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주판 A 13면에 2005년 6월 7일자로 실린 칼럼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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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4일은 박찬호가 메이저 리그에 선지 12년만에 100승을 달성한 기념비적인 날이다. 초반부터 사정없이 두들겨 맞으며 일찌감치 4대 0으로 뒤지는 것을 보고 오늘은 찬호의 날이 아닌가 했다. 새벽 3시부터 눈을 부릅뜨고 성원한 한국 국민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던지 난타전 끝에 역전승으로 찬호에게 100승의 영광을 안겨 주었다.
레인저스에 온 후 그토록 침체의 늪에 빠졌던 찬호를 부활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그 원동력이 찬호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찬호의 약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잦은 부상이었다. 고질적인 허리부상을 다스리지 못한 채 무리하여 계속 마운드에 올라가다 보니 나중에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 매이저 리그는 선풍적인 인기를 날리던 선수도 부상으로 선수생명이 갑자기 끝나는 것이 비일비재한 냉혹한 전장이다. 일단 부진을 보이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공격을 하는 것이 매스콤과 소속구단이다. 찬호도 지난 3년간 매스콤의 비수에 전신을 난자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질적인 허리통증으로 고생하며 재기의 꿈을 키운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나도 체험을 통해 안다. 찬호는 늦었지만 이를 인정하고 전문의의 치료를 장기간 받아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에 오늘의 성공을 가져온 것이다.
둘째는, 강속구 투수로서의 자존심이다. 찬호는 그 자존심을 버리고 투구 스타일을 바꿈으로서 부활의 빌미를 만들었다. 전성기의 찬호는 96마일에 달하는 광속구를 뿌리던 정통파 강속구 투수였기 때문에 힘으로 타자들을 제압하는 손꼽히는 투수 중 하나였다.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 속도와 힘이 떨어지는데도 같은 스타일의 포 시머 강속구에 의존한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비참했다. 다저스 시절 선배이던 오렐 허사이스가 레인저스의 투수 코치로 와서 찬호에게 지적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허사이스는 찬호에게 이제 더 이상 포 시머 강속구에 의존하는 투구를 하지 말고 속력은 떨어지더라도 낮게 들어와서 공의 방향이 급변하는 투 시머에 의존하도록 충고했다. 찬호의 성공의 비결은 바로 투 시머에 있다.
셋째는, 팀 플레이보다는 자신의 힘에 의존했던 것이다. 과거 기름에 물돌듯 하던 찬호가 팀 동료들에게 먼저 다가 가고 승리의 공로를 동료들에게 돌리는 자세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러한지 금년에는 찬호가 마운드에 올라 서기만 하면 타선이 폭팔하는 기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전날 4안타의 빈타로 2:1로 패배했던 팀이 이 날은 무려 19안타를 몰아쳐서 17안타를 친 로얄스 팀을 14:9로 대파한 것도 한 예이다. 금년 시즌에 찬호가 던진 12게임에서 레인저스의 전적은 10승 2패여서 찬호만큼 타선의 지원을 받는 투수가 드물다. 찬호의 바뀐 투구 스타일은 땅볼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다른 수비수들이 잘 막아주지 않으면 안된다. 한 마디로 찬호는 이제 겸손한 팀 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함께 이룩한 승리이기 때문에 레인저스 선수 모두가 찬호의 승리를 더욱 기뻐하는 것이다.
겸손해진 찬호가 그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절제함으로 몸을 잘 만들고 변화하는 시대와 몸 상태에 맞추어서 유연하게 적응하는 팀 플레이어로 계속 발전할 때에 그가 바라는 200승의 고지도 머지 않아 달성할 것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