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2일 작성했던 글을 윤문하다.
나의 이야기 (27) 신앙간증 (1) 주여 나를 사용하소서 – 1981년 삼성물산 주재원 시절 이야기를 배경으로
나는 33살에 예수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사람이다. 지나온 여정을 소개하자면 끝이 없기에 주님을 만나게 된 과정과 그 후의 인생을 간단하게 알려 드림으로 망가진 막대기같은 인간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자 한다. 내가 뉴욕에 온 것은 1981년 4월 12일이었다. 당시 나는 삼성물산에서 강관류와 선재류의 개발과 수출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가 개척한 미국시장 규모가 1억불을 넘기게 되자 뉴욕지사로 파송되었다.
당시 배경도 없고 입사연륜도 일천한 사원이 뉴욕지사에 나온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특혜였기에 큰 기대로 부푼 가슴으로 뉴욕에 부임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던 것은 당시 Prime Rate가 유례없이 년 28 퍼센트을 초과하는 고이자와 이에 따른 극심한 불경기였다. 설상가상으로 오자 마자 차가 전파될 정도의 큰 사고를 당하여 격심한 허리 통증과 두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세월이 1년 이상 계속되었다. 체중은 1년 만에 20킬로가 줄어 피골이 상접했고 눈만 감으면 미국 전역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6백만불 어치의 재고가 내 머리 위로 덮치는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내 인생에 고난은 가장 가까운 친구였지만 이 때의 상황은 유별났다. 동난 중에 태어나서 젖 한 방울 못 먹고 자라 항상 몸이 허약하여 잔병, 큰병 치레도 많이 했고, 대학 시절 고학하느라 위를 망쳐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처절한 투쟁 끝에 의지로 회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고난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육신의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이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이국 땅에서 받는 고독과 비인간적인 상사의 대우와 끝없이 나를 괴롭힌 절망감이었다. 이에 덤으로 항상 나를 괴롭혔던 것이 있었다. 바로 극심한 불면증과 악몽이었다.
밤을 꼬박 밝히다 어쩌다 잠이 들면 이상한 꿈을 꾸곤 했다. 내 육신의 생기가 점차 소멸해 가서 실낱같이 작아진 상태로 어디론가 끝도 없이 추락해 가는데 그 곳은 칠흑 같은 암흑 뿐이었다. 이 죽음 같은 구덩이에 빨려 들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렸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시 나는 불신자였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원래 무신론자인데다 강인한 의지 하나로 죽을 고비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내가 예수 믿으라고 하면 내 주먹을 믿으라고 큰 소리쳤던 황당한 사내였다. 그러나 이 때는 죽는 것이 두려웠다. 눈만 감으면 나를 짓눌르던 그 악몽이 바로 죄인들이 죽어서 가는 지옥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삶은 절망 그 자체였다. 가장이 이 모양이니 아내는 오죽했으랴.
그러던 어느 날, 당시 가장 큰 거래선이던 포항제철 장 지사장의 부인이 백혈병으로 입원했는데 내출혈로 혈소판 이식이 즉시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성뉴욕지사장을 위시하여 중화학 분야의 모든 직원이 동원되어서 병원에 가서 피 검사를 한 결과 나만 합격이 되어서 그 메마른 양 팔에 굵은 바늘을 꽂고 2시간 여를 혈소판을 뽑는 고역을 치르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한번도 남에게 피를 주어 본 적이 없었던 나였던지라 이 체험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서른 살 남짓했던 꽃 한송이가 무참하게 졌을 때에 하나님은 다른 생명의 꽃을 나를 통해 피우게 하셨다. 자매에게 피를 처음 준 것이 나였던 관계로 망자의 부군인 포항제철 장 차장께서 영결예배와 하관식에서 제일 먼저 꽃을 던지도록 배려를 하셨다. 고통이 끝나고 관 속에 누워있는 자매를 내려다 보는 내 마음에 미묘한 풍랑이 일었다. 내 피를 받은 자매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 분이 마치 나의 분신인 것같았다. 하관식에서 자매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고린도전서 15장 부활 장을 주제로 설교를 하셨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성경을 읽은 적도 없고 죽으면 그 뿐이라고 큰 소리치던 완악한 내게 이 말씀이 믿어졌던 것이다.
"아, 죽음이 끝이 아니구나. 죽음 저 너머에 부활이 있구나."
자매를 묘지에 남기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우리도 죽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아내는 근처에 있는 한일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집불통이던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교회까지 데려다 주기만 했다. 그러던 내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또 한 번 닥쳐왔다. 그 해 여름 휴가 때였으리라. 다른 주재원 두 가정과 함께 요트 경기로 유명한 코네티컷 주 뉴포트로 휴가를 갔다. 마침 “데이스 인”이라는 호텔에서 그 밤을 보냈는데 호텔 방마다 신약성경이 한 권씩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독서광이던 나였던지라, 관심이 있어서 보니 거기에 이 책을 거저 가지라는 표시가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그 책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중이라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복음서부터 매일 조금씩 읽기 시작하면서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이나 믿으라고 큰소리치던 자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기 시작했다. 성경을 10분만 읽으면 잠이 절로 오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고 악몽도 더 이상 꾸지 않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믿어졌던 것이다.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는 말씀이 그대로 믿어졌다 (요 11:25-26).
당시 특별히 죄에 대해 회개한 경험도 없는데도 예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후 6개월 정도를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살다 보니 체중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두통도 없어지고 사업도 호전했다. 사업이 호전되면서 회사에서도 능력있는 사람으로 자타가 다시 공인받고 미국생활도 익숙해지니 옛날 어렵던 시절 다 잊어버리고 성경도 읽지 않는 삶으로 다시 돌아갔다. 물론 교회에 아직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이 후 교회에 발길을 들여 놓는데 몇 년이 더 걸렸다.
그러던 중 본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새롭게 인생을 개척하고픈 욕심으로 무작정 주저앉은 것이 19년 전이었다.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서 시작한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 성공적인 사업가는 되었으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작은 음성이 있었다. 바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소명의 소리였다. 결국 그 음성에 항복하고 신학교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 15년 전이다. 신학교에 갈 때에 내 목표는 성경을 원어로 이해하고 말씀을 영어로 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 소박한 꿈을 이루어 주시는 데 그치지 아니하시고 내 지경을 계속 넓혀 주셔서 더 높은 곳, 더 넓은 곳으로 꿈을 키우게 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교수생활을 하도록 하시되 늦게 시작한 것을 보충할 수 있도록 박사학위를 하면서 가르치고 목회까지 감당하게 하셨다. 대학시절의 꿈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를 하는 것이었지만 고학에다 육신의 질병으로 꿈을 이루지 못 했던 것을 하나님은 묘한 방법으로 내 꿈을 이루어 주셨다. 내 인생에 하나님이 두신 기쁘신 뜻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알 수가 없지만 내 스스로 이를 제한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은 주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더 큰 꿈을 향해서 준비할 뿐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