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는 정말 정신 없이 보냈다. 오전 9시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나서 시간이 1시간 남아 공장사장과 탁구를 치느라 땀으로 옷을 적셨다. 이분과는 그동안 식사도 같이 하고 사귄 사이라 이젠 친숙하다. 이 곳이 비록 소도시이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이만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를 나는 함께 탁구를 치면서 깨달았다. 참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인 것이다. 이 양반 탁구 치는 모양새만 보아도 성격을 알 수 있다. 신나게 휘두르고 속공으로 치니 둘이 아주 죽이 잘 맞았다. 예배 후 바로 떠나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는데 다시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다시 목욕을 해야 했다.
이 곳에서 장춘 가는 길은 3시간 정도 걸린다. 속도위반 않고 제한속도로 가는 택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장춘공항에서 베이징으로 가도록 비행기 표를 구매했기 때문에 택시를 대절해서 오전 11시에 출발했다. 떠나는 나를 학생들이 좌우에서 찬양으로 배웅했다. 지난 1월에도 아내와 함께 와서 2주간 가르쳤던 학생들이라 이렇게 두 번이나 인연을 가지니 끈끈한 정이 생겼다. 그 가운데 일부는 작년에 왔을 때에도 배웠던 학생들이다. 학생들을 떠나려니 마음 한 구석이 짠하다. 그래도 떠날 때는 떠나야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택시에 몸을 실었다. 출발 때는 비가 내리더니 20분 정도 가니 날이 쨍쨍한 것이 가당찮게 더웠다. 싸구려 택시라 에어컨은 물론 없지요, 뒷좌석에서 햇볕이 그냥 머리에 쪼여 대는데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땡볕 속을 장시간 달리다 보니 더위를 먹었는지 골이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껍고 몸 상태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김 선생이 싸준 우유 2팩과 빵을 점심 대신으로 먹으며 계속 가는데 두통이 자꾸 심해졌다. 2주 동안 너무 진을 빼서 강의를 했나 보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 같은데 이 상태로 몽골로 가서 또 3주간 사역을 해야 하는데 이거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춘에 도착하니 오후 1시 30분이었다. 우선 짐부터 부치고 탑승수속을 마치고 나서 보니 이거 또 지혜롭지 못한 짓을 했다. 타일레놀이 든 가방까지 부친 것이다. 짐을 부치고 대합실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두통이 예사가 아니었다. 속도 울렁거리고 견디기가 어려워서 우선 탈수증상인가 하고 매점에서 마실 것을 하나 사서 마셨다. 공항이란 곳이 하나같이 중국 위안만 통하여 그나마 가지고 있던 10 위안이 없었으면 난감할 뻔 했다. 근데 한 병을 통째로 마셔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냉수로 얼굴과 머리까지 적시고서 염치불구하고 대합실 의자에 길게 누워서 쉬었다. 중국에 와서 편리하게 느낀 것은 이 사람들은 남이 무엇을 하든 일체 간섭을 않는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의 공항에서 드러 누웠다가는 당장에 욕을 얻어 먹었을 것이다. 일단 눈을 감고 누우니 훨씬 견딜 만했다. 그렇게 2시간을 보내고 나서 베이징 향 중국남방항공 비행기를 탔는데 사뭇 죽을 맛이었다.
약 2시간 정도 가는 거리인데 식사는 없고 땅콩 한 봉지와 마실 것만 제공했다. 두통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더니 그나마도 주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저만치 간 승무원을 소리쳐 불러서 달라고 요구했더니 남자승무원 녀석의 눈초리가 곱지가 않았다. 거기다 탈수증 때문에 우유 한 컵과 물 한 컵을 함께 달랬더니 혼자서 툴툴거리는 소리마저 들렸다. 이렇게 손님을 대해서 어떻게 영업을 하겠다는 것인지 한심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오랫동안 몸에 배인 것이 바로 불친절의 악덕이다. 닉슨, 키신저의 핑퐁 외교를 통해 70년에 등소평이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서비스 정신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별로 발전이 없다. 바로 여기에 중국의 낙후성이 있는 듯하다. 아무리 멋진 옷을 입고 폼을 잡아도 그 내면이 변화되지 않은 인생은 어쩔 수 없다.
아픈 머리를 부여 안고 2시간을 견디다가 북경에 도착하니 오후 5시 15분이었다. 북경에 도착하자 마자 짐을 찾아서 우선 타일레놀부터 꺼내서 복용을 했다. 매점에서 청량음료 한 병도 사서 마시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장춘에서 비행기 타기 전에 이렇게 했더라면 고생을 덜 했을 것을 하고 후회를 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더니 정말이다. 몽고항공을 찾느라고 고생께나 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인들은 몽고항공이라고 부르고 몽골인들은 기를 쓰고 몽골항공이라고 불려지기를 원한다. 몽고란 말은 한자이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중국을 싫어하는 몽골인이라 국가의 명칭부터 시비꺼리인 것이다. 베이징 공항은 건물은 그럴 듯하게 지어 놓았는데 내면을 들여다 보면 말이 국제공항이지 안내판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한자를 아는 나도 이리 불편한데 한자도 모르는 외국인들이야 오죽할까? 다음 달이면 올림픽을 치를 나라인데 아직도 멀었다. 화장실도 터미날 로비에만 양 끝에 하나씩 있고 일단 국제선 입구를 들어간 후에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로비를 통과해서 탑승수속을 하다가 시간이 지연되어 화장실을 가려면 다시 로비까지 나와서 100 미터 단거리 선수처럼 달려야 한다. 인천공항의 경우 50 미터마다 화장실이 보이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여기 저기 물어본 후 우여곡절 끝에 2층에 있는 국제선 출발지역을 찾아서 헐떡이며 가니 몽고항공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고 임자 없는 짐 보따리만 즐비했다. 빨리 탑승수속을 하려고 가방만 줄을 세우고 사람은 뒤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다. 차마 이들처럼 짐만 갖다 놓기에는 양심이 찔려서 짐을 가지고 뒤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출발시간이 3시간 남았는데 탑승수속을 미리 시작하면 좋을 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직원들의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거기에다 탑승수속을 하는 지역에는 화장실도 없어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출발시간을 2시간 앞둔 7시 경이 되니 직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미리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뒤로 벌떼처럼 모여 들어서 줄을 서는데 새치기꾼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나마 직원들의 능률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한 사람 수속하는 데 10분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간신히 내 차례가 되어 비행기표를 제시했더니 내 이름이 컴퓨터에 안 나온다고 최고책임자가 올 때까지 다른 줄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비행기를 대한항공에서 구매했는데 낙후된 설비라 제대로 컴퓨터에 입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엄연히 어느 항공사나 공인하는 비행기표를 제시했는데 이렇게 귀찮게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어쩌랴. 여기서는 약자이니 기다릴 수 밖에 없다. 20분 정도 기다리니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보아 하니 책임자인 듯해서 얘기했더니 내 표에 서명을 해서 탑승하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겨우 끝났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내 짐 가방을 스캔한 직원이 내 가방에 이물질이 들어 있다고 열어서 내용을 다 꺼내라고 했다. 문제 있는 것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스캔을 했는데도 계속 문제가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성경책 때문이었다.
겨우 수속을 끝내고 탑승구 쪽으로 달려가니 공항보안검사가 나를 가로막았다. 흥미로운 것은 보안검사의 안내표지가 중국어와 한국어와 영어 세 가지로 되어 있는 것이다. 영어야 당연하다 쳐도 일어나 불어도 없는데 한국어 표지가 있다는 사실이 한중간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50여 년 전만 해도 전화로 황폐했던 나라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졌다는 사실이 새삼 나를 기쁘게 했다. 공항보안검사에서 휴대품의 스캔 과정에서 또 문제가 생겼다. 컴퓨터 가방에 이것 저것 꼭 필요한 것을 넣었는데 어찌된 것이 자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내용물을 다 꺼내서 보여주고 난 후에도 5번이나 스캔을 한 후에야 통과를 시켜주었다. 다행인 것은 복용한 타일레놀이 효과가 있는지 두통도 한결 낫고 열도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짜증나는 과정들이 얼마나 나를 괴롭혔을까?
저녁 8시 55분에 몽고항공 비행기에 탑승해서 예정대로 9시 15분에 이륙했다. 보잉 737인데 어찌나 오래 된 것인지 기내에 퀴퀴한 냄새가 났다. 좌석도 작은데다 좌석간 간격이 무릎과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여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다 기내에 화장실이 두 개 밖에 없어서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탑승하기 전에 청량음료 큰 병을 다 들이킨 탓인지 이륙한 후 곧 화장실을 찾았더니 벌써 줄 선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안내양이 아주 친절하고 예쁜 것이었다. 물도 병째 달라면 주고 무엇을 추가로 요구하든 웃으면서 주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간단한 저녁식사도 나왔다. 저녁을 걸렀던 몸이라 빵 한 조각에 소고기 몇 조각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먹었더니 한결 기분이 좋았다. 그 동안 복용한 타일레놀 덕분인지 몸도 정상으로 돌아와서 처음 가는 몽골행이 그런대로 견딜만하게 되었던 것이다.
울란바타르의 징기스칸 공항에 도착하니 자정이 지났다. 몽골 유일한 국제공항이라고 하는데 규모는 미국의 한적한 시골공항 수준이다. 기항하는 비행기가 적은 덕분에 짐이 빨리 나와서 좋기는 했다. 촌스럽지만 한국 시골아가씨처럼 생긴 세관 여직원에게 여권을 제시하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공항을 나오니 임병철 선교사께서 마중을 나와 주셔서 심야에 차에 타고 임 선교사께서 구입했던 아파트에 돌아왔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울란바타르에서 반정부시위로 인해 비상계엄 상태였는데 그 동안 사태가 가라 앉았는지 별 문제가 없었다. 공항에서 오는 길은 어찌 험한지 사회간접자본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 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도 제대로 포장이 되어 있지 않고 곳곳에 움푹 파인 곳이 많아 차가 덜컹거렸다. 늦게 일어나서 늦게 잠드는 습관들이 있는지 자정이 넘었는데도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중국에서는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땅은 넓은데 인구는 280만 명밖에 안되니 나라를 경영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세금을 거둬들여서 길을 개선하고 시설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 시장규모가 경제단위가 되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에 산업화로 나가는 데 난관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남의 나라 일인데도 딱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몽골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몽골은 면적은 157만 평방 킬로미터로 남북한 합친 것의 7배에 달하고 엄청난 지하자원이 묻혀 있는 세계 10대 자원부국이다. 비록 겨울이 너무 길어 애로가 있다 하지만 고비사막을 제외한 대부분 국토가 목초지이며 지혜롭게 개간하면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다. 특히 이 넓은 국토가 인구가 고작 280만 밖에 되지 않아 얼마든지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사회간접자본에 적극 투자하고 개발해 나간다면 장래성이 밝은 나라이다. 이런 장래성을 본 주위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몽골 정부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일본은 몽골 전역에 무료로 학교를 지어 주는 봉사를 벌써 여러 해 계속해 왔다고 하는데 몽골의 잠재력을 감안해서 사전투자를 하는 것인 듯 했다. 몽골의 대도시에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를 대량으로 선점하는 것도 일본인들이라 한다.
문제는 이 잠재력을 개발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몽골의 인구 가운데 40 퍼센트에 해당하는 110만 명이 수도인 울란바타르에 밀집되어 있다. 몽골의 부의 90 퍼센트가 모두 울란바타르에 집중되어 있다 하니 나머지 10퍼센트밖에 보유하지 않은 60퍼센트의 국민들의 생활상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몽골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국민당 GNP가 2700불이라 하는데 부의 편중이 극심한 것을 감안하면 대다수의 생활수준은 후진국을 벗어날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국부의 90 퍼센트이상을 5 퍼센트 미만의 소수의 엘리뜨가 거머쥐고 있을 것이다. 땅은 어마어마하게 넓지만 인구도 280만밖에 없는데다 사방이 다른 나라 땅으로 포위되어 있어 해상수송수단 하나 없으니 국가기간산업을 일으킬 방도가 없는 것이다. 유목민이다 보니 만사에 급할 것이 없고 아무 거나 걸치고 먹을 것만 있으면 만족한다. 그러하니 가옥이든 가구이든 도로이든 그저 있기만 하면 족하다. 산업발전도 직장도 없다 보니 도시로 몰려든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가 남긴 보드카의 중독현상에 찌들어서 대낮부터 만취해서 행패를 부리고 외국인만 보이면 다가와서 위협하고 도둑질해 가는 자들이 도처에 우글거린다.
임 선교사 가족 전부와 사모님의 학교 친구선생님들의 가족까지 들어오니 온 아파트가 가득했다. 침실 2개 짜리 아파트인데 여덟 명에 임 선교사 딸 셋, 조카까지 합하니 12명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 아파트는 임 선교사가 선교사로 4년 전 울란바타르로 부임해서 바로 구매한 것인데, 임 선교사네가 이르디닛으로 부임한 후부터 교단손님들이 묵는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임 선교사 일행들은 미국에서 오신 지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 자정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대낮처럼 잠을 자지 않는다. 나야 중국에서 이미 15일을 사역하며 시차적응이 된 상태인데다 오늘 하루 고생을 많이 해서 눈을 빨리 붙여야 했기에 염치불구하고 거실에서 잠자리를 폈던 세 공주를 쫓아내고 임 선교사와 함께 소파베드 위에 몸을 누이니 새벽 2시는 된 듯했다. 참 사연도 많고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