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9일 “이르디닛과 가로잘랑”
아침 6시에 호텔 방에서 일어나 가벼운 아침운동을 한 후 8시에 임 선교사 댁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나누었다. 이번에 한국에서 가져온 깻잎요리와 총각김치와 밥을 제대로 차려 주셔서 먹고 나서 오전 내내 임 선교사와 함께 이르디닛 시내구경을 했다. 이 곳은 백화점이 슈퍼마켓을 겸하고 있다. 한 곳을 가니 앞쪽에는 일반 슈퍼마켓이고 뒤쪽에는 전자제품 등 잡화가 진열되어 있었다. 이런 서양식 백화점 외에도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과 야채를 파는 전통시장도 있다고 하는데 다음에 보기로 하고 이 곳부터 구경했다. 전자제품은 러시아제, 한국의 삼성, LG, 프랑스제, 독일제, 이태리제까지 다양하게 갖추고 있었다. 원산지의 다양함은 울란바타르 백화점보다도 더 화려한 것이 이르디닛 주민의 기호가 까다로움을 깨닫게 했다. 포도주의 종류도 다양해서 프랑스제가 주종이었지만 독일제 Blue Nun도 있었고 이태리제 포도주도 눈에 뜨였다. 그만큼 생활수준이 높고 안정된 도시라는 증거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답답한 것은 과일과 야채 진열대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것이다. 야채라고 해 보았자 말라빠진 양파 몇 조각과 다 센 파 몇 줄기가 고작이고 과일은 말라비틀어진 사과 몇 개 정도이다. 야채나 과일은 모두 중국에서 수입되는데 여기 사람들이 잘 먹지를 않아서 어쩌다 이 곳에 사는 외국인들이 그나마 사가는 것이다. 이르디닛에는 러시아인이 5천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르디닛의 경제를 움직이는 동광산에서 일하는 기술자이다. 몽골인들은 생선도 거의 먹을 줄 모르기 때문에 생선진열대라는 것은 숫제 존재하지도 않고 한 구석에 정어리 훈제 몇 꾸러미 있다. 임 선교사께서 그나마도 아쉬워서 2 마리 사서 가지고 왔다.
거리는 울란바타르에 비해 훨씬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눈길도 활기가 있었다. 극장 등의 문화시설도 있었고 실내 체육관도 있는 것이 제법 도시의 구색을 갖추었다. 거리에 오가는 차종도 제법 다양하고 고급차량이 많았다. 렉서스도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것이 이 곳의 소득수준이 높은 것을 짐작하게 했다. 인터넷 카페도 여러 개가 있어서 이 도시 젊은이들의 기호를 짐작하게 했다. 시내 중심가를 걷다 보니 한국식당이 있다. 간판을 코리아나라고 붙여놓고 거기에다 한국어로 대장금이라고 쓰고 여주인공의 얼굴을 그려놓았다. 임선교사 집 근처에도 사반나라는 한국식당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곳 사람들의 한국인에 대한 호감을 알 듯했다. 주인은 몽골인인데 한국 일산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몽골 자매 하나에 의하면 사반나라는 식당은 원래 중국식당이었는데 어느새 한국식당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식당주인은 한국 일산에서 살며 한식 만드는 법을 배워 온 몽골인인데 메뉴가 제법 다양하다 했다. 몽골 전역에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팽배하기 때문에 중국식당이 성공할 수 없어서 결국 한국식당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유목민족의 특징이 감정이 격렬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는 것인데 몽골사람들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가 보다. 거기에다 한번 원수가 되면 원수를 대물림하는 경향 때문에 쓸데없는 손해를 많이 보는 것이다.
2시간을 걸으니 시내구경은 대략 한 것 같아 발길을 돌려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서 임 선교사 댁으로 향했다. 오다 보니 아파트 단지 중앙에 단층 짜리 교회건물이 보였다. 1년 전만 해도 교회가 아니었던 곳인데 그새 교회가 생긴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더니 백인 청년남녀가 10명 정도 모여서 야외집회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어 보니 YWAM Orlando DTS Team이었다. 3개월의 훈련 후 3개월의 전도여행을 이 곳으로 와서 이제 집회를 시작하려는데 우리가 다가오니 반가워했다. 그 가운데 2명은 한국아이들이었다. 한국에는 YWAM 에 속한 예수전도단이 있어 미국 YWAM DTS에 적극 참여하는 모양이다.
YWAM 과 우리 가정은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예수전도단의 창시자인 오대원 (David Ross)목사님과도 친분이 오랜 셈이고 은정이와 재준이 모두 YWAM King’s Kids 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면서 성장했다. 코네티컷에 있는 교회의 목사 사모인 은정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YWAM Denver에서 DTS훈련을 한 후 멕시코에서 3개월간 전도여행을 한 후 1년간 인도의 마드라스 YWAM 베이스에서 선교사역을 한 적도 있다. 그래서 그러한지 젊은이들이 몽골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YWAM은 세계 여러 곳에 베이스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르디닛에도 베이스와 두 개의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 임 선교사가 처음 이 곳을 상대로 사역할 때에 YWAM 게스트 하우스를 사용했다 한다. 전도집회는 곧 시작할 모양인데 실제 모인 현지인은 두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짧은 몽골 체재였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런 YWAM 의 찬양위주의 전도집회가 몽골인들의 정서에 맞을 것 같지 않다. 거기에다 몽골법에 의하면 외국인은 전도활동이나 설교를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물론 우리 한국 선교사는 막무가내로 설교도 하고 전도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한국인에 대한 호감 때문에 눈감아 주는 몽골당국자들도 다른 외국인이라면 단속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던 간에 전도집회란 집회 자체의 효과보다도 전도하는 이들에게 끼치는 영적 효과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더 있고 싶었지만 오후에 다르항 교회 여지도자인 유니스와 그 남편이 임 선교사 댁에 오기로 약속되어 있어 지체하지 못하고 아파트로 돌아와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니 두 사람이 다르항에서 도착했다. 두 사람이 도착해서 함께 식탁 겸 책상에 앉아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눈을 꿈벅거리며 교제하고 있노라니 에스더 사모가 일회용 커피와 컵라면을 가져 와서 이 분들을 대접했다. 이 곳에 와서 관찰한 바는 손님이 올 적마다 먹을 것을 내놓는 것이다. 특히 임 선교사 가정은 라면을 주로 대접하는데 몽골인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했다. 이렇게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 당연한 습관이다. 나중에 유목민들의 텐트를 방문할 때마다 우리도 항상 식사대접을 받았다.
유니스와 리라와 교제를 하면서 몽골의 현실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유니스는 원래 다르항의 공산당 지도자 중 고위직 유지였는데 림준호 선교사 시절에 전도를 받고 현재 C&MA에서 개척한 7교회 의 총지도자로서 섬기고 있는 자매이고 남편인 리라는 러시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한 몽골 유일의 지질학자이다. 리라는 나이가 50세로 알코올 남용에다 고정적 직장이 없어 어려운 삶을 보내고 있고 이로 인해 부부관계도 악화된 실정이라 했다. 능력이 있으면 무얼하랴? 고용을 창출할만한 산업이 없는 몽골의 슬픈 현실 아래 놓인 능력 있는 자의 무력감을 우리 형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몽골의 방대한 광야에 어떠한 광물자원이 있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임에도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물처럼 취급 당하고 있던 것이다. 내일 여행의 목적지인 무룬에 가는 길에 대해서도 리라가 잘 알기 때문에 동행할 예정이다. 유목민들을 위한 샘을 파는 회사에서 용역을 받아 일을 하기 때문에 여행을 할 기회가 많은 분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다 리라의 고향이 훕수굴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그 쪽 지리에 밝다고 해서 동행하도록 한 것이다.
오후 5시에 임선교사와 함께 이르디닛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자르갈랑 시장을 방문하러 출발했다. 자르갈랑은 세 개의 부락으로 구성된 인구 약 4천명의 소도시로서 임 선교사와 개인적인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이 곳에도 과거 러시아인들이 운영하던 공장이 있던 지역인데 러시아 인들이 철수한 후 고용기회가 사라진 곳이다. 러시아인들이 몽골에 와서 한 일은 하나같이 덕스럽지가 못했다. 여자에게만 교육기회를 제공해서 남자들을 무식한 막노동자나 실업자로 전락시켰다. 뿐 아니라 약한 마유주 정도나 마시던 몽골인들에게 독주인 보드카를 폭음하는 습관을 가르쳐 젊은이들을 술주정뱅이로 만들었고, 기술이전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필요에 의한 공장건설과 운영으로 이들이 떠난 후 산업시설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몽골의 경우 숙련노동자는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는 간단한 도로공사조차도 몽골인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중국인 노무자들이 이 곳까지 와서 공사를 해야 한다. 거기에다 러시아 인들의 공장에서 일하던 인력들이 모두 실업자화함으로 과거 유목민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곳곳에서 실업자로 거리를 헤매게고 있다.
임 선교사는 이르디닛에서 두 번 죽을 뻔 했다. 첫번째 경험은 이르디닛에 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곰보라는 자매의 집을 심방하러 가던 중 열차 건널목인 줄 모르고 건너다 0.5초 차로 충돌을 면한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자르갈랑 근교에서 2년 전 겨울 차가 전복되어 죽음 문턱까지 갔던 것이다. 첫번째 죽을 뻔 했던 곳도 함께 가 본 적이 있는데 건널목에 아무 표시도 없고 그냥 큰 길처럼 보여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두번째 사고에서는 길이 온통 빙판이라 아무리 속도를 줄이려도 줄어지지 않고 그대로 길 옆에 있는 시멘트 기둥을 들이받아서 차가 전파되는 사고를 당했다. 그 때에 자르갈랑 시장이 차를 보내어 도와주었는데 그 때의 인연을 더 발전시켜 이 곳에도 교회를 세우는 계기로 삼으려는 것이다. 임 선교사는 지난 1년 동안 자르갈랑에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임 선교사가 이 일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을 들고 자르갈랑에 가서 시장을 만나려 했으나 그새 시장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고 오늘따라 나담 축제준비문제로 사무실에 없다고 했다. 큰 꿈을 꾸고 왔다가 소득도 없이 돌아가나 했는데 새로 부임한 에드넷바타르 시장이 친히 우리를 찾아왔다. 이 분의 안내로 사무실로 들어가서 과거 시장에게 입은 은혜에 대해 감사 드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보령진흙으로 만든 머드랑 비누 셋을 선물로 드렸더니 감사해 했다. 데리고 갔던 몽골인 자매인 하나를 통해 이 곳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우리의 계획을 설명했더니 이 분이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며 원래 이 곳에 예수 믿던 사람이 제법 있다고 알려주었다. 7월 21일에 다르항에 도착하는 30명의 남가주 사랑의 교회 의료선교 팀이 이 곳에 와서 이틀 정도 진료를 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긍정적으로 받아주었고 시장 사무실 뒤편에 있는 적십자 병원장과도 만나서 협조를 구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이 일을 위해 무룬에서 돌아온 후 7월 14일 화요일에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이 때 병원장도 소개해 주기로 한 후 시장실을 떠났다. 원래 퇴근시간이 지난데다 나담 축제준비로 정신 없이 바쁜 사람인데 우리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 주었던 것이다.
이번 방문을 통해 나는 몽골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맛보았다. 중국은 같은 공산당 정권임에도 외국인들이 설교나 가르침을 못하도록 법으로 금하고 있어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음지에서 활동을 해야 한다. 특히 북경 올림픽과 티벳 사태로 인해 중국 곳곳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모든 사람들에게 외국인이나 낯선 사람이 눈에 뜨이면 공안에 신고를 하도록 훈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대도시의 경우는 모든 선교사들이 이미 철수했다. 그런 실정에서 2주간을 실내에서만 숨죽이고 지내야 했는데 이 곳에서는 당당하게 시장을 찾아가서 협조를 구할 수 있었다. 참 세상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하나님은 오늘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셨다. 하나님은 절대로 꿈을 가지고 신실하게 일하는 종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는 교훈이다. 과거 자동차 사고라는 작은 인연 하나만 달랑 가지고 이 곳을 교회 개척의 빌미로 삼겠다는 선교사의 꿈을 좌절시키지 않으시고 잠시의 실망 후에 더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신 것이다. 선교사는 광야에서 축복을 만드는 직분이다. 자르갈랑도 처음 방문해서 보았을 때는 소망 없는 광야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조금씩 작은 일에서 나타난다.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하신 대로 이렇게 작은 시작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에서 축복을 맛보는 훈련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큰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