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상철학과 복음 (행 17: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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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묘한 것은 사람이란 존재이다. 정작 자신의 몸도 마음도 운명도 다스릴 수 없는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하늘이라도 정복할 것처럼 큰 소리치는 인간들 과연 무엇을 믿고 그럴 수 있는지 때로 의아해진다. 사도 바울이 아데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만난 두 부류의 지성인들이 그러한 존재이며 또한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다. 기실은 예수를 만나기 전 제 모습이었다.
바울이 만났던 아데네의 철학자들은 두 부류로 분류된다. 첫째는 에비구레오학파로 이들의 특징은 죽음앞에 몸부림치는 운명의 문제를 철저히 외면함으로서 해결하려 했다. 소위 무신론적 유물론적 사고이다. 그들의 주장의 몇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만물은 그저 우연히 생성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기계에 동력을 끊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신도 없고 영혼도 없다. 오늘 하루를 이러한 운명론적사고에서 도피하여 고요한 가운데 마음의 평안을 찾아라.
이들의 주장은 얼핏 멋있어 보인다. 이 태백이가 술에 만취하여 달을 잡겠다고 물로 뛰어들었던 이야기를 멋있게 생각하는 동양적인 사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부인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며 다가오는 죽음과 지옥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오늘날 진화론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이나 노세 노세 젊어노세의 퇴폐적사고에 젖었던 우리네 조상들이나 다 같은 범주에 든다. 덧없는 인생 한 잔술에 잊어버리자는 식의 사고가 무슨 멋인 것처럼 착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챠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을 들으면서 비참한 자신의 운명을 즐기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말이다. 학창시절 학림다방에서 많이 보았던 소위 지성인들의 모습이다. 실상은 없어져야 할 마귀의 저주이다.
둘째는 스도이고학파이다. 이들은 이 세상은 만물에 나타난 하나의 절대이성에 의해 선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인간은 절대이성이 끌고 가는대로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범신론적 운명론적 사고이다. 나 개인의 불행도 저주도 다 절대이성이 이끌고 가는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운명에 도전하지 말라고 한다. 거지로 태어났으면 거지로 평생을 살아라. 겉으로는 그럴싸하고 멋있는 것 같은데 알맹이를 까보면 결국 한국인의 소위 팔자소관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 속한다.
현대인들도 이 두 학파의 사고와 별로 다름이 없는 사고에 물들어 있다. 두가지 사고 즉 도피주의냐 체념주의냐에 물들어서 앞날에 대한 소망이 없시 그저 죽음을 향해 허망하게 달려가고 있다. 이 소망없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은 차원이 다른 선택을 제시한다. 부활의 복음은 바로 운명을 초월한 적극적 미래지향적 복음이다.
그러나 자신의 허망한 자존심속에 갖혀있는 노예들에게는 이 복음이 한낮 우스개 소리로 들릴 뿐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바울의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깨달은 자는 그래서 겸손한 자이며 현명한 자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운명속에서 몸부림치던 자가 운명을 초월한 천국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특권을 향유하는 축복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현재 어디에 있는가? 운명을 부인하고 사는 도피주의자인가? 아니면 운명이 끌고 가는 대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체념론자인가? 허망한 인간의 자존심 때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함으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사망의 길로 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운명을 초월한 길을 제시하신 주님앞에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시라. 다가오는 운명은 도피할 대상도 , 체념할 대상도 아니며 부딪쳐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용기있게 주님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복음의 검을 받아 사용하는 분에게 승리와 생명과 소망이 약속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