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9, 2014 도르노고비 울란바드라흐 전도와 자밍우드 행

by JintaeKim posted Aug 3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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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9, 2014 도르노고비 울란바드라흐 전도와 자밍우드 행

 

 

어제 밤은 약간 추위에 떨기는 했지만 차 안에서 숙면을 취했다. 새벽녘에 깨어서 화장실을 다녀 오고 나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다시 잠을 들었다 깨니 6시였다. 기상하여 근처를 산보하다 돌아와 간단한 비누세수와 머리를 감는 호사를 누렸다. 물론 그렇다고 화끈하게 씻은 것은 아니고 애기 오줌 나오듯 질금거리는 물로 머리를 살짝 적신 다음, 비누를 문지른 후 손을 벅벅 비벼댄 후 물 한 모금 적시고 또 비벼대고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한 후 비누만 제거하는 정도로 머리를 씻는 것이다. 그래도 물이 얼마나 귀한데 이렇게 머리까지 감았으니 그게 어디인가?

 

7 30분에 함께 모여 아침예배를 드렸다. 내가 사도행전 20 17절에서 28절로  말씀을 전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처럼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복음을 전하도록 격려했다. 바울처럼 달려 갈 길을 달리는 100 미터 선수처럼 생명을 걸고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에 힘쓰라고 전하니 다들 각오를 새롭게 했다.

 

예배를 마친 후 임선교사는 이 건물의 규격을 측정하기에 바쁘다. 왜 그런가 했더니 건물의 구조가 아주 간단하고 연료효율을 올리는 것이라 앞으로 교회를 지을 때에 이를 본따면 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교회건물은 몽골실정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몽골이 겨울이 너무 길고 혹한이라 난방비가 목줄을 잡는다. 과거 선교사들이 난방비를 감안하지 않고 기존교회 구조의 근사한 건물을 지었다가 선교비는 모두 난방비로 낭비하며 버티다가 선교사가 떠나고 나면 몽골교인들이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건물을 모두 뜯어서 목재로 팔아 버리는 사례가 허다하다. 우선 지붕이 낮아 열손실이 적어야 하며, 최소한의 공간을 사용하도록 해야 하고 벽난로를 설치해서 열을 최대한으로 건물 안에 머물에 해야 한다. 교회 내부도 추운 겨울에 비워 둘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침실로 사용하고 예배 때는 침대를 치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하면 된다. 교인의 규모가 아직 10명 미만인 경우에는 그냥 게르 (몽골의 천막구조의 이동식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현실적이다. 건물로서 이상적인 구조는 지금 임선교사가 측정하고 있는 이 집 구조이다. 건물은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제일 안쪽에 침실, 그리고 부엌 겸 거실 그 사이 벽은 벽난로이다. 제일 바깥쪽은 현관으로 잡다한 것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천정도 낮아서 열손실이 적게 지어졌다. 좌우간 임선교사의 머리에는 교회개척 밖에 없어 무얼 하나 보아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오늘 아침 가장 혼이 난 사람은 에스더 선교사였다. 하탄볼락에서 충전해 준다고 임선교사 전화기와 카메라 충전기를 가져 갔는데 충전한 후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임선교사께서 본인이 한다고 하는데도 부득부득 자기가 챙긴다고 하다가 이런 사고를 또 쳤으니 임선교사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갈 수가 없다. 에스더 선교사는 자신이 잘 챙겨서 충전을 해서 침대 옆에 놓아 두었다가 떠나 올 때 거기 있는 것은 다 챙겨왔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하탄볼락 조칟보달 (숙박업체란 뜻의 몽골어) 주인의 연락처를 가지고 온 터라 아침부터 전화를 해 대니 연락이 되었다. 다행히 침대 뒷 편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인이 줏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에스더 선교사가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잠버릇이 험해서 자면서 발길질을 해대는 습관이 있는데 아마도 그 날 밤도 자다가 발길로 걷어차서 침대 너머로 떨어졌나 보네요.”

 

아마도 백말 띠쯤 되나 보다. 어떻게 이를 전달 받을까 했는데, 마침 오늘 이 분이 물건할 겸, 의학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만날 겸 오늘 생산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생산은 자밍우드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라 우리가 자밍우드에서 올라가는 길에 들를 수 있다. 그래 일정을 바꿔서 자밍우드에서 주일예배만 드리고 생산으로 이동해서 생산에 들러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생산은 자밍우드에서 울란바타르 가는 기차가 한 시간을 머물 정도로 중요한 도시이다. 타룬톨고이 유연탄 광산과 오양톨고이 동광산의 제품을 중국으로 수송하기 위해 몽골정부가 타룬톨고이에서 생산까지 철로를 신규로 깔아 생산에서 자밍우드 경유 북경행 노선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경제적 부족으로 현실화되지 않았다.  타룬톨고이에서 중국으로 노선을 깔면 불과 150 킬로인데 이렇게 생산을 우회하면 400 킬로가 넘으니 이런 머리를 굴렸던 몽골정부가 얼마나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상상이 된다. 유연탄과 구리 공히 가장 큰 시장은 중국이다. 두 제품 모두 수송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다른 나라로 가져 가는 것이 경제성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중국은 욕심 같아선 전 제품을 모두 가져 가고 싶지만 몽골은 시장 다변화를 추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생산이 40만 인구의 대도시로 탈바꿈될 것이란 기대로 부풀어 올라 투자를 증대했던 사람들이 된서리를 맞았으나 그래도 이 곳은 몽골의 주요 대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마침 생산에는 큰 의과대학이 있고 많은 학생이 이 곳에 있으니 이번 기회에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산에 교회를 세우는 작업을 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감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자매도 우리 자밍우드 교회 교인인 아르나의 친척이라 어차피 하탄볼락 교회 개척의 일꾼이 될 것이니 이렇게 다시 교제를 나누게 된 것도 하나님의 안배이다. 덕분에 여행이 더 길어졌다.

 

아침식사 후 다들 전도하러 내 보냈다. 그런데 왠 꼬마녀석이 하나 찾아왔다. 뭉크가 아이에게 복음을 전하니 하나님께 어떻게 등록하느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이 곳에 아직 교회가 없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 오전 11시에 조칟 보달에 교인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했으니 이 기회에 교회를 시작하게 하면 좋겠다.

 

어기와 다브가이는 차 브레이크에 이상이 있다고 차를 주물럭거리는데 작업이 쉽지 않은가 보다. 어제 운전해 보니 뒷쪽 바퀴까지 브레이크의 동력이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좌우간 이 프루공이란 차는 싸고 단순하기는 하나 문제가 너무 많은 차이다.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 터진다. 엔진 오일도 수시로 채우야 한다. 엔진오일을 먹는 차인 것이다. 차에 관해 잘 알고 항상 손 볼 능력이 있고 준비성이 있는 사람만이 이런 차를 몰 수 있다.

 

남자들은 차 고친다고 웃통을 벗어 제치고 설치는 동안 여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냈더니 큰 소득 없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일하러 나간데다 날이 너무 더워서 길이나 가게에 통 사람이 보이지 않는단다. 그런데 잠시 있으니 에스더 선교사가 날더러 주일학교를 시작했으니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가 보니 그새 동네 꼬마들을 열 명 정도 모아놓고 태권도 동작을 가르친다고 난리이고 아이들은 저마다 신이 나서 따라 하고 있다. 말이 태권도 동작이지 내 눈에는 미친 말의 뒷발질로 보인다. 나를 태권도 박시 (선생, 목사, 의사, 사범 모두 몽골인들은 박시라 부른다)라고 소개하며 나더러 태권도 동작을 하나 가르치라는데 어째 영 맘이 내키지 않아 거부했다.

 

내가 무슨 원숭이도 아니고.”

 

우리 지도자들 가운데 여자 세 사람도 오더니 아이들에게 전도지도 주고 초코파이도 나눠주며 같이 어울렸다. 이 곳에 교회만 있다면 이 아이들을 인도하여 주일학교를 시작하면 될텐데 아쉽지만 일단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는 법까지 가르쳐 준 것으로 만족했다.

 

아무래도 낮시간에 전도를 하러 다니기에는 힘들고 자밍우드로 갈 길은 멀기에 곧 출발하려고 보니 물이 다 떨어졌다. 그래 근처에 우물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에스더 선교사와 유니스와 함께 물통을 들고 옆 집에 가서 물으니 우물이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걸어서 가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조금 전에 길어 온 것이 있으니 나눠 주겠다고 해서 물을 담는데, 이 집 주인 아저씨가 오더니 또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몽골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하고 싶은 얘기도 많다. 이 곳은 물이 귀해서 이 우물도 주민 중에 돈이 있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파서 돈을 받고 물을 긷게 한다. 작년에 독일인 두 사람이 근처 광야에서 헤매다 물이 떨어져 정신이 없던 중에 신기루 현상에 속아 물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 온 모터 싸이클 팀도 그 중 한 명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죽었다니 이런 곳에서의 생존이 얼마나 물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 실감이 났다. 아닌게 아니라 햇빛의 강도도 장난이 아니고 메마른 황야를 보느라면 지평선 저너머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눈을 어지럽히고 속이 메슥거려 온다. 이런 광야에서 30분만 헤매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다가 쓰러져 죽기 싶상이다. 너무 날씨가 뜨거워서 그러한지 한번 길을 나서서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데 잘해야 차 한 대 조우할까 말까 한 것도 그래서 그러한 가 보다. 과거 이스라엘 사해광야에서 15분 정도 시험삼아 헤매다가 쓰러질 뻔 했는데 이 곳은 이스라엘 광야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이런 광야에 익숙한 몽골지도자들도 더위를 먹었는지 간밤에는 온통 토하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내 몸도 이미 정상이 아니다.

 

돈을 안 받으려 하는 것을 에스더 선교사가 천 뚜구르를 억지로 쥐어 준 후 조칟보달에 돌아오니 그새 숙소를 제공해 준 나사란 자매가 와서 모친이 무릎이 많이 아프셔서 거동을 못하시니 집에 와서 기도해 달라고 했다. 임선교사와 함께 기름병을 들고 들어가니 집을 어찌나 깔끔하게 꾸며 놓았는지 나사의 성품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사의 모친은 84세인데 아직도 깨끗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계셨다. 책꽂이를 보니 레닌사상을 비롯한 각종 서적이 꽃혀 있고 8년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나사의 아버지 사진도 보였다. 나사의 부친은 원래 이 동네의 대 라마였고 그 남편은 이 동네의 시장이었는데 과음으로 죽었다 한다. 할머니를 보니 손에 염주를 들고서 중얼중얼하시는 것이 라마불교를 믿는 분인 듯해서 우선 임선교사께서 복음부터 전했다. 함께 따라 들어온 잉케도 이에 합류해서 할머니에게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한 후, 내가 기름 바르며 기도했더니 이 할머니가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함께 기도하는지 보는 내 마음이 흐뭇했다.     

 

나사는 이 곳 학교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잠시 나왔다고 하며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이 자매를 잘 훈련하여 이 가정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 임선교사가 지도자들과 함께 이 자매에게 성경책과 전도지, 풍요로운 삶 등 자료를 주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예배는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하다 보니 시간이 금새 오후 2시였다. 이렇게 임선교사에게 나사로 하여금 이 곳에 교회를 세우도록 훈련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안배가 놀라왔다. 이미 언급한 대로 우리는 이틀 후 자밍우드에 도착해서 자밍우드 교회의 오른칙칙을 만나고 나서 나사의 아버지가 바로 오른칙칙의 오빠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하탄볼락, 울란바드라흐, 자밍우드를 잇는 교회개척의 씨앗이 자연스럽게 심어진 것이다. 우리가 자밍우드에서 묵게 되는 조칟보달도 오른칙칙의 언니가 운영하는 곳이다. 나사도 학교로 돌아 가야 하고 우리도 갈 길이 바쁜 지라 이 정도 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오후 2 20분에 자밍우드로 핸들을 돌렸다. 우리는 그저 심을 뿐이지, 거두시는 이는 결국 하나님이시다. 운전은 계속 신실한 어기가 감당했다.

 

자밍우드로 가는 길목에 개스 스테이션이 있어 기름을 넣으며 거기 일하는 자매에게 전도하러 하니 예수 믿는다고 했다. 그동안 선교사들이 다녀 간 적이 있어 전도받고 믿는 사람은 이렇게 도처에 있는데 문제는 모이는 교회가 없는 것이다. 비록 짧은 훈련이지만 나사에게 교회를 시작하는 책임을 맡기고 계속 격려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 같다.

 

마을을 벗어나 잠시 가는데 오른 쪽에 게르가 하나 보여 길을 확인하려고 어기가 들어갔다 오더니, 안에 있는 사람이 벙어리라 수화로 대답을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 먹을 수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어기는 코메디언이다. 퉁명스럽게 얘기를 하는 것이 외려 사람들에게 폭소를 자아낸다. 몽골에는 귀머거리, 벙어리가 참 흔하다. 아마도 긴 겨울때문에 그러한가 보다. 그냥 눈짐작으로 어기가 차를 계속 몰아 자밍우드로 가는 길을 가는데 길 가에 왠 큰 자루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그 안에 이상한 것이 들어 있는 듯하여 에스더 선교사가 유니스에게 물으니 사람 시체를 넣은 자루라고 했다. 뭉크의 말에 의하면 고비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티벳인들의 습관대로 아직도 조장을 치르는 경우가 흔하다. 티벳에서는 라마승이 시체를 잘라서 독수리에게 던져 주어 먹게 하는데 이 곳에서는 그냥 이렇게 시체를 토막내어 자루에 담아 사막에 던져 놓아 새들이 와서 쪼아 먹게 한다. 워낙이 메마르고 뜨거운 사막이라 이렇게 내 놓으면 일부는 새들이 쪼아먹고 나머지는 사흘도 안되어 부패하여 뼈만 남는다. 장례를 맡은 라마승이 하라는 대로 주민들은 따라서 하는 것인데, 참 죽은 이의 몸에 대한 아무 배려가 없는 세상이다. 물론 조장의 배경에는 이렇게 새에게 시체를 먹게 함으로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게 한다는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인명을 중시하지 않고 죽은 몸도 경시하는 풍습이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수만명의 라마승들을 처형함으로 라마승들의 정치적 지배는 끝났지만 아직도 몽골인들의 삶 가운데 라마승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크고 작은 문제가 있으면 모두 라마승에게 가서 점을 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행한다. 특히 장례는 모두 라마승의 지시에 따른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라마승들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들어 보자. 이들이 점을 칠 때에 사용하는 법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정강이 뼈로 만든 피리인데 그 소리가 소름이 끼친다. 라마승들은 여자 아이를 하나 입양하여 18년동안 처녀로 키운 후 죽이고 그 오른 쪽 정강이 뼈를 빼어 구멍을 뚫어 피리를 만들어서 이렇게 법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라마승마다 이 법구를 하나씩 가졌으니 얼마나 많은 몽골 처녀들이 희생되었겠는가 생각해도 끔찍했다.  러시아가 수만명의 라마승들을 죽여 이들의 몽골지배를 종식시킨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다.

 

1시간 여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어지러운 광야 모래길을 차를 몰아 가다 보니 황막하던 지형이 제법 풀이 있는 초장으로 바뀌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메마른 황야 가운데 제법 큰 호수가 형성되어 있었다. 첫번 째 호수를 지나 두 번째 호수에서 휴식을 취할 겸 차를 세우고 자리를 펴니 시간이 어느 새 오후 4시였다. 호수에는 하얀 새, 검은 새 온갖 새들이 그 자태를 뽐내고 물가에는 낙타의 무리가 한가롭게 목을 적시고 있었다. 이 곳에는 항상 물이 있기 때문에 철새들이 날아들어서 이렇게 깃든다. 지금까지 광야를 지나 오면서 새를 보기가 힘들었는데 이렇게 많은 새를 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차를 세우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습관적으로 하는 몇 가지 일이 있다. 먼저 급한 볼 일부터 다들 본다. 누가 보던 말든 다들 배설부터 하는데 이젠 익숙해서 아무 감각없이 옷을 내린다. 여자들이 주섬 주섬 남은 빵조각과 러시아 제 햄, 오이를 수태차와 양유와 함께 내려 와서 아침식사 후 아무 것도 먹지 않아 허기졌던 배를 채웠다. 사실 이렇게 될 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에스더 선교사가 배가 불러 먹기 싫다는 내게 억지로 이것 저것 먹일 때부터 아이고 오늘 제대로 못 먹고 고생하겠구나했다. 작년 고비사막 전도여행시에 주는 것을 배부르다고 안 먹었다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여섯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못 먹고 된통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광야에서 보온병에 넣어온 따끈따끈한 수태차 한 잔은 단숨에 갈증을 가시게 하고 생기를 불어 넣게 했다. 양유와 물을 반반씩 섞고 거기에 차 두 봉지 정도 넣어서 끓인 것인데 물맛과 어떤 짐승의 젖이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 또한 차의 질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몽골인의 가정을 방문하면 어디나 제일 먼저 내 오는 것이 바로 수태차이다. 작년 우리를 따라 자밍우드에 가서 교회신축내부도면을 그렸던 김용호 전도사는 게르에서 수태차 주는 것을 넙죽 받아 마신 후 계속 설사로 고생했는데 나는 체질이 이 곳 사람같아 아무리 마셔도 문제가 없다.

 

우리끼리 식사를 하는데 임선교사께서 일어서더니 슬슬 호수가로 다가갔다. 내가 척 보니 아무래도 호수에 실례를 하러 가는 듯하여 돌아 오라고 고함을 치니 몽골지도자들도 하나같이 안된다고 손사래을 쳤다. 그래 또 얘기를 들려 주는데 징키스칸이 군대를 몰고 다니던 시절 호수에다 실례를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입을 물에 쳐박고 마시는 자들은 모두 참수형으로 다스렸다고 했다. 물은 반드시 손으로 떠서 한 모금씩 마시게 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과 짐승이 함께 먹어야 하는 생명수인 물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군율을 엄하게 집행했던 징키스칸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렇게 몽골인들은 이야기거리가 많은 사람들이다. 특히 징키스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를 매우 좋아하고 외국인들이 이 곳에 와서 조난당하거나 죽은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 거리가 된다.

 

물가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출발하는데 뒤에 탄 에스더 선교사가 차를 세우라고 난리였다. 눈 앞에 게르가 있어서 전도하러고 차를 세우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에스더 선교사와 유니스가 내리더니 아까 호수 쪽으로 땅만 보고 가고 있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에스더 선교사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간다. 아까 호수에서 오면서 샌달 한 짝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내 세상에 샌달 한 짝을 벗어 놓고 그냥 오면서도 아무 감각도 없이 차를 타는 사람 처음 보았다. 내 아내도 안경알을 빼먹고도 모르고 잊어 버린 것이 벌써 두 번째인데 이런 부분은 서로 상통한다. 생긴 것은 달라도 비슷한 부류의 여인들이다. 다행히 곧 샌달 한 짝을 찾았는지 좋다고 깔깔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보며 참 여인들이란 작은 것에 기뻐할 줄 알고 작은 것에 쉽게 절망도 하는 사람이구나 깨달았다. 

 

한 시간여 차를 더 몰아 가는데 오른 쪽 멀리 사람 사는 곳이 보였다. 그래 마을인가 했더니 뭉크가 중국의 국경도시 이롄이라 했다. 이롄은 자밍우드 바로 건너 편에 위치한 중국의 국경도시로 몽골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물자공급처이다. 자밍우드가 썰렁한 사막에 썰렁한 건물 몇 채 있는 소박하고 초라한 모습인데 비해 이롄은 고층빌딩이 화려하고 길이 6차선으로 멋있게 포장된 화려의 극치를 이룬다. 물건하러 가는 몽골인들의 기를 단숨에 꺾어버리려는 중국정부의 고의적인 정책의 결과이다. 낮시간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밤에 자밍우드에서 중국쪽을 보면 자밍우드는 불빛이 조금 명멸하는 반면 이롄은 불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불야성을 이룬다. 중국정부가 몽골인들의 기를 꺾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거창하고 화려하게 도시를 만든 것이다. 자밍우드에서 국경을 넘으면 바로 이롄인데, 몽골인들은 이 곳에 와서 필요한 모든 물자를 사서 산더미처럼 가지고 들어온다. 큰 상인들은 트럭에다 물건을 싣고 오고 소상인들은 산만한 보따리를 택시에 싣고 돌아와서 울란바타르 행 기차에 싣고 간다. 트럭의 행렬이 장관인 곳이기도 하다. 몽골인들이 아무리 중국인을 싫어하고 견제하려 하지만 중국경제에 예속된 모습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국 자원은 중국으로 가져가고 식품, 소비제품 등 모든 완제품은 중국에서 가져올 수 밖에 없는 무역구조가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일단 들어온 물건은 몽골세관원에 의해 검사를 받고 관세를 지불하는데 자밍우드 교회 교인 빔바의 아버지도 세관원이었다.

 

이롄이 보인 지 40여 분 차를 몰아 드디어 포장도로에 진입했다. 자밍우드에서 울란바타르로 가는 길은 물자의 수송이 중요하기에 모두 포장이 잘 되어 있다. 지난 2년동안 야간 기차를 밤새 타고  자밍우드에 와서 사역할 때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는가 했는데, 이번 고비 횡단을 하다 보니 자밍우드는 사막에 세워진 천국이다. 수도물이 나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오랜 만에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향락인지 겪어 보아야 안다. 지도자들은 자밍우드 교회로 데려다 주고 임선교사네와 나는 근처 조칟보달 (숙박업소)에 짐을 풀고 밀렸던 샤워를 하니 아 이제 살 것 같았다. 자밍우드에 오면 의례 묵던 내몽고 출신 중국인이 운영하는 조칟보달에 묵곤 했는데 이번에는 못 보던 조칟보달로 인도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중국인의 조칟보달이 음식도 자밍우드에서 유일하게 먹을 만하고 서비스가 좋았는데 이를 시기한 몽골인들이 간첩으로 몰아 쫓아내어 버렸다 했다. 현재 몽골인의 외국 특히 중국에 대한 어리석은 편견의 단편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리 보기에는 내몽골인도 같은 몽골인인데 왜 그럴까 하지만 실제 몽골인들의 텃세는 대단하다. 중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폐쇄적인 마음으로 현실을 부정하려는 몸부림도 애처럽고 추하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오히려 구한말 조선을 멸망으로 몰았듯이 몽골도 파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시진핑이 타룬톨고이 유연탄 광산을 방문했을 때, 이들의 태도가 언제 또 변할지 그 변덕을 누가 알랴?

 

울란바타르에서 출발하여 남서쪽으로 내려가 돈고비, 우문고비 2개 주를 통과하여 거대한 고비 삼각형의 한 변을 질주한 후, 남쪽 국경 인근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꺾어 도르노 고비의 동남쪽 끝인 자밍우드에 도착함으로 삼각형의 다른 한 변을 다 그렸고, 8 31일 주일예배를 드리고 나면 고비의 동남쪽 끝에서 올라가는 나머지 한 변을 모두 그린다. 고비는 4개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우리가 가지 않은 알탄고비는 모래가 밀가루처럼 미세한 진짜 사막이라 사람이 거주하기 어려운 곳이다. 사실 고비에서 우리가 사막이라고 부르는 모래사막은 알탄고비이고, 우리가 이번에 선교여행차 다닌 3개 주는 대부분이 광야라고 해야 맞다. 물론 이 지역에도 약 100 킬로에 달하는 모래사막이 중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모래사막지역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지역이 아니다.  결국 이번 여행을 마치면 고비의 중요한 도시는 거의 다 방문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