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7일 촉칙칙에서 칸보그드 거쳐 하탄볼락으로

by JintaeKim posted Aug 3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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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 27일 촉칙칙에서 칸보그드 거쳐 하탄볼락으로

 

어제는 하루를 촉칙칙에서 전도로 보냈고 오늘은 다시 푸르공을 타고 도르노고비의 하탄볼락까지 왼종일 길을 가야 한다. 촉칙칙은 몽골 최남단 우문고비에 위치했고 우리가 처음 방문하는 하탄볼락은 동남쪽으로 국경을 따라 가서 도르노고비로 넘어가야 한다. 가는 길이 중국 국경에서 50 킬로 내지 90 킬로 밖에 안되는 몽골 최남단 길이고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들도 최남단 도시들이다. 하탄볼락에는 한밤중에나 도착할 것이다. 이번 우리 여행은 따지고 보면 고비사막 외곽의 주요도시들을 감싸듯이 북에서 시작하여 남서로 내려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쪽에 면한 도시들을 도는 모양이다. 마치 복음으로 고비사막 지역 전체를 포위하는 형세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우문고비 최대도시인 칸보그드이다. 이 도시는 인구 1만명의 대도시로 오양톨고이 동광산 때문에 생긴 도시이다. 몽골에서 기가 가장 센 영산을 배경으로 선 도시이다. 이 산맥은 무려 40 킬로에 걸쳐 고비사막에 뻗어있는 바위산맥으로 몽골인들에게 영산으로 취급되기에 이 도시 이름도 칸의 영산이란 뜻의 칸보그드이다. 오양톨고이 광산에서 한 사람 당 2천불씩으로 무상으로 지원하여 이 곳에 거처를 마련하게 한 광산직원들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칸보그드는 남부 고비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먼저 상대적으로 고비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서 모든 통신수단이나 부대시설이 다 되어 있고, 우리가 전략적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키려는 호르뜨, 촉칙칙, 하탄볼락 등 도시들을 관할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법 있으나 지도자로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5년전 임선교사네가 이 곳에 와서 1주일간 머물면서 전도에 힘썼던 곳으로 당시 부시장이던 훌레의 아내를 지도자로 삼아 교회를 시작하게 했으나 열정이 부족하여 교회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았다. 이번에 방문하는 목적도 교회를 제대로 성장시킬 만한 열정있는 사람을 찾고자 하는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다음 여행으로 미루고 바로 떠날 예정이다. 몽골 교회개척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희생적이고 열성적인 지도자를 찾아 양육하여 세우는 일이다. 요는 이런 지도자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갈 길이 먼 지라 아침 6시에 일어나 식사도 하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운전대는 우리의 신실한 어기가 잡았다. 잠시 촉칙칙의 포장도로을 즐기다가 금방 황당한 사막길로 접어드니 우리가 남고비에 온 것을 환영하는 듯 낙타 무리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 보니 주인도 없는 낙타들이 제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 물으니 다 주인이 있단다. 낙타란 놈은 자유로운 성격을 가져서 새끼가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 멋대로 광야에서 산다고 했다. 그러나 낙인을 찍어 놓았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주인이 확인할 수 있다.

 

한 시간 여 차를 몰고 나니 오른 쪽에 시커먼 석탄더미가 쌓인 시설이 보였다. 종타붕톨고이로 석탄집산지 중 하나이다. 타룬톨고이에는 앞으로 300년간 채굴할 수 있는 양의 양질의 유연탄이 묻혀있어 이를 채굴하고 수송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다. 길에는 뒤에 두 량의 컨테이너가 실린 거대한 트럭들이 수시로 다니는데 모두 석탄을 중국에 수송하는 차들로 한 번에 100톤까지 실을 수 있다. 이렇게 트럭으로 국경까지 싣고 가면 국경에서 중국으로 수송하는 회사들이 이를 받아 수송을 한다. 기차로 직접 수송하면 될 것을 철로가 없어 이렇게 트럭으로 수송하니 길도 쉬 망가지고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엄청난 낭비이다. 그래서 중국정부는 중국에서 타룬톨고이까지 150 킬로의 거리를 자기들 비용으로 기차선을 깔아서 바로 수송하겠다고 제의했으나, 몽골정부는 중국의 군대가 이를 이용해 쉽게 밀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결국 이를 수락하고 삼성물산에 이를 발주했으나 계약금을 삼성에 지불하지 않아 공사가 지연되고 있다.

 

2시간 여 더 차를 모니 멀리 오양톨고이 광산 건물이 보였다. 원래 캐나다 아이반호사가 36 퍼센트, 호주 리오틴토사가 30 퍼센트, 몽골정부 34 퍼센트 비율로 지분을 나누어 운영하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해서 아이반호사가 우선 70억불 투자로 비행장, 동력, 도로 등 모든 부대시설을 갖추고 가동시켰다. 계약체결후 국제원자재 가격이 급증하고 수요가 늘어나자 몽골정부는 자원보호정책의 일환으로 2009년이 외국인 투자시 지분한도를 66퍼센트로 제한했다. 작년 내가 몽골 방문시에도 몽골민족주의자들을 부추긴 몽골정부가 이 계약을 취소하고 몽골정부의 지분을 대폭 늘리고 공장운영도 몽골 쪽에서 관할하도록 재계약을 요구하는 바람에 추가투자 50억불을 포기하고 현상유지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몽골의 자원개발에 너도 나도 참여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서구열강은 과연 몽골정부가 이 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50억불이 추가로 몽골에 풀릴 것이라는 예상 하에 모든 것을 확장시켰던 몽골정부는 현재 엄청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욕심이 과하면 수욕만 당하는 법이다.  국제사회에서 생존하려면 국제법을 준수해야 하는데 계약을 제 멋대로 취소하려는 나라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자원을 가졌으면 무얼하는가? 사회간접자본도 안되어 있고, 인구도 3백만으로 시장단위가 되지 않아 자체산업을 육성할 수 없고, 광물자원을 개발할 지식자원이나 장비도 없고, 숙련된 노동력도 없다. 그나마 가진 것이라곤 어쭙잖은 자존심만 있는 나라가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앞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사람은 왕따 당하게 되어 있다. 자원의 보고라는 이점과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이용해서 이들의 요구를 들어 주면서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는 고도의 외교정책이 요구되는데 몽골정부는 한참 멀었다.  고집 부리지 않아야 할 때 고집을 부리고 요구하면 안되는 일은 요구를 하니 이러다가 국제사회에서 완전한 미아가 되거나 아니면 열강이 작당하고 나눠 가지는 비극을 당할 것이다. 국제관계는 철저하게 이해관계와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된다. 힘없는 자가 고집과 자존심만 있으면 무엇이 남겠는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따를 것인가? 이미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지났으니 이젠 개방 밖에 없다. 어차피 개방하려면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가니 왼쪽에 우물이 보이고 여자 세 명이 트럭에 물통을 잔뜩 싣고 와서 물을 긷고 있었다. 몽골 여자들은 참 용감하다. 남자 하는 일 여자 하는 일이 따로 없다. 우리도 물을 길을 겸 차를 멈추었다. 임선교사가 마셔 보더니 물맛이 좋다고 했다. 물을 길으러 온 여자들은 오양톨고이 광산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뭉크와 유니스가 쪼르르 쫓아오더니 전도지를 전하니 덥석 받았다. 근처에 있던 낙타 떼 가운데 세 마리가 우물로 와서 물 달라고 눈짓하는데 두레박을 가지고 온 이 자매들이 물 주지 않았다. 우리가 사진을 찍으니 낙타들이  얌전하게 폼을 잡았다. 사진 찍는다니까 기분이 좋은 것이다. 낙타란 놈은 보기보다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다.  

 

오양톨고이에 접어드니 거대한 부지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한 쪽은 광산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게르가 공동묘지 봉분처럼 펼쳐있었다. 진기한 풍경이다. 잠시 차를 멈추고 공장시설을 찍으며 쉬니 시간이 벌써 11시이다. 오양톨고이는 일부 포장도로였으나 벗어나니 금방 험한 흙길이 우리를 맞았다. 여기서 우리가 갈 칸보그드는 45 킬로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고비 사막은 사실 사막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중동의 사막처럼 모래더미로 뒤덮인 곳만 있는 곳이 아니고 그런 대로 풀포기도 있어 낙타나 짐승들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지형도 어떤 곳은 바위산인 곳도 있고, 드넓은 평원인 곳도 있다. 고비사막을 운전하면서 큰 애로는 먼지바람을 만나는 것이다. 운전을 하다 보면 저 멀리부터 하늘이 시커멓게 뒤덮인 것을 보고 비가 오나 보다 하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그게 바로 먼지바람이다. 먼지바람이 어찌나 극성인지 그 속에 들어가면 앞도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너무 뜨거운지라 창문을 열어두고 가다가 먼지바람을 만나면 차 안이 온통 먼지더미로 변한다. 안경은 아무리 닦아도 계속 먼지로 가려지고 마스크를 쓰면 너무 더워서 견디기 어렵다. 이러한 환경에서 12년째 사역해 온 임선교사는 기관지가 좋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11 35분이 되니 오른편에 바위로 된 멋진 산맥이 뻗어있었다. 이 산이 바로 칸보그드 뒤로 이어지는 몽골에서 기가 가장 신령한 영산이다.  잠시 더 차를 모니 칸보그드가 나왔다. 과거 교회 자리로 갔더니 교회로 사용하던 게르가 사라지고 없었다. 뭉크가 전화를 하니 교회 지도자의 남편 훌레가 곧 오겠다고 하니 기다리라고 했다. 훌레를 따라 새로 이사했다는 곳으로 가니 벌써 오후 1 30분이었다. 현재 다시 부시장이 되어 공무로 달른자드갈에 급히 가야 한대서 잠시 교제한 후 작별하고 칸보그드로 출발했다. 가는 길이 사막 한 가운데라 어떤 곳은 숫제 길이 없기도 하고 모래 속을 엉기며 가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금방 모래에 빠져 차가 꼼짝도 않았다. 모두 차에서 내리게 하고 임선교사와 내가 차를 밀어 빼내는데 나는 모래를 옴팡 뒤집어 썼다. 그래도 괌에서 몸관리를 잘해서 이럴 때 도움이 된다. 가는 길에 표지도 없고 길도 길 같지 않은 길이라 길을 잘못 들기 쉽상인데 그래도 어기는 이를 잘 찾아 간다. 그래도 길을 헤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가도 가도 차 한 대 못 만나고 사람도 못 만나는 외로운 길을 가는데 오후 2시에야 드디어 낙타를 기르는 유목민 거처가 오른 쪽에 하나 보였다. 낙타 밀크를 사러 가자며 차를 그리로 돌리니 거처로 우리를 인도한 후 양고기 삶은 것과 수태차를 내놓았다. 양고기를 먹어보니 다른 곳에서 먹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맛있다. 내가 너무 잘 먹으니까 다들 눈이 뚱그래져서 나 먹는 모습만 구경했다. 여주인이 정강이부분을 하나 솥에서 꺼내서 주었다. 잘라 먹으니 이건 정말 일미이다. 고비사막의 고기 맛은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이 좋다 하더니 과연 별미였다. 좀 있으니 대접에 무얼  부어서 주는데 먹어보니 낙타젓으로 만든 에이락이었다. 입에 짝짝 붙는 것이 이 또한 일미이다. 말젖으로 만든 것보다 기름기가 많고 점도가 높았다. 그리고 맛도 특이했다. 영양분도 훨씬 많은 듯했다. 여주인이 낙타젖을 40년된 나무통에 부어 넣고 계속 저어주고 있다. 이 나무조각을 짜서 만든 나무통은 20갤론 정도 용량의 원통형 통인데 이 집의 가보 1호이다. 이렇게 저어주면 서서히 발효가 진행되어 약간의 알콜성분이 있는 에이락이 된다.  낙타젖이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새끼가 있어야 짤 수 있어 낙타젖은 양젖에 비해 가격이 훨씬 비싸다. 기름끼 많은 고기를 손으로 뜯어 먹다 보니 손에 기름과 고기가 묻어 지저분해졌다. 주인 아주머니가 모두 나오라고 하더니 낙타 떼 옆에 있는 물통에서 호스를 꺼내 낙타 물 먹는 통에 부으며 손을 씻고 세수를 하라고 했다. 교대로 씻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이렇게 세수를 한 지가 이틀 째이니 오죽할까? 앞으로도 이렇게 손을 씻을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을 것이다. 손을 씻고 나니 아주머니가 1년도 되지 않은 새끼 낙타를 데리고 오셔서 우리에게 고삐를 쥐고 사진을 찍게 했다. 이 새끼낙타는 참 이쁘게 생긴 녀석인데 새끼라 그러한지 낯선 사람에게 겁을 먹었다. 저마다 사진을 찍어대는데 나는 뽀뽀하는 포즈를 잡았다. 에스더 선교사도 나를 따라 포즈를 잡는데 키가 모자라 깡충 뛰었다. 나이 먹어도 헛 먹었어요. 어떨 때는 3살 짜리 여아같고 어떨 때는 노숙한 할머니 같고, 참 여자의 모습은 천 개라더니 그 말이 맞기는 맞는가 보다.    

 

전도지와 성경을 주며 복음을 전하니 남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데 아주머니가 관심을 보이며 우리에게 비가 내리도록 기도를 해 달라고 했다. 요사이 고비 일대가 너무 가물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200 킬로는 넘게 달려야 하탄볼락에 도착한다는데 시계는 벌써 오후 2 30분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기도는 해 드리고 가야지. 함께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고 나서 출발했다.

길을 재촉한다고 지름길을 택했는데 외려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잡아 더 헤매게 되었다. 한참 달리다 3 20분이나 되었을 때이다. 날더러 뒷자리에서 고함을 치고 난리였다. 앞을 보고 왠 짐승들이 광야를 질주하는데 잘 보니 야생 당나귀 떼였다. 사진을 찍으려고 몇 장을 눌렀는데 워낙 길이 험해 차가 흔들리는데다, 너무 빨리 당나귀들이 달려서 제대로 찍기가 어려웠다. 20분 쯤 가니 이번에는 야생 말떼가 광야를 질주했다. 이거 사파리도 이쯤 되면 제대로 된 사파리이다. 캐냐 국립공원은 관광자원으로 개발이 되어서 많은 사람이 경험하지만 우리처럼 고비사막에서 이런 광경을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드넓은 평원을 마음껏 질주하는 야생동물들의 향연이었다. 이 모두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말떼의 질주를 본 지 얼마 안되었는데 유니스가 차를 돌리라고 난리였다. 왜 그런가 했더니 고비사막에만 나는 고요라는 열매를 채취하자고 그런 것이다. 이 열매는 이들에게 불로초로 알려진 것으로 이걸 장복하면 100년도 쉽게 산다고 했다. 이 곳에만 자생하는 식물이라, 이렇게 열매를  채취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다. 다들 고요 채취에 열중한 동안 나도 열매를 따서 먹어 보니 시큼한 것이 먹을 만했다. 한 주먹 입안에 털어넣고 씨만 따로 뱉어내는데 아르항가이에서 온 다브가이 목사가 내 손에 한 줌 쥐어주었다. 선생이라고 섬기는 것이다. 별 건 아니지만 섬기는 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감사의 마음을 뭉쳐서 내 가슴에 담으니 가슴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다들 고요 채취에 열을 올리는데 어쩐 일인지 날이 뜨겁지가 않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맘 때의 고비사막은 견디기 어렵게 뜨거운 법인데 우리 있는 곳에만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시원했다. 가만히 보니 우리가 비가 오도록 기도했던 낙타 유목민이 사는 지역은 하늘이 시커먼 것이 이미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도하고 온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하나님은 종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가 전도한 분들에게 증거를 보이신 것이다. 임선교사께서 말했다.

 

우리는 비오게 해 달라고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 완악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고요로 목을 축이고 길을 재촉하는데 심심치 않게 당나귀떼와 말떼의 질주가 우리를 맞았다. 조금 더 가니 사슴 두 마리가 신나게 달려 가는 모습도 보였다. 꽁지 있는 꼬리부분이 하얀 놈으로 사향사슴인가 보다. 몇 시간 광야를 달리니 드디어 유목민의 게르가 한 채 눈에 뜨였다. 낙타 유목민 거처를 떠난 지 3시간이 훨씬 경과한 후의 일이니 사람 사는 곳이 얼마나 드문 지 알겠다. 계속 길을 재촉하는데 유니스가 오른 쪽을 가리키며 저리로 계속 가면 중국 국경이고 국경을 넘으면 길림성이라 했다. 우리가 오늘 가는 길은 고비사막 남단 중국 국경 부근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길이라 자칫 잘못하면 중국으로 넘어간다. 국경 근처라 중국 측에서 인터넷을 막아 놓아 이 지역을 다니는 동안은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하다. 덕분에 온라인 강의도 당분간 중단했다. 답답하긴 하지만 외려 전도여행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어 이 또한 은혜이다.   

 

저녁 7시가 되니 차 뒤로 사막의 석양이 우리 눈을 눈부시게 했다. 이 또한 놓칠 수 없는 진기한 풍경이라 차를 멈추고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길을 재촉하는데 도시 사람 사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저녁 9 40분에 하탄볼락에 도착했는데 도시가 불빛도 제대로 없고 캄캄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오는 곳이라 어디로 가서 머물지 몰라 차를 세우고 불빛이 있는 집문을 두드려서 겨우 수소문해서 동네 유일한 방 두 개짜리 조칟보달 (숙박업체를 가리키는 몽골어)에 드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참 멀리도 왔다. 아침 6시에 촉칙칙에서 출발하여 저녁 10시에야 이 곳에 도착했으니 16시간 운전한 셈이다. 아마 500 킬로는 족히 되는 거리를 그것도 길도 제대로 없는 길을 달려온 것이다. 얼마나 적막한 길인지 칸보그드를 출발하여 만난 차는 한 대 뿐이었고 사람 사는 거처는 4곳 뿐이었다. 대부분을 어기가 운전했으니 참 수고가 많았다. 이런 길에서 차라도 고장나면 꼼짝없이 광야에서 뼈만 남기게 되는 것이다. 어기가 동행하지 않았으면 정말 어려울 뻔 했다.  

 

내일은 또 이 곳에서 전도를 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임선교사는 차에서 주무시고 우리는 여자 한 방 남자 한 방 나누어서 오랜만에 침대에서 눈을 붙였다. 비록 물도 안 주고 화장실도 없는 콧구멍만한 공간이지만 그래도 침대에서 잔다는 것이 감지덕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