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 과연 살만한 것인지요? 왜 사십니까? 엄마의 태중에서 삶을 시작해서 고고의 음성을 울린 후부터 결국은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가는 절망의 삶은 아닌지요? 내일이면 무언가 좀 나은 삶이 있겠지하고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요? 그러나 한 가지 엄연한 사실은 우리 모두 이 죽음이라는 존재를 외면하고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흔한 공동묘지가 바로 우리의 갈 길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초상집은 슬픔과 눈물로 대표됩니다. 벌써 수십년전 부모님의 상을 당하면서 새삼 죽음에 대해 실감했지만 정작 그것이 나도 가야 하는 길이란 생각은 들지가 않았던 것은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읍니다.
인생이 그저 나서 결혼하고 그럭 저럭 살다가 한 줌의 흙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인생살이 살아 있는 동안도 사실 따지고 보면 즐겁고 행복한 순간보다는 아픔과 눈물이 더 많은데 이것이 모두라고 생각하면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불가에서는 人生四苦라고 말합니다. 태어나는 것, 늙어가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모두가 고통이라고 말하면서 현실을 초월하라고 얘기합니다. 현실은 환상과 같은 것이니 나 안에서 초월적 존재인 진정한 나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하루하루의 삶도 어쩔 수 없는 인간들에게 신이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실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친히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약속하고 계신지요?
역사는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극복하신 분이 아무도 없읍니다. 2000년전 유대땅의 빈 무덤이 이를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의 입술이 이를 증거합니다. 이를 친히 보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복음서가 이를 증거합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남으로 삶의 방향과 목적이 180도 바뀐 사도 바울의 삶이 이를 증거합니다. 유대땅 소수의 제자들의 무리로 시작된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2000년동안 맥맥히 그 뿌리를 이어가는 교회사가 이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신 날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원을 수립하신 날입니다. 예수님 이전과 예수님 이후로 인류역사가 정확하게 갈라지는 분수령이 되신 것입니다. 2000년전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심으로 인류역사를 뒤바꾸는 엄청난 역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의 죽음은 자신의 죄때문에 가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다 지고 가심으로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사단의 죽음권세에 눌려 살 필요가 없게 하셨읍니다. 뿐 아니라 사단의 죽음권세가 더 이상 역사할 수 없음을 사흘만에 친히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읍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릅니다. 한번 가면 다시 못오는 영원한 멸망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영생의 부활로 가는 한 단계임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읍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눈물도, 수고도, 죽음도, 질병도, 죄도, 인종차별도, 전쟁도 없는 곳. 기쁨과, 보람과, 영생과, 건강과, 평화와 풍요만 있는 곳.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내 아버지로 함께 계시는 곳. 인생은 그 곳을 향해 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 땅의 삶이 소망있는 삶이며 기쁨의 삶인 것입니다. 죽음도 슬픔이 아니요, 천국가는 기쁨의 행렬인 것입니다. 인생이 살맛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은 고난의 금요일로 가는 인생인가요, 아니면 부활의 주일로 가는 인생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