판에서 수고하는 모든 주의 일꾼에게 보내는 또 하나의 응원의 소리가 되리라. 영혼구원의 대전투에 또 하나의 깃발이 서다. 하나님의 소명을 쫓아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진정한 기독인의 소식을 온 땅에 전하는 또 하나의 전령이 되리라. 주님이 주신 대사명을 천하에 외치는 하나님의 소리가 되리라. 영원한 죽음의 해변에 매 세대마다 거대한 파도처럼 솟아나는 십억의 인류를 기억하라고 외치는 또 하나의 호소가 되리라. 이것이 바로 본지가 이루고자 하는 사역이다. 이러한 세계선교를 수행하는 일에, 본지가 하고자 하는 일이 아무리 작은 수고일지라도 왜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구구히 답변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창간호는 풋내기 편집자 심슨의 기도와 열정의 소산이다. 심슨은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를 창간호의 주제로 하라고 하신 듯하여 이에 순종하였다. 때마침 교회에서 심슨에게 성탄절 특별보너스를 지급했다. 이는 심슨이 창간호제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인 500불이었고 심슨은 이 돈을 한푼도 남김없이 창간호 발간에다 쏟아 부었다. [당시로서 500불이면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만불이상의 거금이다-역자주.] 심슨의 일기의 기록을 보자. "좋으신 하나님은 오늘도 내게 엄청난 양의 기사를 오늘 쓸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베푸셨다. 내일은 창간호에 낼 사진들을 선정하고 내일 밤까지는 중요한 기사를 모두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겠다." 창간호용 중요 기사들을 마무리하는 데는 이틀이 소요되었고 그 주간에 거의 모든 자료들을 다 준비할 수 있었다. 비록 혼자의 힘으로 제작한 선교잡지였지만 "The Gospel in All Lands"는 훌륭한 삽화와 사진들이 얼마나 잡지에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작한 데 힘입어 당시로는 어디에 내놓아도 빼어난 명품이었다. 당시 출판된 선교잡지 중 이렇게 매력적인 삽화를 곁들인 잡지는 아직 유례조차 없었다. 원래 심슨은 창간호를 64면 정도의 규모로 만들 예정이었으나 하다 보니 80면으로 늘어나 버렸다.

창간호를 제작하느라 잠시도 쉬지 않고 장기간 과로한 심슨은 건강을 해쳤다. 밤 11시 이전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겠다고 작정했던 심슨이지만 밤늦게까지 잡지제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해 절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양심의 가책도 가졌으리라. 그러나 마감일은 다가오고 예상보다 진척은 없어 심슨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날이 갈수록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심슨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2월 1일 주일 일기에 심슨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주여 이것이 주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이 일을 당장 중단하게 하소서. 더 이상 과중한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짐에 파무칠 것만 같다. 하나님의 때가 아닌데 내가 이렇게 서두른 것이 아닌가. 오 주여 저를 인도하시고 능력의 손으로 붙잡아주소서." 그러나 주말이 되자 심슨은 다시금 확신을 회복했고 제 2호의 제작준비에 착수한다. 무엇보다 그를 고무시킨 것은 창간호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 해 2월부터 5월말까지 불과 4개월 동안에 매월 1권씩 네권이 발간되었는데 대부분의 기사작성과 자료준비와 아트웍 전부와 인쇄사와의 거래 이 모든 격무를 심슨 혼자서 담당했다. 당시 심슨이 13가 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상상도 못할 격무를 감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이적인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심슨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도 컸다. 바로 건강을 완전히 망친 것이다. 극도의 피로는 심슨을 병들게 했고 이로 인해 6월호는 휴간하게 된다.

7월호 기사에 심슨은 6월호를 휴간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대해 사과성명을 싣는다. "이번 체험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것은 선교잡지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업무량이나 업무성격은 목회업무를 담당하는 저같은 사람이 혼자서 감당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사역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체험을 통해 선교잡지의 제작사업은 저 혼자서 감당하지 말고 뜻있는 분들과 동역을 해 나가야 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동역이 불가능하다면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심슨의 소원대로 "The Gospel in All Lands"를 인수해서 심슨의 원래 의도대로 운영하겠다는 출판업자가 나타났다. 이 방면에 경험이 많은 감리교인 출판업자로 유진 스미스였다. 지칠 대로 지친 심슨은 편집권만 자신이 유보하되 자신의 선교지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스미스씨에게 넘겨주었다. 심슨이 이 선교지와의 인연을 계속한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교회에 부여된 가장 고귀하고도 매력적인 과업 즉 세계선교를 위해 사랑의 수고와 협력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심슨은 1881년 10월호가 나올 때까지 "The Gospel in All Lands"와 협력을 계속한다.

심슨이 편집인이자 제작자였던 기간동안은 심슨은 자신의 선교지에 대한 평가를 잡지에 게재하기를 거부했다. 왜냐면 잡지에 대한 평가를 게재함으로 인해 교만이 파고 들어와 이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막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스미스씨가 잡지를 인수하자, 스미스씨는 독자들이 보낸 찬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는 21개의 출판사와 편집자들의 글도 있었다. 그 예를 들어보자. "창간호는 미국에서 발간된 어떤 선교잡지보다도 탁월하였다." - 알게헤니 신대원 교수 켈로그 박사. "전세계에서 발간한 무수한 선교잡지들이 제 손에 들어오지만 당신 선교지가 최고입니다." -Zion's Herald 지 선교면 편집자 알렌 목사. "먼저 이러한 선교잡지를 만들기 위해 기울였을 엄청난 수고에 찬사를 보냅니다. 둘째, 가히 선교의 백과사전으로 불릴 만큼 내용 면에서도 다양하고 충실한데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기사와 삽화를 재미있고 흥미롭게 구성한 데 대해 찬사를 드립니다." - Christian Intelligencer. "지난 40년간 선교신문을 읽어왔지만 이 선교잡지만큼 선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제공한 잡지는 없었습니다." - Western Recorder. "The Gospel in All Lands 1881년 5월호는 중국에서 진행되는 선교사역을 어느 선교잡지보다도 완벽하게 보도하였습니다."- Methodist Protestant.

신유 그 놀라운 능력

심슨의 건강악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는 선교잡지 "The Gospel in All Lands"를 마감일에 쫓겨서 편집하느라 휴식할 여유도 없이 무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타고난 연약한 육신이 심슨의 열화같은 성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데 있었다. 거기에다 만사에 최선만 추구하는 완전주의자였기에 목회, 설교준비, 노방설교, 선교잡지 네 가지 격무를 한치의 착오도 없이 철저히 수행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무리가 아닌 일이 없었다. 교인만 해도 수백명었는데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정을 모두 심방하며 살뜰히 돌보았고 설교준비의 과정도 성경연구와 예화준비와 원고작성까지 완벽을 기했다. 거기에다 소외된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뉴욕의 빈민가를 찾아다니며 노방설교로 이들을 전도하고 양육까지 하였으니 애초부터 병골로 태어난 육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소치라 하겠다.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무리한 몸이 선교잡지를 제작하느라 완전히 망가지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의학수준은 심슨의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후일 심슨은 자신의 체험에 대해 "My Medicine Chest" (약장)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이렇게 전하였다. 처음에는 대중요법으로 시작해서 동종요법으로 나중에는 약초의까지 찾아갔습니다. 백방이 무효라 할 수 없이 당시 특허난 신종약이 나왔다 하면 무엇이든 시도했습니다. 제 연약한 심장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한 주머니에는 암모니아병을 다른 한 주머니에는 마로니에 열매를 넣어 가지고 다녔지요. 어느 고산지대주민이 제게 알려주기를 마로니에 열매가 제 심장문제의 원인인 관절염에 즉효라고 했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저는 신경질적이고 격정적이었지요. 도시 안정할 줄을 몰랐습니다. 제 심장문제 중 하나는 제가 흥분하기 잘해서 제물에 기진하는 것이었지요. 강장제도 먹어 보고, 키니네, 철분, 차아인산염 등 복용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일단 관절염증상이 제 내부에 발병하면 의사는 외부에 염증을 유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일종의 반대자극제인 셈이었지요."

뉴욕으로 온지 1년이 채 못되어 심슨의 건강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때도 쓰러진 경험이 있었고 헤밀턴 사역때도 건강이 무너져 수개월간 사역을 중단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그 차원이 달랐다. 당시 뉴욕의 유명한 의사선생님께서 심슨의 상태를 진단하더니 심장이 극도로 쇄약해져서 치료불능이라고 선언했다. 의사선생님의 진단은 가뜩이면 쇄약해진 심슨의 육신과 신경에다 정신적인 충격까지 더했다. 섬기던 교회에서 휴가를 얻어 심슨은 사라토가 스프링스로 가서 휴식을 취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심슨은 후일 고백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을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심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절망에 사로잡힌 심슨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주시는 것으로 그 위대한 신유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먼저 하나님은 찬양을 통해서 심슨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주심으로 역사를 시작하셨다. 사라토가 스프링스 휴가기간중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심슨은 우연히 어느 전도집회장소를 지나갔다. 그런데 그 곳에서 들려나오는 흑인찬양단의 찬양이 절망의 심연에 빠졌던 그의 마음에 소망의 빛을 던져주었다. "나의 예수님은 만주의 주시네. 이 세상 누구도 주님처럼 능력있는 분 없네."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심슨은 이제까지 자신의 심령을 짓누르고 있던 절망의 구름이 걷히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꼈다.

둘째는 다른 이들의 간증을 접하게 하심으로 역사하셨다. 신유의 본격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1881년 7월 말이나 8월초에 일어난 사건으로 소개의 글에서 언급한 컬리스박사의 집회였다. 당시 심슨은 가족과 함께 메인 주에 있는 Old Orchard 에서 휴가중이었다. Old Orchard 는 해변 휴양지로 당시 많은 대형집회가 개최되던 장소였다. 지칠 대로 지친 심슨인지라 휴가기간중에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하기를 원했지만 종종 캠프장에서 열린 전도집회에 참석하곤 했다. 챨스 컬리스박사가 마침 그 곳에서 신유간증집회를 인도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인도였을 것이다. 컬리스박사는 보스턴에서 의사로 일하며 결핵요양원을 운영했던 분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컬리스박사는 환자를 의술로 치료하는 한편 하나님께 환자를 치료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회생의 가망이 전혀 없던 환자들이 컬리스박사의 기도를 받고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이에 고무된 컬리스박사는 신유에 관한 성경말씀을 연구하였다. 일단 하나님의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깨달은 컬리스박사는 의사로서 일하는 한편 신유사역을 시작했다. 마침 심슨이 참석한 Old Orchard 집회가 컬리스박사가 인도한 신유집회였고 200명에 달하는 환자들이 신유의 체험을 고백하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말씀을 상고하게 하심으로 역사하셨다. 심슨은 후일 컬리스박사의신유집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중 진짜 신유의 간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었지요. 그러나 사실 대부분 간증은 제게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신유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이라면 이는 정말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방에 가서 성경말씀을 펼쳐들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신유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이라면 인정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잊어버리자. 진실이라면 나는 신유를 내 것으로 클레임할 것이다. 설사 이로 인해 무슨 결과가 오든 상관치 않을 것이다."

넷째는 성령을 통해서 확인시키심으로 역사하셨다. 심슨은 해변에 돌출한 바위위에 앉아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해초조각이 무심히 파도를 내려다 보던 심슨의 눈에 띄었다. 한순간 파도가 해변으로 해초조각을 밀어부쳐다 놓으면 바다의 위협에서 구원받은 것 같았지만 다시 파도가 해변을 휩쓸고 나가면 속절없이 바다가운데로 끌려가는 해초조각을 내려다보는 심슨의 마음에 이 해초더미가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해초조각의 신세에 동정이 간 심슨은 속절없이 부유하는 이 작은 해초조각을 육지로 가져다 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즉시 벌떡 일어나 물가로 내려가 해초조각을 줏어서 더 이상 파도가 닫지 않는 육지로 가져다 놓았다. 해초조각을 육지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심슨의 심령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 작은 해초조각이 바로 너란다. 너도 이 해초처럼 육지로 올라오려고 무한히 애썼지만 정작 육지에 닿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파도가 너를 절망의 바다로 다시 휩쓸어가곤 했던 것이다. 나는 네가 그렇게 혼자 힘으로 발버둥치고 있는 동안 줄곧 너를 들어서 육지로 옮기려고 했단다. 그러나 여태까지 너는 내가 너를 도울 여지를 허락하지 않고 살아왔단다."

다섯 번째는 심슨이 신유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께 서약하는 단계였다. 일단 마음을 굳힌 심슨은 신유의 복음이 성경말씀에 기록된 진리임을 믿고 이를 자기의 것으로 클레임하겠다고 결심했다. "제 소신은 성경에 기록된 어떤 가르침도 제 삶을 통해서 확실히 입증하지 않고 단순히 이론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심슨은 Old Orchard의 송림에 들어가 하늘을 향해 오른 손을 들어 하나님께 세 가지 영원한 서약을 드렸다: (1) 신유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부분임을 무조건 인정할 것을 서약하였다. (2) 주 예수님이 자신에게 신유와 건강을 주셨다는 사실을 무조건 인정하겠다고 서약하였다. (3) 자신에게 하나님이 허락한 신유의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축복을 위해서, 사용할 것임을 서약하였다. 하나님께 세 가지 서약을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심슨은 이제 새 사람이 된 것을 느꼈다. "불과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제게 무엇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내 영혼의 구석구석이 하나님의 임재를 따갑도록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험

신유의 체험은 그저 마음으로 믿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시험을 거쳐서 자신의 신유를 믿는 증거를 보일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신유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시험은 금새 닥쳐왔다. 첫 번째 시험은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자신의 신유의 체험을 세상에 간증하는 것이었다. 그 주말 심슨은 뉴 헴프셔주의 인터베일 북쪽에 있는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예정이었다. 하나님께 서약한 대로 심슨은 이 집회에서 신유의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과거처럼 일반설교를 하고 말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날 밤 심슨은 호텔에서 열린 집회에서 신유에 대해 간증함으로 설교때의 실수를 만회했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시험은 다음날 닥쳐왔다.

바로 두 번째 시험으로 교인들이 해발 3천피트의 키르사지산 등정에 초청한 것이다. 당시 심슨의 심장은 극도의 쇄약해서 완만한 계단도 오르기가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이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자신을 치료하신 것을 믿지 않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행위였다. 심슨은 결국 초청을 수락하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첫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심슨은 밀려오는 고통에 심장이 터지는 것같아 졸도할 뻔했다. 그러나 심슨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인고의 걸음을 떼어놓았다. 등산을 계속하며 심슨은 자신을 주장하는 능력의 임재를 느꼈다. 바로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임재를 느낀 것이다. 심슨은 주님의 약속대로 그 능력을 자기 것으로 클레임했던 것이다. 후일 심슨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간증했다. "키르사지산 정상에 올라선 순간의 기분은 마치 두려움과 질병의 세상을 발아래 두고 천국 문앞에 선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시험이 심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세 번 째 시험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딸의 생사가 걸린 가장 어려운 시험이 닥쳐왔다. 휴가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서 세 살난 마가렛이 디프테리아에 걸렸던 것이다. 심슨의 아내는 의사를 불러야 한다고 고집했다. 왜냐면 아내는 사랑하던 아들 멜빌 제닝스도 세 살때 디프테리아로 잃은 경험이 있었기에 마가렛마저 같은 병으로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심슨은 우직하게도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후일 이 일에 대해 간증했다. "그 밤 어린 마가렛의 목젖은 흰눈처럼 하얗게 변했고 온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 저는 어린 마가렛을 눕혀놓고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만일 그 밤에 마가렛의 병이 떠나가지 않으면 마가렛은 생명을 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면 아내를 무슨 낯으로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내의 분노를 감당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밤 떨리는 손으로 마가렛의 이마에 기름을 바르며 예수 이름의 능력을 클레임했습니다. 밤 12시가 될 때까지 마가렛에게는 차도가 없었고 엄청난 불안이 제 심령을 억눌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속히 치유해달라고 간절히 외쳤습니다. 드디어 아침이 왔습니다. 다행히 마가렛의 목젖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일어나 놀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애기 엄마가 그후 저를 바라보던 그 눈길을 저는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날 이후 아내는 한번도 의사를 부르자고 제게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축복은 핍박과 함께

심슨의 신유의 체험은 심슨에게 찾아온 세 번째 위기였다. 첫 번째는 고등학교 시절 겪었던 구원의 확신이었고 두 번째는 루이빌 시절 겪었던 성결의 체험이었다. 신유의 체험은 이 후 30년간의 심슨의 삶과 사역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심슨이 후반 반생을 통해 성취한 사역의 규모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제가 알기에는 심슨만큼 큰 일을 감당한 사람은 사도 바울과 요한 웨슬리외에는 없었읍니다."

당시 심장에 있어 권위자였던 의사조차 가망없는 상태라고 포기했던 심슨이 신유의 체험을 한지 4년이 지난 후 심슨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하신 능력의 근원에 대해 간증하였다. 당시 심슨이 감당하던 직무만 해도 네 가지가 있었다: (1) 큰 선교잡지의 편집인겸 주필이었고; (2) 교회의 담임목사로 매일 야간집회와 주일 3부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였고; (3) 수백 명의 병자들이 와서 치료받던 신유의 집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고; (4) 선교사 양성을 위해 세운 "Missionary Training College" (선교사 양성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심슨 본인과 딸 마가렛이 신유를 받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뉴욕에 퍼졌다. 그 결과 심슨은 두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으로는 걷잡을 수 없이 심슨을 에워싸고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병자들의 문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또 돌팔이 신유꾼이 나타났다고 심슨을 조롱하고 악담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의 문제였다. 참 못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심슨이 질병으로 고통하며 사역하던 시절에는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심슨이 강건하고 활발하게 사역에 임하자 심슨의 사역과 그 동기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슨은 이들의 공격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신유의 체험에 대해 변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고 사람들에게서 이를 인정받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신유의 은사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후일 심슨이 교단을 떠나 별도의 무브먼트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신유사역이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심슨은 자신의 가르침에서 한번도 신유가 중생의 기적이나 성결보다 앞서게 한 적이 없었다. 신유의 체험이 가져온 가장 큰 고통은 주위에서 고립된 것이었다. 물론 심슨은 성결의 체험을 했을 때도 동일한 체험을 했었다. 물론 당시 그 분들이 심슨의 변화에 대해 적개심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심슨의 체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슨과 이들과의 영적괴리는 더욱 심화되어갔다. 왜냐면 심슨은 영적깊이는 더욱 깊어갔으나 이들은 심슨을 감히 따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심슨이 신유의 체험을 한 후에도 심슨은 친구들과 주위사람들에게서 고립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부활의 주님으로 발견했습니다. 그의 성령께서 나의 영에 역사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나의 육신에 역사하심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육신에 부활의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 것을 깨달았을 바로 그 때에 저는 다시금 엄청난 고독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랜 지기들이 다 저를 버린 것 같았습니다. 몇 달 동안이나 홀로 무인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토록 제가 사랑하고 평생 동역했던 수백, 수천명의 사역자들로부터 고립된 것 같았습니다. 그 분들과의 괴리가 어찌 심하였던지 그 분들이 과거 일면식도 없는 분들처럼 생경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핍박과 고난도 심슨으로 하여금 신유의 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멀리하게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제 심슨의 육신의 건강과 생명의 근원이심을 확실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심슨의 신유는 그저 자신이 앓았던 심장병에서의 치유에 한한 것이 아니었다. 심슨의 신유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매일 허락하신 건강과 기운을 포함한 것이었다.

침례와 사임

신유의 체험으로 인해 심슨에게 다가온 고난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동역자들로부터의 고립이었는데 이보다 더욱 심슨을 고립되게 한 사건이 드디어 터지고야 말았다. 장로교단의 목사로서 여러 해 사역하는 동안 심슨은 장로교단에서 행하는 유아세례에 대해 석연치 못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녹스대학 재학중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논문을 제출하여 특상까지 받았던 심슨이었지만 그간 말씀연구와 목회경험을 통해 유아세례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심슨의 입장은 세례는 장성해서 회중앞에서 스스로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야 하며 세례의 형식은 반드시 침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슨은 소신대로 행하는 사람이었다. 늦가을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스산한 어느 날 심슨은 조용히 한 침례교 목사님을 찾아가서 침례를 받았다. 이 목사님은 이태리 이민들로 구성된 침례교회의 담임이셨고 당시 이 교회는 너무 가난하여 학교건물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때의 체험을 심슨은 후일 이렇게 묘사했다. "그 날따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 늦가을이었습니다. 얼음같은 차거운 물속에서 침례를 받았지요. 참석한 사람이라고는 침례하신 목사님의 사모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침례받는 일에 대해 동감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음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이 행위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하던 사역과 삶에서도 떠나야 함은 물론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부터도 외면 당할 것임을 아는 저였습니다. 온 세상에 홀로 버림받은 듯한 고독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침례가 끝났을 때 저는 급히 가운을 걸치고는 주님께 무릎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물속에 침례됨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가 제 영혼을 뒤덮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알버트 심슨 너는 내 죽음에 동참하였으니 이제 내 부활에도 동참하리라.' "

침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심슨에게는 자신의 신앙의 전통과 삶과 사역에 죽음을 선포하는 행위였다. 2년전 부임예배때 심슨은 회중앞에서 13가 장로교회의 신조에 순종할 것임을 선서했다. 이제 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심슨은 자신이 그토록 옹호했던 교단법을 공공연히 위반했던 것이다. 이제 심슨에게 남은 선택은 사임하는 것밖에 없었다.

심슨은 장로교단을 떠난 후 기존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이 때 심슨은 교인가입요건에다 명기했다. 세례를 어떤 형태로 받았던 간에 상관없이 가입할 수 있다. 나중에 심슨은 이 문제에 대해 기록했다. "세례양식에 대해 상관않는다고 해서 다른 복음주의 교회로부터 고립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심슨이 장로교단에서 파직된 원인이 침례에 대한 입장 때문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사실 심슨이 13가 장로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심슨의 말을 들어보자. "13가 장로교회를 맡은 2년간 저는 훌륭한 성도들과 함께 유감없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저의 비젼과 성도들의 비젼이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원했던 것은 잘 믿는 훌륭한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통적인 목회였고 제게 하나님이 원하셨던 목회는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을 불러 복음을 전하는 도시선교였습니다. 그러하니 성도들이 제 비젼을 따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제 비젼이 그들에게는 너무 과격하고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주일간 심사숙고하며 기도한 끝에 심슨은 1881년 10월 31일 월요일 저녁 개최된 당회에서 자신이 13가 장로교회와 노회에서 사임할 뜻을 표명하였다. 심슨의 발언을 들은 당회는 놀라고 당황하여 우선 결정을 유보할 것을 요청하고 다음날 저녁에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정회하였다. 화요일 저녁 속개한 당회는 심슨의 사임을 수락했고 그 다음 날인 수요일 저녁 기도예배에서 심슨목사는 교인들에게 이 결정을 알렸다.

주일인 11월 6일은 심슨이 13가 장로교회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마지막날이었다. 성전은 교인들과 방문객들과 신문기자들로 가득 찼다. 심슨은 누가복음 4장 18절 말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심이라"을 주제로 말씀을 증거했다. 설교말씀을 통하여 심슨은 자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혔다. 뉴욕시에 무수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기존교회들이 이들을 전도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심슨은 자신이 최근 침례를 받은 사실과 장로교단의 유아세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설교 끝에 심슨은 교인들에게 호소했다. 자신이 사임한다고 해서 자신을 따라 교회를 떠남으로 인해 교회에 오명을 초래하거나 교회를 가르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월요일 심슨은 뉴욕 장로교 노회와 회합을 가졌다. 노회의 동료들은 심슨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에 심슨이 다시 노회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헤어질 때, 한 동료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장로교단의 후원없이는 무슨 사역을 해도 실패할 것이다." 그날 아침 교회의 장로님들이 마가렛 사모를 방문해서 참 안되셨다고 위로했다. 심슨은 후일 이에 대해 말했다. "이 분들 말씀이 마치 제 장례식에 참석한 것같다고 제 처에게 말했지요. 어쩌면 제 처도 남편이 이젠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성공회 신부로서 심슨의 친구이셨던 케네스 멕켄지 박사도 이렇게 말했다. "실패할 것이 뻔한 모험을 하겠다고 앞날이 촉망받는 사역지를 내팽개친 것 같았지요." 노회의 동료목사들이 헤어질 때 심슨을 동정하는 것 같았지만 이들 나름대로 심슨의 외고집에 노했던 것같았다. 노회는 성도들의 간절히 요청에도 불구하고 심슨이 그 다음 주일부터 일체 설교와 성찬식집례를 못하도록 금지했던 것이다.

일단 교회를 사임하고 나니 심슨의 형편은 격변했다. 당시 거금이던 년봉 5천불의 안정된 수입이 사라져 버리고 나니 당장 아내와 네 자녀를 부양할 돈을 어디에서 장만할 것인지도 난감하였다. 뉴욕시에서 가장 권위있는 강단에서 설교를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명인사가 갑자기 무명인사로 몰락한 것 같았다. 심슨은 갑자기 이 거대한 도시에서 미아가 된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을 따르는 이도 없고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이도 없고 직장을 구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심슨이 가졌던 뉴욕 도시선교와 해외선교의 비젼을 수행할 길도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당시 심슨의 절친한 친구이며 당시 뉴욕노회에 소속되었던 죤 홀 박사가 심슨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자네에게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겠네. 지금은 자네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만 조금 지나면 마음이 바뀌어 돌아올거야." 홀 박사는 친구를 아끼는 의도에서 이런 말을 했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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