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12일 “훕수굴에서 훗다군두루까지”
오늘은 다시 온 길을 거슬러 이르디닛으로 향하는 날이다. 시간이 16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이라 오늘은 우선 중간지점에 속하는 훗다군두루까지 가서 그 곳에서 1박 후 내일 남은 길을 마저 가려고 계획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7시에 호반의 자갈길을 한 시간 동안 걸으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솜씨를 마음껏 맛보고 난 후 잠시 호반의 벤치에 모여 아침 성경공부시간을 가졌다. 이번 여행 내내 아침 성경공부 시간 강사 역할을 맡은 내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을 테마로 삼아 “포기하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후 함께 무룬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중보했다. 일행 가운데 임 집사 아들 마이클이 영어권이라 내가 영어로 말씀을 전하고 임 선교사가 몽골어로 통역을 했다. 마무리 기도는 유니스 자매가 했는데 말은 알아 듣지 못했으나 기도가 뜨겁고 진솔해서 많은 은혜가 있었다.
아침 성경공부시간이 끝난 후 9시에 식당에 모여서 미국식으로 계란 부침과 쏘시지로 근사한 아침식사를 했다. 정말 이곳은 시설과 서비스 공히 최고급이었다. 임 선교사가 감사해서 관리인으로 일하는 자매에게 또 팁을 주니 이 분들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그냥 얼굴에 드러났다. 나중에 들으니 이 관리인 자매는 이 시설을 공동 운영하는 형제 가운데 형의 아내였다. 나이 30세의 한국형 미인인데 아이가 하나 있다고 했다. 영어는 못하지만 얼굴이나 태도가 아주 세련된 자매로서 귀티가 있었고 항상 섬기는 자세로 우리를 대했다. 임 선교사는 이미 무룬에 교회를 세울 작정을 하고 이 곳에도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이렇게 사전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 그 사이에 말을 탈 수 있는지 물어 보았더니 1시간당 1만 뚜구루 (미화 10불)면 된다고 해서 부탁을 했더니 말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멀리 떨어진 목장에서 말이 오는지 1시간 이상을 기다린 후에 12시 30분에야 말이 왔다. 젊은 몽골 아가씨가 말 네 마리를 몰고 왔기에 나는 그 가운데 큰 놈을 택했다. 사실 옛날 이스라엘 여행 시 페트라에서 한번 탄 후 처음이라 떨리기는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올라타니 요 녀석이 나를 우습게 보고 내 왼발을 지그시 물어보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안되겠기에 발로 툭 찼더니 얼른 주둥이를 돌렸다. 자매가 앞장서고 내가 바로 뒤를 따라 가는데 코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한 듯 하더니 15분 후부터는 가파른 절벽 길을 올라 가는데 금새 말이 미끌어 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올라갔다. 그래도 배짱 하나는 늘었는지 별로 두렵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봉우리 위에 올라서서 호수를 내려다 보니 경치가 그만이다. 봉우리에 올라 하마한 후 잠시 경치를 구경했다.
봉우리에는 도보로 올라온 젊은이들 네 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세 명의 백인 청년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홀랜드에서 와서 이 곳에 텐트를 치고 묵고 있다고 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젊은 아가씨인데 한국계 프랑스인이었다. 아마도 일찍 프랑스 가정으로 입양된 아가씨인가 본데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 냉소적인 태도로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프랑스인이라고 대답했다. 미국에 입양되는 아이들은 그래도 적응을 잘 하는 편이나, 유럽에 입양된 한국아이들은 적응을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아이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보다. 한창 나이의 처녀의 얼굴에 왜 그리 그늘이 많은지 돌아오면서 줄곧 내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이 고아 수출국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맛보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아가씨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 곳 몽골인들의 근본문제도 극심한 열등의식과 비전상실현상이다. 바로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자녀 삼아 주시고 이 곳까지 보내셔서 일하게 하시는 것이다.
봉우리 꼭대기에서 잠시 휴식한 후 반대편으로 내려가는데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말을 끌고 내려갔다. 하마하고 말을 몰고 가는데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후 경사가 완만해져서 다시 말을 타고 호반의 자갈길을 거닐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임 선교사가 이 안내 아가씨에게 몽골어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가씨 이름은 잡장돌람이고 나이는 22살이라고 했다. 아빠 없이 엄마 혼자 자기와 두 남동생을 데리고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몽골에는 이렇게 아빠 없이 자녀를 부양하는 자매들이 많다.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는데다가 남자들이 무책임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인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만 하면 경우를 불문하고 국가에서 보상금을 주고 아이가 크면 무상으로 땅까지 제공하는 것이다. 이르디닛 교회의 곰보 자매의 여동생도 울란바타르에 공부하러 갔다고 애기 하나를 달랑 데리고 와서 처녀인 언니에게 떠맡기고 가 버렸다. 곰보 자매의 모친도 몸이 불편해서 돌봐 드려야 하는데 동생의 아기까지 돌보느라 곰보 자매의 인생이 고달프다 했다. 현재 잡장돌람은 근처에 있는 아르항가에 위치한 아르항가 박싱 소르골르 대학 4학년이라고 했다. “소르골르”라는 말은 학교라는 뜻이다. 몽골어를 전공하고 있는 교사지망생으로 방학 동안 집에 와서 이렇게 일을 도우는 중이라고 했다. 임 선교사가 이 아가씨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든 영어는 반드시 익혀야 하고 가능하면 한국어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더니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 아가씨 용모도 보기 드물게 매력적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아주 온순해서 임 선교사 마음에 꼭 들어서 특별히 팁을 주었다. 성경을 보내 주겠다고 주소를 달라고 했더니 종이에 알뜰하게 적어서 임 선교사에게 주었다.
임 선교사는 무룬에 교회를 세우면 이 곳에도 자주 올 기회가 생길 것이기 때문에 이 아가씨와도 관계를 쌓아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려는 것이다. 누구를 무슨 인연으로 만나게 하시든 우리는 복음을 전할 계기로 삼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다. 때를 얻던지 못 얻든지 전도에 힘쓰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갈길을 거쳐서 숲 속을 가노라니 다들 흥이 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한국어로 Amazing Grace 를 부르니 임 선교사가 영어로 불렀다. 잡장돌람도 몽골어로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는데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꼭 한국의 신파조 같았다. 임 선교사가 물으니 홉수굴 호수에 관한 노래라고 했다. 즐겁고도 스릴 넘쳤던 말타기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오후 1시 30분이었다. 서둘러서 식당에 가니 숙수가 우리를 위해 한식으로 별식을 만들어 왔다. 김밥에다 무우국과 소고기 불고기 두 접시를 내어온 것이다. 다들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라 포식했다. 무우국은 무우를 채로 쓸어서 물에 넣고 끓여서 그 위에 고추 가루를 잔뜩 뿌려서 가지고 왔는데 보기보다는 먹을 만했다. 한국음식은 무조건 고추 가루를 잔뜩 뿌리면 되는 줄로 생각하는지 오이채를 가져와도 고추 가루를 뿌리고 짠지를 가져와도 고추 가루를 듬뿍 뿌려서 가져왔다. 불고기는 한 가지는 그냥 소금간을 해서 구운 듯하고 하나는 감자와 소고기를 섞어서 볶은 것이었다. 너무 익힌 관계로 딱딱해서 내가 씹기에 애로는 있었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두 접시 모두 비웠다. 우리를 생각해서 이렇게 특별대우를 해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식사를 끝나고 짐을 꾸려서 차로 왔더니 전 직원 12명이 모두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떠나기 전에 가지고 갔던 과자류를 모두 꾸려서 아기가 있다는 자매에게 주고 나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 모두가 베풀기 좋아하는 임 선교사의 마음 때문이다. 향후 이 곳에 올 때마다 이 곳에 들러서 좋은 교제를 주안에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무룬에 교회를 세운 후 이 곳에도 셀 교회를 세우는 꿈이 마음 속에 영글고 있다. 우리의 꿈은 먼저 마음 속에 열매를 맺고 나서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마음 속에 꿈을 꾸고 열매를 맺지 않는 인생은 결단코 삶 속에서 열매 맺지 못한다. 마음 속에 근심을 품지 말고 미래를 향한 힘찬 꿈을 가지고 열매를 맺혀라. 그것이 삶을 복되게 하고 살찌는 길이다. 꿈이 없는 자는 살아 있는 자 같으나 움직이는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오후 3시에 훕스굴을 출발해서 1시간 정도 달리다가 볼 일도 볼 겸 잠시 차를 세웠다. 주위를 살펴 보니 목초지인데 유독 키가 큰 식물이 군데군데 보였다. 생김새가 꼭 한국의 육모초 같기도 하고 쑥처럼 생기기도 해서 궁금해서 잎을 만졌다가 봉변을 당했다. 어릴 때에 땅벌에 쏘인 적이 있는데 그 통증보다 더 큰 통증이 식물을 만진 오른 손 식지에 밀려드는데 아주 죽을 맛이었다. 처음에는 불에 덴 듯이 화끈거리더니 나중에는 간헐적으로 쿡쿡 쑤시는데 이거 정말 못 견디겠다. 유니스가 보더니 기절을 하게 놀랐다. 이 식물의 이름은 “할가이” 라고 하며 몽골어로 뜨겁다는 뜻이라 했다. 만졌을 때 통증이 너무 심해 “아이 뜨거라”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리라. 처음 싹이 오를 때에는 독이 없고 비타민과 영양이 풍부해 강정제로 사용되는 식물이지만 여름이 되어 키가 자라면서 독성이 오르고 나면 만지기만 해도 큰 낭패를 당하게 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는 손이 퉁퉁 부어 오르고 고름이 잡히는 경우도 있다. 워낙 광야에 흔한 식물인지라 아이들이 손을 대는 경우가 많아 몽골인들에게는 친숙하다. 아이들이 만져서 고통에 몸부림치면 해독하기 위해 인분을 바른다고 하며 다른 약은 없다. 식물이 아직 독이 없는 봄철에 수확해서 차를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요사이는 중국인들이 대량으로 구매해 간다고 한다. 워낙 정력제라 말이 좋아하는 식물인데 요사이 수확해 놓았다가 가을철이나 겨울철에 말이 기운이 진할 때 먹이면 말이 금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난다고 했다.
리라에게 할가이 외에도 주의해야 할 독초가 없는지 물었더니 할가이만 주의하면 된다고 했다. 먼 길을 운전하면서 내가 할가이에게 봉변당한 것이 좋은 입 반찬이 되었다. 할가이가 보일 때마다 리라가 낄낄거리면 내게 "할가이 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직도 아프냐고 물으면서 유일한 해독방법을 사용해 보겠냐고 찔러대었다. 정작 피해당사자인 나는 손끝이 쑤셔서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인데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에는 재미가 깨가 쏟아지는 것이다. 참 악취미는 악취미인거라. 이러니 원죄가 있기는 있는 것이여. 우리 가운데 몽골인 리라는 특히 장난이 심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다. 리라가 옆에서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한다는 말이 김 목사는 애이락도 잘 먹고 게르에서도 주는 대로 무엇이든 넙죽넙죽 잘 받아 먹더니 이제 할가이 맛까지 보았으니 몽골인이 다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짧은 몽골 체재를 통해 몽골 맛은 골고루 다 보았다. 내 평생 할가이에 당한 이 사건은 기억되리라. 한번 할가이에 당하고 나서 보니 가는 곳마다 할가이가 눈에 뜨였다.
오후 6시 경에 무룬에 도착하여 기름탱크를 채운 후 바로 홋다군두루를 향해 출발했다. 몽골에서 차로 여행을 할 때에는 기름가게가 보일 때마다 기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 왜냐 하면 도시간 간격이 너무 먼데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자칫하면 기름이 떨어져서 낭패를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 야간에는 길이 복잡하여 자칫하면 광야에서 길을 잃고 몇 시간이고 헤맬 수도 있다. 기름을 채우고 나서 무룬에서 하룻밤을 보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아무래도 내일 여행시간을 줄이는 것이 현명한 듯하여 훗다군두루까지 강행군을 하기로 했다. 밤이 깊어가니 오늘 밤 따라 구름이 많아 캄캄하여서 길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저녁 10시가 넘었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 경험 많은 몽골인인 리라가 몰고 있었는데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왼쪽을 보니 아득하게 먼 곳에 차가 지나가는지 불빛이 보여서 그 곳이 길인 줄 감은 잡았으나 깜깜한 밤에 길도 아닌 들판을 가로질러서 그 곳까지 찾아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 가운데 유니스가 가장 길눈이 밝은지라 리라와 두 사람이 연합작전을 펼쳐서 길을 찾아가는데 한참 가다 보니 또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길을 가고 있었다. 다시 방향을 돌리어 길을 찾는데 외따로 떨어진 집이 한 채 보였다.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다행히 주인이 아직 깨어 있어 훗다군두루 가는 길을 물었더니 설명은 해 주는데 이 밤중에 길을 찾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을 더 헤매다가 겨우 길을 찾았다. 이렇게 길을 물을 때에도 야밤에는 절대로 차에서 내려서 문을 두드리면 아니 된다. 어느 집이나 사나운 개들이 있어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고 또 주인에게 위협적 존재로 비치기 쉽기 때문이다. 차에 앉아서 큰 소리로 주인을 부르면 주인이 차로 다가오게 되어 있다. 유목민이라 길을 묻는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정상이다.
우여곡절 끝에 훗다군두루에 도착하니 자정이 훌쩍 넘어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다행히 호텔이 보여 방을 잡았다. 그런데 기분 나쁜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외국인이라고 해서 호텔 방값을 특별히 비싸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호텔 방에서 샤워를 하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가격은 하룻밤에 방당 2만 6천 뚜구루 (미화 26불)라는데 시설에 비해서는 비싼 편이었다. 에어컨도 안 되는 차로 오후 3시에 홉수굴에서 출발해서 10시간 동안을 몰다 보니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데다 어제는 게르에서 자느라 샤워도 하지 못했기에 우선 샤워부터 하려고 물을 덮어쓰고 비누칠을 머리와 온 몸에 했는데 갑자가 물이 나오는 않았다. 임 선교사에게 얘기해서 호텔에 조치를 부탁했더니 한참 있다 한다는 소리가 급수시설이 고장 나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다 하는 소리이고 사실은 이런 소도시에서 발전기를 돌려서 급수시설을 가동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일부러 단수를 한 것이다. 머리와 몸에 온통 비누칠은 했으니 눈도 뜨지 못하고 난감한 형편으로 서 있는데 임 선교사가 병물을 한 병 들고 와서 간단하게 우선 비누거품부터 얼굴에서 걷어내고 약식으로 비누만 닦아내는 선에서 끝냈다. 참 샤워 한번 거하게 했다. 그래도 들판에서 야숙할 뻔 했는데 이렇게 침대에서 눈을 부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임 선교사는 그래도 금새 코를 골며 잠들었는데 나는 할가이에 당한 통증이 손끝에서 떠나지 않아 눈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다 술 취한 몽골인 숙박객이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소란을 피워서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참 사연도 많은 하루였다. 이런 추억 일부러 만들래도 어려울 텐데 오늘 하루는 사건의 연속이다. 꿈결처럼 아름답던 훕스굴 호반의 산책으로 시작한 하루가 할가이의 고통과 야밤에 길을 잃는 사건으로 이어지더니 물없는 샤워사건으로 마무리진 화려한 하루일과였다.