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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4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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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비젼의 뿌리

아이가 자라면 집을 떠나지만
자란 가정의 영향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1843-1873년


시대적 배경

[1장에서 심슨의 루이빌 사역에 대해 우선 논의하였다. 왜냐면 루이빌 사역기간은 후일 심슨의 사역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2장에서는 심슨의 1843년 심슨의 출생부터 루이빌로 떠나기까지 기간을 다루고자 한다. 우선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상고해보자-역자주.]

1880년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던 해를 사람들은 흔히 "복음주의자들의 해"라고 한다. 이 표현을 잘못 생각하면, 선거가 기독교인들을 미국인의 삶에 주류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한 오해이다. 사실은 19세기 전체가 "복음주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복음주의의 역사가 일어난 세기였다.

19세기를 돌아보면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무브먼트가 많이 있었고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났던 시대이기도 했다. 복음주의란 표현은 기독교의 몇가지 중요한 교리를 공유하는 것을 지칭하는 바, 이 중 중요한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성경론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믿는 자의 삶에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책이다. (2) 신론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3) 구원론이다. 모든 믿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날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 성결해져야 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

영국과 북미출신의 뛰어난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영향은 현재도 상존한다. 우선 영국출신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예를 들어보자. 윌리엄 글레드스턴 (1809-98)은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후 원래 목회자가 되려 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정계에 나서서 그 후 60년간 영국정계의 지도자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수상만도 4차례 역임한 복음주의자였다. 시골 농부의 아들 죠지 윌리엄스는 1844년 약관 22세에 YMCA를 창설하였고 윌리엄 부스 (1829-1912)는 아내 캐서린과 함께 1878년 구세군을 창설하였다. 독일출신인 죠지 뮐러 (1805-98)는 영국에서 수천 명의 고아들을 양육하며 믿음과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온 천하에 보여주었다. 헛슨 테일러 (1832-1905)는 1865년 "China Inland Mission"(중국내지선교회)를 설립하여 중국선교에 불길을 붙였다.

다음으로는 19세기에 일어난 중요한 무브먼트에 대해 상고해 보자. 첫째, 국제적으로 1846년 영국 런던에서 설립된 "Evangelical Alliance" (복음주의 연합)의 등장이다. 이 무브먼트는 교파나 교단중심이 아니고 교인중심으로 조직되어 종교의 자유와, 선교와 기타 공통된 사안들을 위해 힘을 모았다. 복음주의 연합은 북미, 독일 등 국가로 급속히 확산되어 후일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세계복음주의 연합)으로 발전하게 된다.

둘째,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19세기초반에 "제 2차 영적 대각성 운동" (1775-1835)이 일어났다. 이 무브먼트는 18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제 1차 대각성운동 (1726-70)에 연이은 것이었다. 성령의 2번째 물결이 19세기 중반 잠시 가라앉으려 할 때에, 이미 1장에서 언급한 대로 뉴욕 풀턴가에서 사업가들의 정오 기도모임으로 시작된 "Laymen's Revival" (평신도 부흥운동)이 그 바턴을 이어 받아 미국과 캐나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셋째, 19세기 초반에는 감리교단에서 시작한 순회설교자들과 천막집회가 등장했다. 이를 통해 복음주의에 입각한 복음이 당시 개척시대에만 해도 아직 교회가 미치지 않은 소읍이나, 농장지대나 신개척지등에 전파되었다. 이 지역들은 후일 미국의 중추지역으로 부상했다.

넷째, 챨스 피니 (1792-1875)에 의해 시작된 부흥운동이다. 피니는 신개척지에서 사용되던 천막집회의 아이디어를 북동부지역의 도시에다 도입함으로 엄청난 군중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피니는 이 천막집회를 통해 믿음은 성결로 나타나야 하며 이를 칭의에 이어 두 번째 위기라고 주장하였다. 피니이후 부흥운동은 피니가 세운 패턴을 따라 성결운동과 직결된다.

한 시대를 풍미한 "복음주의의 세기"의 영향과 불길도 심슨의 부친 제임스가 살던 캐나다 온타리오주 서부의 조그마한 농장에서 보면 그저 아득한 먼 세상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다. 바로 이 가정에서 태어난 심슨이 시대의 영적 에너지에 깊은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세대를 선도하는 무브먼트를 일으킨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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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심슨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 어린 시절은 '다소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틀' (somewhat stern mould) 에 따라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감은 없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성장배경이 경건한 성품과 균형잡힌 절제를 제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 이 일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린 시절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받아들였던 신학지식도 후일 제가 성령의 조명과 제 삶의 경험을 통해 교리와 말씀의 지식을 정립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심슨의 표현중 "somewhat stern mould" 라는 표현을 이해하자면 당시의 "Covenanter Presbyterianism" (언약 장로교회주의)에 대해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17세기 영국이 스콧틀랜드를 지배하던 시절 영국은 영국 국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 국교로 전향하거나 죽음을 택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스콧틀랜드의 "Covenanter"들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고 극보수로 치달았다. 1775년 심슨일족이 스콧틀랜드에서 캐나다로 이민올 때에 이들은 바로 이 고루하고 극보수적 신앙을 가지고 온 것이다. 핍박속에 견고해진 이들의 신앙은 이들이 정착한 "Prince Edward" 섬의 가혹한 겨울날씨와 척박한 환경가운데 더욱 견고해진다.

그렇다고 알버트 심슨의 가정이 무미건조하고 엄격하기만 한 가정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심슨목사의 부모님인 제임스와 제인은 베이뷰에 위치한 자신들의 가정을 부족한 것 없이 꾸밀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이 차고 넘친 가정이었다. 1843년 12월 15일 알버트 심슨은 제임스와 제인의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많은 자녀가운데서 자람으로 인해 알버트는 어린 시절부터 균형잡힌 인품은 바로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데서 오는 것임을 알았다. 어머니 제인은 아홉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네 자녀는 일찍 잃어버리고 다섯 자녀만 키우게 되었다.

알버트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들 중 부친 제임스를 뺄 수 없다. 알버트의 부친 제임스 심슨은 조선업과 수출입업에 종사하여 성공적인 사업가 되었지만 후일 재정이 어려워져서 사업을 처분하고 섬을 떠나 본토로 이주하였다. 온타리오 주 서부 체탐시에 올 때에는 원래 동업자와 함께 조선소를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전염병 창궐로 다른 지역으로 다시 이사하게 된다. 체탐시는 알버트의 어머니 제인의 마음에게 가슴아픈 추억만 남긴 곳이다. 왜냐면 바로 그 곳에서 많은 자녀들을 잃은 것이다. 특히 어린 마가렛을 잃고 나서 제인은 더 이상 체탐에 살다가는 남은 자녀까지 잃을 까 두려워했다. 아내 못지않게 큰 충격을 입은 제임스는 체탐에서 9마일 거리의 교외 시골에 농사지을 땅과 통나무집을 구매하여 이사하였다. 제임스는 이 이사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왜냐면 제임스는 목공일을 하는 사람이었지, 농장일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집을 가꾸고 땅을 경작하였다. 통나무집에다 호도나무를 가공하여 아름다운 가구를 짜서 잘 꾸미니 통나무집이 그런 대로 살만한 집이 된 것이다.

알버트의 부친 제임스의 성품이 어떠했는지 알버트의 누나 루이스의 말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제임스는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번도 루이스가 보는 앞에서 화를 내거나 불친절한 말을 입밖에 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이 제임스에게 해꽂이를 해서 마음이 상하는 일이 많았음에도 그러했다고 한다. 알버트의 형 제임스는 부친의 관옆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 다른 사람에게 한번도 해를 끼친 일이 없는 분이 계십니다."

알버트의 모친 제인의 영향은 더욱 크다. 도회지에서 시골로 이사한 것이 제임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지만 제인의 고생에 비하면 차라리 나았다. 왜냐면 제인은 "Prince Edward" 섬의 국회의원의 딸로 부유한 가정에서 안온하게 자란데다 항상 주위에 지식층들과의 사교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시적이며 발랄한 사교적 성품을 지닌 여인이 이런 시골구석에서 외롭게 살려니 마치 독방에 갇힌 죄수처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후일 알버트 심슨은 어머니에 대해 회상한다. "어린 시절 어머님의 방안에서 들려오는 어머님의 울음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님을 위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아직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를 때였지만 말이지요." 이러한 개인적인 고뇌와 부서진 꿈에 대한 좌절가운데서도 제인 심슨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가정의 모든 필요한 부분에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되 사랑과 헌신으로 하였다. 알버트 심슨이 책을 좋아하고 미적 감각이 뛰어난 것은 아마도 어머니 제인의 성품에서 왔을 것이다.

엄격한 종교생활

어머니 제인은 갖난 애기 알버트를 일찍 하나님께 사역자로 헌신하였으나 아들에게는 비밀로 하였다 왜냐면 나중에 심슨이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헌신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심슨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 사건은 일찍부터 터졌다. 당시 캐나다 최초의 선교사로 South Sea Islands로 파송되어 가던 길에 방문한 죤 게디목사가 유아세례와 동시에 알버트를 선교사로 헌신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21년후 안식년을 맞아 게디선교사는 심슨을 방문하고 유아세례때의 헌신의 기도를 상기시켰다.

심슨 가정의 믿음생활은 엄격한 청교도적 원칙에 입각해서 진행되었다. 매주일마다 심슨 일가는 정장을 차려입고 터덜거리는 수레를 타고 9마일 떨어진 교회까지 예배를 드리러 가야 했다. 부득이한 사유로 교회출석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온 가족이 거실에 함께 모여 백스터가 쓴 "Saints' Rest" (성도의 안식)이나 도드리지가 쓴 "Rise and Progress of Religion in the Soul" (믿음의 시작과 발전) 등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몇 시간이고 함께 상고하곤 했다. 주일 오후에는 아이들마다 세례문답 내용에 대해 답을 하게 하되 한 주에 몇 개씩 하게 하여 1년이면 150개의 문답을 다 마치게 하였고 일단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하였다. 주일의 남은 시간은 경건의 시간을 갖도록 하였고 만일 이를 어기면 가차없는 벌을 받았는데 즉시 벌을 주지는 않고 다음날인 월요일에 벌을 시행하였다. 왜냐면 주일은 안식일이라 안식일에 벌을 주는 것은 안식일을 범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느 주일오후 날씨가 너무나 화창하고 경관이 아름다워 한창나이의 알버트는 좀이 쑤셔서 가만히 집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유혹을 견디다 못해 살짝 집밖으로 빠져나가서 오랜만에 도둑질한 자유를 즐기며 마당을 망둥이처럼 설치며 뛰어다니다가 그만 아버지에게 들켰지 무업니까?"

집안으로 불려 들어간 알버트에게 아버지는 월요일이 닥치자 마자 체벌을 시행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했고 약속대로 매를 심하게 얻어맞았다. 이 사건 후 형 하워드가 알버트를 살짝 불러서 어떻게 하면 체벌을 모면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귀띔을 해주었다. 심슨은 후일 어떻게 자기가 하워드의 귀띔대로 하다가 무슨 결과가 왔는지 고백한다. "당시 하워드의 귀띔을 거부할 만큼 제 심령은 성결치 못하였던 것이 유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또 매맞을 짓을 했고 아버지가 매를 들고 오게 되었지요. 하워드가 가르쳐 준대로 침대에서 살짝 빠져 나와서 자리에 앉아 엄숙한 표정으로 짐짓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당시 아버지의 눈길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식탁 옆에 조용히 앉으셔서 안경너머로 제가 정말 진지하게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같은 눈길로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어요. 제가 경건의 시간을 마친 후 아버지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가 볼일을 보셨고 체벌에 대해서는 재론하지도 않으셨어요."

엄격한 안식일 준수와 어린 알버트의 가짜 경건의 시간등을 감안할 때 심슨 가정의 종교적 영향은 하나님을 향한 알버트의 태도에 발전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악영향을 끼칠만한 요소를 알버트의 아버지 제임스의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고루한 장로교회의 장로이신 아버지의 엄격한 신앙생활; (2) 매정할 정도의 세례문답훈련; (3) 긍정적이고 즐거운 삶의 측면을 무시한 율법적인 습관들. 이런 아버지상을 가진 알버트가 하나님 아버지께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질 가망은 도통 없어 보였다. 심슨 목사의 아버지상은 심슨의 후일 회상에 여실히 드러난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제 마음에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습니다. 해 뜨기도 전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거실에 촛불을 켜고 오랜 시간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지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알버트의 심령을 경외함으로 채웠기에 부자간의 간격이든 알버트와 하나님과의 간격이든 친밀과는 거리가 먼 관계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으로 인해 뿌리내린 율법적인 복음관에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일찌감치 사역자가 되기를 원해서 14세에 신학을 공부하기로 이미 작정하였다. 알버트의 누님 루이스는 알버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결정적인 계기는 알버트가 9살 때 폴리네시아의 사도라고 불렸던 순교자 죤 윌리암스 목사의 자서전을 읽었을 때라고 하였다. 죤 윌리암스의 이야기는 심슨으로 하여금 사역에 인생을 헌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알버트 심슨은 인생의 중요한 기점마다 그 결정을 내리는 배경에 한 권의 책이 있었던 것이다. 이 결정은 그 첫 경우였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알버트의 이 결정은 심슨 출생시 어머니 제인 심슨이 심슨을 헌신한 기도의 응답인가? 아니면 장로교단의 초기 선교사인 죤 게디목사가 유아세례를 베풀며 선교사로 헌신시킨 기도의 결과인가? 대답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물론 알버트 심슨이 소명에 대해 항상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두 번의 시험이 있었다. 첫째, 십대 반항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알버트는 자신의 헌신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특히 목회사역이 가져올 속박에 대해 반발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번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반발심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읍내로 살짝 빠져나가서 총을 구매한 것이다. 왜냐면 총을 가진다는 것이 이 모든 속박에서 자유를 상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총은 어머니 제인에게 악연이 있었다. 제인은 오발사고로 남동생을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집안에 누구도 총기를 소지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래서 알버트는 누나의 묵인하에 숲 속에서 사냥하지 않을 때는 총을 다락방에 감추어두곤 했다. 그러나 어느날 어머니 제인이 총을 발견했고 알버트에게 이에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알버트는 총을 총기상인에게 반납해야 했을 뿐 아니라 총기대금조차 포기해야 했다. 총도 돈도 잃어버린 이 아픈 기억이 있고 나서 심슨은 소명에 대해 다시는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시험은 알버트와 하워드가 부모님 앞에서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심각한 논의를 하면서 닥쳐왔다. 부친 제임스는 성경적 원칙에 따르면 장자가 하나님의 사역에 분별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워드가 목회자의 길로 가고 알버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지으며 온 가족과 함께 하워드가 신학교육을 받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심약한 소년 알버트에게 결정적 순간이 닥쳐온 것이었다. 자신이 하나님 다음으로 경외하는 아버지가 내린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우 있을 것인가? 놀랍게도 알버트는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용기를 발휘하였다. 자신이 신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 탄원하며 알버트는 아버지께 약속했다. 이미 하워드의 신학교육에도 벅찬 가족의 재정에 절대 부담을 주지 않고 자신의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아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을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한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부친 제임스는 오랜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알버트에게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리라" 한 마디 간단하나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을 전한다. 일단 결정이 나자, 부친 제임스는 두 아들의 성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먼저 체탐에 있는 모교회 목사님인 윌리엄 워커목사를 두 아들의 개인교수로 삼고 두 아들이 18마일 떨어진 워커 목사님댁까지 왕래할 수 있도록 말 한 필씩을 제공한다. 둘째는, 두 아들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든 농장 일에서 두 아들을 면제시켰다. 두 아들이 도와주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몫이 과중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회심 그렇게 간단한 것을

알버트의 인생에는 고난이 끊이지 않았으나 이 고난이 오히려 그에게 유익이 되었다. 왜냐면 이 위기가 주님을 친밀하게 아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알버트의 회심의 체험도 바로 이러한 위기 가운데 받은 축복이었다. 이 위기는 알버트의 고등학교시절 닥쳐왔다.

부친 제임스가 어려운 가운데 배려한 기회였지만 형 하워드는 18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왕복하는 통근과 공부로 인한 계속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건강이 악화되어 당분간 공부를 중단했다. 그러나 알버트는 학생이 되고 나서 더욱 학구열에 타올라 체탐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야생포도를 따러 강둑으로 갔다. 물을 보니 수영이 하고 싶어진 친구는 심슨에게 함께 수영하자고 권했고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 싫었던 알버트는 어리석게도 친구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삽시간에 깊은 물속에 빠진 알버트는 수면아래에서 몸부림치며 질식상태에 들어갔다. 함께 수영하던 친구는 놀라 근처 배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알버트는 나중 이 사건에 대해 회상했다. "그 분들이 저를 물에서 겨우 끌어내었는데 그 때는 이미 기진하여 완전히 물밑으로 가라앉는 순간이었지요. 잠시 후 의식을 회복했는데 몇 년은 지난 것 같았어요."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 누나의 권면에 따라 알버트는 체탐에서 예배에 참석했다. 마침 그 때 영국 런던에서 방문한 그래탄 귄네스목사가 설교를 하였는데 이 목사님의 설교말씀에 알버트는 양심에 강한 자책감을 받았다. 산란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알버트는 그 주말 집으로 걸어가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항상 다니던 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길을 잃고 헤매던 중 훼파된 인디언무덤에 이르렀는데 그 끔찍한 광경이 알버트의 예민한 심성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버지 제임스가 알버트를 발견했슬 때 알버트는 정신없시 방황하고 있었다.

1858년에는 과도한 공부로 진이 빠지기도 하고 거의 익사할 뻔한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도굴당한 무덤의 못볼 것까지 보고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멘 이 모든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해서 알버트를 갈데까지 몰고 갔던 해였다.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해 알버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된다. 심슨의 후일 회고담을 들어보자. "거기에다 하늘이 뒤집어지는 것같은 무시무시한 충격이 있었지요. 어느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왠 별이 제 눈앞에 눈부시게 비쳤어요. 이를 보는 순간 온 신경이 정지하는 것 같았고 금방 죽을 것같은 공포가 밀려왔지요. 너무 무서워 침대에서 뛰어 일어났는데 갑자기 온몸에 울혈성 오한이 밀려 닥치더니 저녁 내내 그치지 않았어요. 거의 죽을 뻔했지요."

이 때부터 죽음이 임박한 것같은 강박관념이 알버트를 사로잡아버렸다. 알버트의 상태를 점검한 의사는 1년동안 책을 읽는 것을 금했다. 그나마 책읽는 것까지 멈추니 온통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란 죽음밖에 없었다. 매일 시계바늘이 종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며 알버트는 자신의 삶도 종점에 달했다는 강박관념속에 떨며 무서워했다. 일단 시계바늘이 종점을 지날 때마다 아직도 자신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돌렸지만 연이어 또 종점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하는 시계바늘을 보며 다시금 공포에 사로잡히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상태가 점차 악화되어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조차 없는 위기가 왔다. 알버트는 회상했다. "두려움과 절망속에 아버지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금방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무엇보다 한심했던 것은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이 거저 엄하고 가혹하기만 한 존재였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자식을 위해 올리는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토록 괴롭히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도 열병처럼 극에 달했다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록 옆에 누가 없으면 잠도 못 이루기는 했지만 알버트의 건강은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알버트의 소원은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까지 하나님이 자신의 수명을 연장시켜주시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한 권의 책을 사용하셔서 알버트에게 해답을 주셨다. 1958년 말 목사님의 서재의 낡은 책들을 섭렵하던 중 마샬이 쓴 "Gospel Mystery of Santification" (성결의 비밀)이란 책을 발견한다. 책을 뒤적거리던 알버트는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글을 발견했다. "당신이 가장 먼저 행할 선한 일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의 단계를 그치지 않고는 당신이 행하는 어떠한 선행도, 기도도, 회개의 눈물도, 결심도 모두 헛것이다.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을 지금 이 순간 영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왜냐면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말씀을 읽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위안이 젊은 알버트의 심령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마치 장거리 수영으로 기진한 수영선수가 결승점에 도착하여 몸을 던지듯 알버트는 예수님의 발앞에 자신을 송두리채 내던졌다. 후일 그 때의 회심의 순간을 알버트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것에 비견했다. 이 때 체험한 영생의 구원의 확신은 그 후 알버트 심슨을 결코 떠난 적이 없다. 바로 이 회심의 체험이 훗날 심슨이 부흥사로서 다른 이들을 동일한 절망의 나락에서 새 생명의 평안과 소망으로 인도할 있게 했던 것이다.

장기간의 질환과 결석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적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6세의 나이로 공립 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 일에 큰 보람을 느낀다. 항상 부족한 재정사정에 보탬도 되었지만 이보다는 아직도 홍안의 어린 소년인 자기에게 40여명의 학생들이 보인 깊은 존경심에 보람을 느낀 것이었다. 이 중 10명은 성인으로 심슨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학생들이었다. 후일 심슨은 이 때를 회상했다. "당시만 해도 하다 못해 턱수염이라도 몇 올 있어서 좀 노숙해 보였으면 했지요." 그러나 사실은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면 학생들이 심슨의 나이에 상관없이 심슨에게 풍겨나는 인격과 진지한 태도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년후 목회시도 마찬가지였다. 심슨은 가는 곳마다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선생으로 받은 봉급은 대학교육을 위해 저축하는 한편 알버트는 목사님과 함께 대학입학시험준비를 위해 계속해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다가올 대학생활과 사역에 대해 상고하며 알버트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서면으로 하나님께 언약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1861년 1월 19일 심슨은 하루를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께 드리며 900개 어휘로 구성된 "Solemn Covenant"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서약)을 초안한다. 17세의 젊은이의 글치고는 대단한 내용의 글이었다. 그 골자는 이러하다. "저는 죽음가운데서 부활하신 당신께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립니다. 저를 받으시고 당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용하시옵소서. 제가 주님의 것, 영원히 주님만의 것이 되었음을 하늘에 기록하시옵소서."

준비되었는가?

당시만 해도 캐나다 장로교회의 사역자 지망생들은 신학대학에 입학하기 이전에 이미 노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목회자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가 만든 검정단계의 첫 단계였다. 스코틀랜드시절부터 그토록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며 지켰던 신앙을 엉터리지도자들로 인해 망가뜨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861년 9월말 워커목사님은 자신이 개인지도한 알버트와 하워드 두 사람을 온타리오주 런던 노회에 천거한다. (당시 노회는 지역 노회로서 목회자 1명과 그 지역교회들이 1명씩 파송한 장로들로 구성되었다.)

노회 구성원들 엄정한 면모와 태도는 사역자 지망생들의 기를 누르기에 충분했다. 이 분들은 우선 노회 다른 업무를 처리하면서 사역자 지망생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유심히 관찰하였다.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 드디어 심슨 형제를 비롯한 사역자 지망생들에게 대한 엄정한 면접시험이 진행되었다. 면접은 각자의 영적 체험, 신앙의 건전함, 사역에의 소명과 학문적 준비에 걸쳐 진행되었다. 다행하게도 (물론 노회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각자가 준비해온 설교문을 직접 발표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지망생 전원이 토론토 소재 녹스 대학에 입학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하워드는 건강상의 문제로 그 후에도 1년간 학교에 가지 않았지만 알버트는 즉시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알버트는 입학전 이미 철저히 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신대원 예비과정인 문학부의 졸업반과정에 입학을 허가받는 특례를 받았다. [당시 신학교는 예과과정인 문학부와 신대원 과정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학부과정 3년은 예과과정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전 희랍어, 희브리어, 라틴어 등 언어공부와 예비학문인 문학과정과 철학등 과정을 이수하게 하였고 일단 예비과정을 이수한 후 신대원에서 3년과정의 신학공부를 계속하게 되어있었다-역자 주.]

심슨의 학구열은 잠시도 식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영적 삶은 그렇지 아니했다. 심슨의 룸메이트는 마침 학교에서 놈팽이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그는 걸핏하면 남자들만의 파티를 벌리곤 했다. 이 파티에는 맥주와 위스키가 항상 준비되었고, 유행가와 음담패설이 빠지지 않았다. 여태까지 한번도 겪지 않았던 황당한 상황에 부딪친 젊은 심슨은 이러한 난장판을 거부하거나 중단시킬 마음의 준비도 없었고 경험도 일천했다고 고백한다. 근묵자흑이란 표현이 이에 합당하다. 이런 패류들과 한 방에서 지내야만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심슨의 영적 삶을 망치기에 충분했다. 심슨은 어느 순간 자신의 영적 삶이 크나큰 위기를 맞은 것을 실감하고 하나님께 서약을 새롭게 할 필요를 절감했다. "1863년 9월 1일. 타락했다 회복되다. 오 주여, 그러나 제 영의 불길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심령 한 구석에는 죄의 삶을 계속하려는 욕구가 저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오 주여, 저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제 과거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앞으로의 깨끗한 영을 주시사 저를 새롭게 하소서. 아멘."

녹스 대학의 문학부와 신대원은 같은 캠퍼스내에 있었다. 심슨은 문학부 3년 과정에 상응하는 과정을 이수한 후 즉시 3년 과정의 신대원 과정에 진학했다. 신대원은 캐나다의 전 총독의 관저였던 엘름스레이 홀을 사용하고 있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녹스 대학의 신대원은 당시 캐나다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교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대원에서 알버트는 명석한 두뇌와 창의력과 응용력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그는 일단 배운 것은 무엇이든 정확히 기억하는 재주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고 응용할 줄 알았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고 그 요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여 이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 알버트는 배운 것을 금새 이해했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 부족한 학생들에게 개인교수까지 하여 학교수업료에 충당하곤 했다. 알버트는 학부시절과 신대원 시절 학교에서 실시한 논문경시대회에 자주 논문을 제출했다. 그 이유는 학생으로서의 명예를 얻으려 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논문을 제출하여 특상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후일 자신의 논문에서 그토록 옹호했던 유아세례에 대한 입장을 취소하게 되는 것이다.

첫사랑에 눈이 뜨이고

심슨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기간 발생했다. 바로 첫사랑에 눈이 뜨인 것이다. 당시 신대원 학생들은 대부분 토론토에 있는 장로교회 교인들의 가정에 하숙을 하였다. 1년후 하워드가 신대원에 들어오자, 알버트와 하워드 두 형제는 자신들이 하숙할 곳을 근처에서 모색하였다. 마침, 두 형제가 출석하던 쿡스 장로교회 목사이던 죤 제닝스박사는 두 형제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당시 교회 장로님인 죤 헨리의 집에 빈 방이 있는 것이 기억나 장로님에게 두 녹스대학 학생에게 방을 제공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헨리씨는 두 형제를 만나본 후 이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바로 이 제의가 알버트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낳았는지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헨리씨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그 중 언니인 마가렛에게는 심슨 형제의 마음을 송두리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혹설에 의하면 알버트는 첫눈에 마가렛에게 반했다고 한다. 50여년이 지난 후 심슨은 토론토대학 학생들에게 이 일에 대해 회고한다. "그 날 마가렛이 문을 열어주는 순간 바로 그 문 앞에 선 그 여인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마가렛의 매력은 그녀의 작은 몸집 때문에 더욱 빛났다. 형 하워드도 마가렛에게 반했지만 그에게 기회가 돌아올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왜냐면 알버트는 하워드에 비할 수 없는 매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미남형의 얼굴모습하며 단아한 몸가짐과 굵고 매력적인 음성은 첫날부터 마가렛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결혼은 시간문제였다. 신대원 3년과정을 마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알버트의 학생시절에는 항상 돈 문제가 떠난 적이 없었다. 단돈 일전도 없어 하나님앞에 하숙비를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극도로 궁핍한 가운데서도 알버트는 마가렛을 기쁘게 해줄 줄 알았다. 한번은 주일설교를 한 대가로 당시로는 큰 돈인 10불을 받았는데 바로 다음날 그 돈 전액을 사랑하는 마가렛의 선물을 사는데 사용하였다.

명설교자 심슨

심슨은 학과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라 설교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시만 해도 강단은 극히 신성시되어 아무나 강단에 세우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중들이 보기에 아직도 소년 테를 벗지 않은 풋내기였으니 교인들이 의아해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심슨이 초청강사로 간 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다. 교회의 장로 한 분이 심슨이 강단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저지했던 것이다. 왜냐면 장로님의 눈에는 이런 풋내기가 그날의 초청강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심슨이 입을 열면 상황은 역전되어 버렸다. 세련된 어휘로 정연한 설교를 시작하면 듣는 이들이 경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한번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심슨의 나이를 초월하여 그를 존경하였다. 녹스 대학에서 심슨의 선배였던 J. W. Mitchell은 한 여름동안 심슨과 번갈아 가며 임시설교자로 같은 교회강단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설교준비를 했고 내용도 쓸만했습니다. 그러나 후배인 심슨의 그늘에 가려 저는 전혀 빛을 보지 못했지요. 심슨은 당시 이미 설교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심슨은 1865년 4월에 녹스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졸업도 하기 전에 이미 헤밀턴시 녹스 교회의 임시설교자로 교회를 섬겼다. 녹스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다는 사실만 해도 당시 상당한 명예였다. 왜냐면 녹스 교회의 강단은 당시 캐나다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장로교회 강단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1865년에는 담임목사가 바뀌는 과정이라 출석교인수가 현저히 감소했다고는 하나 녹스 교회는 교인숫자도 많을 뿐더러 교인들이 다 경제적으로 유족하였기 때문에 당시 장로교단의 내노라하는 설교자들이 앞다투어 강단을 맡았던 곳이었다. 임시직으로 출발한 심슨의 녹스교회사역은 2달만에 영구직이 되었다. 1865년 6월 개최된 교인총회에서 신대원을 갓나온 21세의 심슨의 임용을 연장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녹스 교회가 심슨을 임용하도록 결정한 것은 좀 서두른 감이 있었다. 왜냐면 심슨은 노회에서 아직도 사역증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녹스 교회의 장로님들은 심슨을 다른 교회에 빼앗길가 보아 먼저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토론토 노회에서 심슨과 사역자 후보생들이 안수고시를 보게 된다. 신대원의 최종 졸업시험보다도 훨씬 힘든 시험이었을 것이다. 히브리어, 희랍어, 신학, 교회사와 교회 행정에 대한 실력을 세밀하게 검정받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체험에 대해서 심문을 받았다. 고시관들은 또한 후보생마다 특별과제를 주었다. 심슨에게 주어진 과제는 다섯 가지였다: (1) 로마서 7장 강해; (2) 마태복음 4장 1절-11절 강의; (3) 로마서 1장 16절을 주제로 한 설교; (4) 디모데후서 1장 10정에 대한 강화; (5) 라틴어로 작성한 논문이었다.

1865년 6월 중순 사역증을 발급받은 심슨은 녹스 교회의 청빙을 수락했다. 그 직후 심슨은 당시 헤밀턴의 한 교사 연합회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에 대해 헤밀턴 "Spectator"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심슨 목사의 소문은 과연 헛된 것이 아니었다. 심슨 목사의 강의를 경청한 사람들은 모두 이런 훌륭한 목사님을 우리 헤밀턴 소재의 교회목사님으로 모신 데 대해 흡족해 했다."

안수식과 결혼식

헤밀턴 노회는 그 해 8월 심슨을 녹스 교회의 목사로 임명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한순간의 주저도 없이 이를 수락한 심슨은 노회와 면담을 통해 세 가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계획했다: (1) 9월 10일 주일에는 녹스 교회의 목사로 첫 설교를 하는 것이고; (2) 화요일에는 헤밀턴 노회에서 주최한 목사안수식을 녹스 교회 특별예배에서 받는 것이고; (3) 수요일에는 토론토로 달려가 사랑하는 마가렛 헨리와 결혼식을 거행하는 것이었다.

녹스교회로서는 담임목사의 안수식을 개최한다는 것 자체가 전례없는 경사였다. 왜냐면 녹스 교회에 부임했던 목사님들은 모두 뛰어난 목회경력을 쌓은 노련한 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안수예배를 주관한 분들은 기쁨과 열정을 쏟아 부어 준비해서 이 예배가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순간이 되게 하려 했고 실제 그러한 예배가 되었다.

화요일 오후 2시에 거행된 이 엄숙한 안수예배는 성전을 가득 메운 수백 명의 성도들에게 엄청난 감격을 주었다. 안수위원 한 분의 설교가 끝난 후, 지시에 따라 기립한 심슨은 안수위원회 대표가 묻는 질문에 회중 앞에서 답하여야 했다. 그 다음 순서는 회중들에게 안수위원회 대표가 질문하는 순서로 심슨 목사를 자신들의 목사로 선택하는데 이의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회중들이 심슨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난 후 안수위원들이 심슨의 머리에 안수하며 안수기도를 하였다. 심슨 목사와 회중에게 주는 간단한 권면으로 예배는 막을 내렸다.

녹스 교회 최초의 담임목사 안수예배는 회중과 심슨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끈끈한 고리를 만들었고 이 연결고리는 심슨이 장로교 노회를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후 녹스 교회는 심슨의 안수식 기념일에 심슨을 수차레 초청하였고 1915년 안수식 50주년 기념식에도 초청하였다.

안수식날 저녁 녹스 교회에서 있었던 연회에는 육칠백명의 인원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심슨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두 명의 멘터도 참석하였다. 바로 심슨의 모교회 목사님이며 개인교수였던 워커목사와 녹스 대학 교목이었던 제닝스 박사이다. 연회가 끝날 무렵 제닝스 박사는 녹스 교회 여선교회에서 마련한 비단 사제복을 심슨에게 증정했다. 제닝스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제 젊은 친구에게 빈 가운만을 드립니다. 그러나 내일은 빈 가운만이 아니고 가운의 주인공이 들어 있는 가운을 드리는 즐거운 의식을 거행할 것입니다."

알버트 심슨과 마가렛 헨리의 결혼식은 제닝스 박사의 주재로 토론토시 쿡스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54년이란 긴 세월동안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즐거운 추억과 생산적인 동역으로 가득찼을 뿐아니라, 때로는 오해와 갈등도 있었으며 가슴아픈 추억도 있었다. 신혼여행은 배를 타고 세인트 로렌스강을 유람하는 것이었지만 알버트 심슨의 후일의 삶의 페턴처럼 짧았다. 왜냐면 주일에는 헤밀턴으로 돌아가서 설교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심슨의 목회자로서의 삶의 갈등이 여기에 있었다. 그의 최우선순위는 사역이었지 가정은 그 다음이었다. 이로 인해 마가렛은 이 후 많은 갈등 속에 휘말린다. 알버트는 이미 뛰어난 사역을 시작하는 문턱에서 서 있었고 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확실한 회심의 체험과, 소명의식과, 뛰어난 신학실력을 모두 갖춘 알버트였기에 모든 일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마가렛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기껏해야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과 기독교 가정에서 양육받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하니 마가렛은 항상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알버트가 창공을 향해 비상할 때 마가렛은 방향없이 몸부림치곤 했다. 알버트의 비젼이 너무 거룩한 하늘의 것에 치중하다 보니 때로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고, 남편과는 달리 현실적인 일에 우선순위를 둔 아내에게서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야기를 다시 1865년 8월 신혼때로 돌리자. 신혼부부에게 중요했던 것은 세인트 로렌스강의 고요한 수면의 낭만이었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었다. 배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는 신혼부부는 마냥 행복했을 뿐이었다.

균형잡힌 사역

심슨의 사역은 설교와 목회 양면을 구비한 균형잡힌 사역이었다. 첫째, 심슨은 힘써 강단사역을 개발했다. 그의 설교준비는 치밀했다. 우선 독서에서 질적, 양적인 균형을 갖추었다. 무엇을 읽던 주의를 기울였을 뿐 아니라 폭넓은 독서를 하였다. 일단 준비가 되면 설교를 하든 강의를 하든 전문을 다 유려한 필체로 정서하여 준비했다. 심슨의 유려한 설교에 힘입어 교인수는 급격히 증가해서 교회건물에 차고 넘쳤다.

둘째, 심슨은 설교에만 신경을 쓰다가 목양을 게을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현명한 목사였다. 너무도 교인심방과 상담에 열중하다 보니 몇번이나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다. 급기야는 교인총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심슨에게 두달동안 휴가를 가지도록 권면했으나 심슨은 한달만 휴가를 가졌다.

그러나 1871년에는 교인총회에서 권하는 대로 영국과 유럽을 방문하도록 4개월의 휴가를 받아들였다. 이 기간동안 심슨은 아내 마가렛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방문한 곳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뿐 아니라 마가렛과 두 아들 알버트 헨리와 제임스 고든 헤밀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했다. 이 두 아들외에도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나 멜빌 제닝스는 불과 3살 반때 병사했다.

헤밀턴 목회시절에 심슨이 알게 된 단체로 후일 심슨에게 큰 영향을 끼친 단체가 있다. 1846년 영국 런던에서 조직된 "Evangelical Alliance" (복음주의 연합)이 그 단체로, 이 무브먼트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연합과 협력을 위해 범세계적인 규모로 조직되었다. 단체의 목적은 요한복음 17장 21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입각해서 성도의 하나됨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1846년 런던총회에는 세계 50개 교단을 대표한 900명의 대의원들이 참석하였고 이를 계기로 세계 여러 도시로 확산되어 각 지역마다 소위 "Branch" (지회)이라고 불리는 지역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이 단체의 창립정신과 채택된 조직의 용어들은 후일 심슨이 "Christian Alliance" (기독교 연합회)를 결성하고 각 지역조직들을 "Branch" (지회)이라고 부르는데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873년 10월 "Evangelical Alliance" (복음주의 연합)는 뉴욕시에서 총회를 가졌다. 심슨도 이 집회에 참석해서 큰 감명을 받았다. 바로 이 뉴욕총회는 심슨의 사역에 당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뉴욕에서 일어났던 사건 중 특기할 것이 하나 있다. 심슨의 뉴욕시 ""Thirteenth Street Presbyterian Church" (13가 장로교회)와의 인연이다. 총회기간중 심슨은 이 교회에 초청강사로 가서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침 그 장소에 루이빌에서 대의원으로 왔던 체스넛 힐 장로교회 교인들이 참석하여 심슨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심슨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은 체스넛 힐 장로교회 대표들은 루이빌에 돌아오자 마자 심슨 목사를 자기 교회의 목사로 불러올 준비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은 이미 1장에서 읽어 아시고 계시리라.

그런데 심슨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것은 체스넛 힐 장로교회 대표들만이 아니었다. 13가 장로교회 회중들도 심슨의 이 날 설교 때문에 결국 7년 후 심슨을 루이빌에서 뉴욕으로 불러오게 되었다. 인생은 묘한 것이다. 기회주의자는 항상 기회를 잡으려 발버둥치지만 정작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의 현실에 충실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리사욕없이 묵묵히 매사에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도 모르는 기회를 주신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심슨이기에 뉴욕에서 주어졌던 한번의 설교기회가 자신의 인생을 좌우하는 큰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뉴욕총회에서 돌아오자 마자 심슨 목사는 헤밀턴에 "Evangelical Alliance" (복음주의 연합)의 모임을 유치하고 헤밀턴 Branch (지회)을 조직하는 일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동료 장로교 목사님인 피어선 목사님이 범 교단적인 이 모임에서 말씀을 전했다. 이를 계기로 심슨과 피어선 목사님은 오랜 세월 친구로 교제하게 된다. 이것이 심슨의 장점이다. 좋은 본이 있으면 지체없이 본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뿐 아니라 이러한 모임을 통하여 훌륭한 분들과 주안에서 친분을 맺음으로 장래 하나님이 예정하신 큰 사역을 준비하는 것이다.

헤밀턴이여 안녕

1873년 12월 심슨은 헤밀턴 노회 모임에서 루이빌에서 온 청빙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해 12월 20일부로 노회는 심슨의 녹스 교회 이임을 허가했다. 12월 14일 주일은 심슨이 녹스 교회에서 담임목사로서 마지막 설교를 한 날이었다. 헤밀턴 스펙테이터지는 심슨의 설교 전문을 기사로 실었다. 심슨은 고린도 후서 6장 2절 말씀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를 가지고 감동적인 권면의 말씀을 전하였다. 말씀을 전하면서 심슨은 자신의 재임 8년동안 교회발전과 관련된 자료들을 열거하였다. 교인숫자는 297명에서 646명으로 증가했고 주일학교출석인원은 180명에서 459명으로 증가했다. 1865년부터 1873년 사이 교인헌금총액은 당시로는 엄청난 거금인 5 만불에 달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 녹스 교회에서 받은 사랑에 대해 심슨은 이렇게 말했다. "제 생애에 여러분만큼 저희들을 자상하게 돌보아주시는 분들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마쳤다. "다시 이별도 없고 안식이 끊이지 않은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사나 죽으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녹스 교회와 심슨의 사랑의 교제는 심슨의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그 목사에 그 성도들이라고 양 쪽 다 이러한 사랑과 존경을 주고 받을 만했다. 목사란 임지를 옮겨도 그 전 임지에서 익혔던 사역의 패턴을 반복하기 나름이다. 녹스 교회 시절 심슨 목사의 사역에 대한 높은 기대감과 이에 상응한 흡족한 열매는 향후 심슨의 목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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